바오로인은 성바오로의 표양대로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살아갑니다.
(창립자 G.알베리오네)
(창립자 G.알베리오네)
그는 모든 이를 이해하며 모든 이와 영적 통교를 나누었다.복자 디모테오 쟈카르도 신부는 여러 가지 특별한 이름을 지니고 있다. 성바오로수도회의 첫 사제, 바오로인으로 첫걸음을 시작하는 지원자들의 첫 양성 책임자, 수도회의 첫 분원 공동체의 책임자 그리고 수도회의 첫 부총장이라는 것들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가장 자랑스러운 것은 바오로 가족의 첫 복자라는 사실이다.
그는 항상 모든 이의 모든것이 되었다. 꼴찌로 내려가 첫째가 되었다.
복자 디모테오 쟈카르도 신부는 여러 가지 특별한 이름을 지닌다. 성바오로수도회의 첫 사제, 바오로인 생활에 첫걸음을 시작하는 지원자들의 첫 양성 책임자, 수도회의 첫 분원 공동체의 책임자 그리고 수도회의 첫 부총장이라는 것들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가장 자랑스러운 것은 바오로 가족의 첫 복자라는 사실이다.
복자 디모테오 자카르도 신부는 1896년 6월 13일 이탈리아의 나르졸레 마을에서 태어났다. 그는 어릴 적에 고향마을에서 복사를 하다가 알베리오네 신부를 만나 알바 신학교에 입학하였다. 시대의 새로운 요청에 민감했으며, 복음화의 현대적인 사목수단에 개방되어 있던 그는 1917년 주교의 동의를 얻어 신학교에서 성바오로수도회로 입회하여 첫 소년들의 책임자로 활동하였다.
1926년 1월에 자카르도 신부는 성바오로수도회의 분원을 개설하기 위해 로마로 파견되었고, 1936년에 모원의 원장으로 임명되어 알바로 되돌아 왔다. 성바오로수도회 부총장이며, 설립자의 충실한 협력자였던 자카르도 신부는 다른 바오로 가족을 위해 부단히 애써 왔으며, 심원한 내적 생활로 그들을 이끌고 또한 각 회의 고유 사도직으로 이끌었다.
특히 그는 스승 예수 제자 수녀회가 교회의 인준을 받을 수 있도록 생명을 봉헌했다. 주님이 그의 봉헌을 받아들여 그는 1948년 1월 24일 선종하였다. 알베리오네 신부는 자신의 영적 아들인 자카르도 신부를 가리켜 '충실한 사람들 중에서도 가장 충실한 사람'이라고 말하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그의 시복 추진은 1955년 6월 8일 알베리오네 신부의 확고한 의지와 함께 시작되었다. 1989년 10월 22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그분을 '복자'로 선언했다. 그는 모든 사람들이 스승으로 따르는 모범이었으며, 모든 사람을 가르쳤고, 모든 사람에게 도움을 주었으며, 빛을 받은 열정적인 기도로서 모든 것을 건설했다.
그는 모든 이를 이해하며 모든 이와 영적 통교를 나누었고 모든 이의 모든 것이 되었다. 꼴찌로 내려가 첫째가 되었다. 그는 매우 섬세하였고 매우 부드러웠으며 매우 친절하였다. 그는 사제, 평수사들, 바오로딸 수도회 수녀들, 스승 예수의 제자 수녀들, 선한 목자 예수의 수녀들을 마음과 영혼을 다해 돌보았다. 그리하여 많은 사람들이 영적, 사회적, 경제적 관계에서 그분 가까이 가기를 원하였다.
나는 나의 모든 힘을 다해 공부, 일에 충실하렵니다.마죠리노는 1904년 5월 6일 이탈리아의 베네벨로 마을에서 가난하고, 겸손한 농부이며 신앙심이 깊은 부모님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는 활짝 열린 지능과 쾌활한 성격의 소유자로서, 모든 면에서 첫째가 되기를 원했었다. 그는 성바오로수도회가 탄생하기 이전 그의 고향 마을에서 알베리오네 신부를 만나 자신의 영적지도자로 의탁하였고 1916년 10월 15일 성바오로수도회에 입회하였다.
주님은 내게 나의 성소와 바오로인의 사명에 맞갖는 승리를 주십시오.
그는 자신의 생명으로써 하느님께 최대의 영광을 바치고 인류에게 선익을 가져다주고자 하는 원의 속에서 수도서원을 주님께 완전히 봉헌하였다.안드레아 보렐로 수사는 1916년 3월 8일 이탈리아의 망고 마을에서 태어났다. 아홉 살 때에 전쟁 중에 아버지를 잃고 재혼한 어머니와 함께 따나로 계곡으로 새로운 가족을 따라 이주하였다. 그곳에서 보렐로는 그리스도교적 덕성으로 농사일을 하며 본당활동과 가톨릭 젊은이 모임에 열심히 참여하였다.
그는 사회 커뮤니케이션 수단을 통한 복음화 사업의 협력자가 되고 싶었던 것이다.
1933년 한 주 만에 아버지와 어머니의 죽음을 겪고, 자신을 친아들처럼 받아들인 지주의 가정으로 거처를 옮기게 된다. 그곳에서 알베리오네 신부가 쓴 마죠리노 비고룽고의 전기를 읽으면서 성바오로수도회의 수도생활을 동경하다가 1936년 7월 8일 성바오로수도회에 평수사로 입회한다. 그는 자신의 생명으로써 하느님께 최대의 영광을 바치고 인류에게 선익을 가져다주고자 하는 원의를 가지고 수도서원을 주님께 완전히 봉헌하였다. 사회 커뮤니케이션 수단을 통한 복음화 사업의 협력자가 되고 싶었던 것이다.
1938년 4월 7일 천상 스승의 제자로서 첫 서원을 하던 날 안드레아라는 이름을 수도명으로 받았다. 젊은 수도회가 매우 중요하게 생각하던 제지 공장에서 3년 동안 사도직을 수행하였다. 그 사도직은 아주 힘든 사도직이었으나 그는 복음 전파에 참여하고 있음을 깊이 인식하고 있었다. 그의 기도는 매우 강렬하였다. 그 시기는 수도회에 지원자들과 서원자들이 많이 있었기 때문에 거의 모든 것을 자급자족하며 살아가던 때이기도 하였다. 이러한 연유로 구두를 만들기도 하였는데 1941년 보렐로 수사에게 이러한 소임에 대한 요청이 있었고, 그는 단순한 순명으로 임무를 수용하였으며 뛰어난 유머 감각과 초자연적 영성의 모범을 드러내며 깊은 관용으로 자신의 일에 충실하였다.
보렐로 수사는 성소와 수도회에 대한 크나큰 사랑으로 부르심을 받은 모든 이가 성소의 은총에 충실할 수 있도록, 영적 지도자의 동의를 얻어, 1948년 3월에 하느님께 자신의 생명을 봉헌하였다. 이러한 그의 의향은 항구한 봉헌 속에서 지속되었으며 그는 임종 때까지 시련을 받았다. 안드레아 보렐로 수사는 중증의 폐결핵에 걸려, 1948년 9월 4일, 32세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