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뭐든지 잘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예 2
안녕하세요...... 오랫동안 기다리셨지요?
동안의 침묵을 깨고 봄의 햇살처럼 다시 글을 올려 드리겠습니다.
"어머니, 저는 결혼생활 보다는 신부님, 수녀님들처럼 봉사하면서 살고 싶어요" 라고 말을 한 뒤 어머니의 표정을 유심히 바라보는데 어머니께서는 "내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에는 그렇게 할 수가 없다."고 말씀하시면서, 다시는 그런 이야기는 꺼내지도 말라고 엄중하게 훈계하시는 것이었다. 그러나 나의 생각은 그것으로부터 떠날 수가 없었고, 봉사의 길을 걸을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기도하면서 주위 분들께 그러한 삶을 살 수 있는 곳을 알고 있으면 소개 해 달라고 조언을 구하기 시작하였다. 또한 인연을 맺고 있는 ○○기관을 내 집처럼 오가며 하나하나 배워나가기 시작하였다.
그러던 중 방위 소집을 받고 대구 근교의 공군 부대에 입대를 하였다. 나는 이곳에서도 질세라 첫날부터 천주교 신자임을 묵주로 증거를 했다. 1개월의 훈련기간은 고달프고 힘이 들었지만 언제나 예수 마리아께서 함께 하여 주심을 믿고 모든 것을 맡겼다. 그런데 참으로 신통한 것은 아무리 훈련을 고되게 받아 피곤했어도, 이튿날 기상나팔이 불기 전에 일어나 침상 속에서 묵주기도 5단을 다 바칠 수가 있었다. 하루는 부대 밖을 행진하는데 어떤 건물에 십자가가 높이 걸려 있어서 처음에는 개신교인줄 알았는데 성당이었다. 성당 옆에는 아주 조그마한 성모상이 하늘을 향해 두 손을 모으고 있었다. 마음 같아서는 뛰어가 성체조배를 하고 싶었지만 행진 중이라 어쩔 수가 없어 성당을 향해 왼손을 가만히 가슴에 얹고 작은 십자가로서 성체조배를 대신 하였다.
입대 후 훈련 중에는 어느 종교를 막론하고 종교시간은 허락이 안되었기에, 성모님과의 도 다른 만남은 말할 수 없을 정도로 기뻤다. 가끔 행진할 때면 은근히 성당 근처를 지나갔으면 하는 바람이 솟았고, 운이 좋아 성당 근처를 지날 때면 으례히 작은 십자가를 그으며 성모님께 인사를 드리곤 하였다. 1개월의 훈련을 마치고 순서에 따라 각자 특기대로 배치를 받기 시작하였는데 나는 전화 교환병이었다. 상상외로 좋은 특기를 받은 나는 '천주께 감사'를 마음 속으로 되 뇌이며 성모님께서 도와 주셨음을 깊이 느꼈다. 근무 시간이 3교대였으므로 영적 독서나 제대 후의 진로 문제에 대해서도 생각할 수 있는 은총의 순간들이 많았다.
그러나 매일 기쁨만이 허락되지는 않았다. 가끔 주위로부터 밀려오는 유혹과 어려움, 큰형의 입언 등은 정신적으로 무척 힘이 들었으나, 슬기롭게 이겨 나갈 수 있었던 것은 무엇보다도 신부님, 수녀님들과 주위 신자 분들의 도움과 상사들의 따뜻한 사랑의 힘이었다고 새롭게 느껴진다.
방위 복무를 마치고 마땅한 직장을 찾아보았지만, 연말연시가 겹친 탓인지 쉽지가 않아 일단은 접어 두고 성당을 오가며, 안팎으로 또다시 불을 지피기 시작하였고 조심스럽게 수녀님께 자문을 구했다. 수녀님들께서는 무척 기뻐하시면서 함께 기도하자고 하시며 용기를 주셨다. 그러나 집안에서는 직장 구할 생각은 하지 않고 성당 일에만 매달려 산다고 성화였다. 어느 때에는 너무 힘이 들어 눈물을 흘린 적도 있었고, 어머니 말씀처럼 모든 것을 포기하고 가정을 가지고 평신자로서 살아갈까 하는 생각이 들 때도 많았으나, 그런 생각을 하면 할수록 보이지 않은 힘에 더 강하게 이끌렸고, 드디어 모든 것을 부르심에 맡기기로 하고 문을 두드리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정보 부족으로 쉽지가 않았다. 그때 바로 생각난 곳이 성모의 기사회 본부인 ○○수도회였다. 영세한 후 얼마 되지 않아 성모의 기사회에 가입하여 자주 왕래하던 곳인지라 그분들이 어떠한 삶을 살고 있는지를 조금은 알고 있었고, 그래서 찾아가기도 참으로 쉬웠다. 지도 신부님은 내 듯을 들으시고는, 수도자의 기이 아닌 봉사의 길을 가고자한다면 다른 곳을 한번 알아보라고 하시면서 마지막으로 하시는 말씀이, 영세 받은 지 얼마 안되었으니 시간이 지난 뒤 수도자로 살아가고자 한다면 다시 이야기하자고 하셨다. '수도자의 삶이라.... 수도자의 삶이라.... 나는 그저 양로원이나 사회복지 시설에서 봉사하면서 살아가고자 했을 뿐인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