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뭐든지 잘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하늘을 향한 노래 3
3. 사랑을 위하여, 하늘을 위하여 노래를 불러라.
청년들의 모임, 연극, 사물이며 시낭송의 밤 등 다양한 모습들 안에서 함께 어우러지도록 몇몇 형제 자매들과 분주하게 움직였다. 옛날 함께 하던 선배들의 후원과 사랑으로 본당 청년들은 활기를 조금씩 찾고 나의 활동범위는 좀더 넓어지게 되었다. 이런 모습을 어여삐 보셨는지 울산 10지구 청년지도 신부님께서(김수원 바오로 신부) 나를 청년 연합회 회장으로 밀어 주시어 나는 울.가.청 연합회 회장이 되었다. 본당청년 회장을 겸하고 있었으므로 거의 성당에서 살다시피 해야만 했다. 예전의 열정적으로 활동하던 시기보다 더 힘든 시기였던 것 같다(개인사업을 했음). 새벽 3시부터 납품을 하고 나면 아침을 먹고 조금 휴식을 취한 후 성당으로 달려가 일을 했다. 그때 같은 업종의 일을 하던 후배 종태 로만을 부회장으로 하여 청년들이 학교에 가거나 출근하여 일할 수 없는 시간에 로만과 휴학생을 데리고 일을 했던 것이다. 우리 본당(전하)에는 하나의 전통처럼 되어버린 것이 있었는데 청년회장을 지내고 나면 다음 해에는 장가를 간다는 것이었다. 나 또한 예외일 수는 없었는지 생애 첫사랑이 찾아왔다.
동구지역(전하, 바오로, 방어진) 청년 하계수련대회를 준비하면서 만나게 된 자매였다. 자매는 방어진 본당 출신이었는데 첫 모임에서 첫눈에 반해버렸다. 너무 예쁘고 당차고 귀여웠다. 이렇게 또 하나의 일이 더 늘어 몸은 서서히 축이 나기 시작하였다. 잠도 모자랐고 청년들과 또는 사업상 과음도 무시할 수 없었다.
한편으로는 기쁘면서도 한편으로 평화롭지 못한 생활이 되어가고 있었는데, 우연찮게 성체조배를 하는 동우 요한을 알게 되면서 영적 대화로 마음의 평안을 찾을 수 있었다. 그리고 이런 분위기로 사랑을 만들어갔다. (나는 그때 나이가 서른이었기에 결혼을 전제로 만나고 있었다. ) 첫사랑 자매가 자기 본당에 십자가의 후광을 만들어주는 등이 설치되었다고 함께 기도하지 않겠느냐고 나를 초대하였다. 아무도 없는 캄캄한 성당에서 십자가에 동그란 후광을 드리우고 우리는 손을 꼭 잡고 각자의 마음으로 기도하고 있었다. 그 때 자매의 기도 내용은 몰랐지만 그 날은 나에게 중요하고 잊지 못할 날이 되었다.
"당신의 자녀들이 여기 와있습니다. 앞날의 험한 길을 함께 하고자 하오니 주님 보살펴주시고 이끌어주소서. 다만 저희 뜻대로 마시고 당신의 뜻대로 하소서. 아멘."
나의 마음 기도가 끝나자마자 내리는 말씀이 있었다.
"너희는 사랑할 것이다. 하지만 내가 마련한 방법이 따로 있다. 나를 따라오너라. 사랑을 위하여, 하늘을 위하여 노래를 불러라."
이 내용은 지금까지 첫사랑의 자매에게 고백은 못했지만 "다만 저희 뜻대로 마시고 당신 뜻대로 하소서."라는 고백에 많은 미련을 가지고 얼마 동안 서로 힘들어했다.
이렇게 작은 사랑은 큰 사랑에 안기어 시간이 흘렀고, 나도 예전에 가지고 있던 수도의 삶, 하늘을 향한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간혹 성당에 들러 조배할 때 서로 마주치기는 했으나 서로의 길을 위해 피해주곤 했다. 내가 가장 아끼는 양동생 율리아나와 함께 첫사랑 자매는 그렇게 입회를 했다. (98년 10월 13일) 그곳 수녀원까지 짧은 미소로 배웅을 하고, 완강하시던 아버지의 허락 아래 나도 1998년 11월 26일 성바오로 수도회에 입회를 했다.
입회 때부터 지금까지 하느님을 사랑하고 살며 아버지를 하느님의 품으로 보내드리는 인간적인 아픔과 고통도 있었지만 하늘을 향한 노래는 지금도, 아니 내일도 이어져갈 것이다.
지난 시간 동안 많은 도움을 주신 심원택 토마스 신부님, 이성주 프란치스코 신부님, 이재만 마르코 신부님, 김명선 요한 신부님과 샬트르 성바오로 수녀회 구 마리아 수녀님과 데레사(길손) 수녀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마지막으로 저를 위해 기도해주신 모든 분들과 가족들, 수도원에 형제들, 특히 수련을 잘 이끌어주신 백 신부님께 감사를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