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뭐든지 잘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길 1
길
- 김준모 꼴베 수사
이 글을 적기 전에 나보다 앞서 이 자리에 선 이들을 다시 한 번 보았다. 그들은 자신들이 지닌 모든 것을 털어 버리고 새로운 모습으로 태어나려고 하는 듯 하였다. 마치 아기가 어머니의 태중에서 세상으로 나오기 위해서 노력하듯이.
나 또한 이 자리에 지금까지 내가 짊어지고 온 짐들을 내려놓고자 한다. 그리고 새로운 모습으로 거듭나고자 한다. 하느님 앞에 다가서지 못한 나의 부끄러움을 털어 버리고자 한다.
● 삶의 자리
입회 전까지 내 삶의 자리를 시간에 따라 나열하면 다음과 같다. 대구 파티마 병원에서 태어나서 평리동이라는 곳에서 유아기를 보내다가 친지들이 살고 있는 경상북도 무성동으로 그리고 다시 대구로.
대구는 유교 전통이 강하게 자리잡고 있는 보수적인 도시다. 자녀에 대한 교육열이 높은 곳이다. 발달된 산업으로는 섬유 외에는 특별한 산업이 없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교육과 행정의 중심지이며 소비 지향적인 도시이다. 지형이 분지이기에 여름이 유난히 무덥고 길다. 이곳에서 25년 이상의 시간을 보냈다.
무성동은 사과와 쌀이 주요 작물이다. 대구와는 차로 2시간 정도의 거리이다. 70년대는 새마을운동을 경험하였고 80년대는 도시화로 인한 이농현상을 경험한 농촌이다. 대다수의 사람들이 김이라는 성을 사용하는 집성촌의 성격을 지니고 있다. 또한 남아 선호사상이 강하게 자리하고 있다. 그러기에 나는 태어나기 전에 내 이름이 지어져 있었고 태어난 다음 날 출생신고를 하여 호적에 올려졌다. 이는 할아버지의 혁혁한 공로였다. 하지만 내 여동생은 출생 후 일년 뒤에나 이 일이 가능했다. 아마도 허약한 나 때문에 할아버지께서 힘이 드셨던 모양이다. 이곳에서는 1년 정도의 기간을 보냈지만 나에게 크게 자리하고 있다.
● 보금자리
외가는 대구 토박이면서 구교 집안이라고 할 만했다. 특히 외할머니의 신심이 강했던 것으로 기억이 된다. 외할머니의 덕으로 할아버지와 할머니 두 분 모두 대세를 받으셨다. 이런 외가의 공로로 나는 태어난 지 한 달이 지나기도 전에 세례를 받았다. 첫 영성체는 초등학교 3학년 때, 견진은 6학년 때 했다.
나의 친지들은 보릿고개로 인해 고심하지 않는 부농이었다. 과수원과 농지를 소유하고 경작하면서 일꾼을 집안에 두었을 정도로 부유한 농가였다. 땅을 소중히 하고 집안의 대를 잇는 일에 큰 가치를 두고 있었다. 그러기에 대구에서 지내던 우리 네 식구가 할아버지의 죽음으로 도시생활을 정리하고 귀향했다. 내가 알기로 아버지께서 장남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대구로 다시 이사를 한 후에도 한 동안 농지를 소유하고 있었다. 시대의 변화에 민감하지 않는 보수성을 지녔기에 집안 살림은 상대적으로 기울어갔다.
종교적으로는 어느 특정 종교를 선호하거나 배척하는 일이 없었다. 할머니가 단지 무속신앙에 대한 소박한 믿음이 있었다. 한번은 할머니께서 집안에 있는 모든 쇠붙이를 모조리 버린 적이 있었다. 나의 피부병을 낫게 하기 위해서 그렇게 해야 한다는 어떤 점쟁이의 말을 듣고 그렇게 하셨던 것이다. 이러한 덕에 어머니의 신앙생활에는 큰 어려움이 없었다.
양 집안의 공통점은 사람 됨됨이와 정을 중요한 덕목으로 생각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집안 분위기로 인하여 나에게 어떤 일을 하느냐 보다 어떤 사람들과 함께 하느냐가 더욱 큰 가치로 자리하게 되었다.
시골에서 올라온 부모님은 구멍가게를 잠시 하시다가 다시 이사를 하면서 방앗간 일을 하였다. 상가와 주택이 함께 있는 연립주택이었기에 이 일은 우리 가족의 일이 되었다. 이 일은 내가 입회를 하기 전까지 계속되었다. 동생과 나에게는 명절이 그리 즐거운 일이 되지 못했다. 이런저런 이유로 부모님은 항상 함께 하셨고 우리 남매는 집에만 돌아오면 두 분 모두 뵐 수 있었다. 두 분의 공통점은 정직하다는 것이다. 또한 검소하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