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뭐든지 잘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예 5
장미 향기 가득한 성모성월이 지나고 예수성심성월의 촛불이 환히 밝아진 어느 날, 전혀 생각지도 않았던 것이 스쳐갔다. 그리고 이내 전화를 수도회가 아닌 성바오로 서원으로…. 이튿날 주일미사 참례를 하고서 지금껏 관심이 없었고 생각 밖이었던 성바오로 수도회의 성소자 모임에 참석하였는데, 원장 수사님과의 만남은 나의 성소에 새로운 싹을 움트게 하였다. 지금도 잊지 못하는 것은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하신 질문이었다. "너 나를 사랑하느냐?"(요한 21, 15∼19)
원장 수사님께서는 강의가 끝날 무렵 이 구절을 각색한 복사물을 나눠주시며,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질문하신 것처럼 각자에게 물으신다면 어떻게 대답할 것인지를 물으셨다.
"예, 주님 당신께서 아시는 바와 같이 당신을 사랑합니다. 그러나 아직은 너무 부족합니다……."
솔직히 나는 모든 면에서 너무나 부족했던 것이다. 첫 번째 만남을 이렇게 보내고 본원을 한번 방문하고 싶다고 말씀드렸다.
모든 것은 순조롭게 이루어졌고, 지난번처럼 또다시 야간열차에 몸을 싣고 미아리로 향했다. 새벽에 도착하여 혜화동에서 새벽미사에 참례하고 수도원 마당에 들어서니, 유 신부님께서 마중(?)을 나오셨다. 솔직히 그때는 뭐가 뭔지 얼떨떨하였지만 기쁘게 지낼 수가 있었던 것은 무엇보다도 공동체의 분위기가 나를 사로잡았고 당시 몇 명 안되었지만 무엇인가 꿈틀거리고 있었음을 보았기 때문이다.
9월 순교자 성월에 본당에서는 성령 세미나가 개최되어 본당은 활기가 넘쳐있었고 참석한 모든 이들도 세미나에 진지하게 임하였다. 그런데 안수를 받기 이틀 전쯤부터 몸이 이상(?)이 왔다. 단순하게 하고 약을 먹었으나 그때뿐 시간이 지나도 별 차도가 없이 조금씩 더해만 갔다. 그렇다고 누구에게 드러내놓고 이야기를 못할 형편이어서 여러 가지로 약을 써보고 병원에 가서 진찰도 받았지만 가볍게 처방을 내리며 약을 계속해서 먹어보라고 하였다. 약을 먹으면서도 "이 모든 것 당신의 뜻이라면 기쁘게 받겠습니다. 그러나 너무 힘이듭니다. 하실 수만 있다면 깨끗이 낫게 해주시어 당신의 도구로 써 주십시오." 라고 골방에서 바치던 간절한 기도….
이미 원장 수사님께서는 11월경에 입회했으면 좋겠다고 하셨기 때문에 걱정이 먼저 앞섰다. 좋지 못한 건강으로는 자신이 없었기 때문에 일단 입회시기를 뒤로 미루기로 하고서 때를 기다렸으나 여러 가지로 마음이 가볍지를 못했다. 날씨가 차가워질수록 상태는 더 심하게 나타났고, 차를 탄 후에는 어지러움 증세까지 나타나기 시작하면서 내적으로도 괴롭기 시작했다. 약 3 개월째 변화가 없자, 수도성소까지도 포기하기로 생각하고 11월 모임에 가서 나의 입장을 솔직히 말씀드렸더니 원장 수사님께서 약을 보내 주시겠다고 약속하시며 함께 기도하자고 하셨다. 약 1 주일 후 딸 수도회 수녀님으로부터 약을 건네 받고 복용하기 시작하였다. 처음 얼마간은 별 차도가 없었지만 기분이 상당히 좋았고 몸이 예전보다도 가벼움을 느꼈을 즈음, 원장 수사님께 "빨리 겨울이 지나고 봄이 오면 좋겠습니다. 87년이 가고 새해가 오면 나을것 같습니다."라는 연락을 드렸다.
그러게 짖굿던 87년이 가고 88년으로 해가 바뀌면서 그렇게 쉽게 회복되지 않을 것 같은 상태가 조금씩 호전되어 전국 성소자 모임에는 힘은 들었지만 기쁘게 참석할 수 있었다.
입회서류 준비는 순조로이 진행이 되어갔는데, 한 가지 문제가 있었던 것은 부모님 동의서에 도장을 받는 것이었는데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지금껏 반대하시던 어머니께서 하루아침에 동의하실 리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지성이면 감천''''이라 했듯이 여러 차례 대화를 한 결가 어머니께서는 못마땅하게 여기면서도 허락을 하셨다. 어느 정도 마음을 가라앉힌 후 종합진단을 받은 결과 이상이 없다는 결과가 나왔다. 너무나 기쁜 나머지 병원에서 서울 본원으로 전화를 드렸더니 신부님과 원장 수사님께서도 기뻐하시며 며칠 후에 1주일간의 대피정이 있으니 올라오라고 하셨다.
피정을 마치고 3월 3일 입회 날짜를 받아서 집으로 와보니 분위기가 예전과는 달리 온화하고 포근하였으며 어머니를 비롯 모든 형제들의 모습도 바뀌어 있었다. 어머니께서 가만히 귀뜸해 주시기를, 피정 하러 올라간 그 날부터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모두가 긍정적으로 받아들였다고 하시면서 눈시울을 적시셨다. 순간 나도 모르게 눈시울이 뜨거웠고 모든 분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도록 살겠다고 말씀을 드렸다. 모든 준비는 신부님을 비롯한 신자들의 기도와 사랑 안에서 순조로이 되었고, 원장 수사님의 가정 방문도 잘 이루어졌다. 그동안 보이지 않게 기도로 도와주신 몇몇 어른들을 찾아뵙고 인사와 더불어 계속적인 기도를 부탁드렸다.
이튿날 어머니께 작별인사를 올리는데 어머니께서는 계속 눈물을 흘리시며 정말 가는거냐고 말끝을 흘리셨다. 말없이 어머니 곁을 떠나 신부님의 강복을 받는 순간 눈물이 쏟아지기 시작하였다. 기쁨과 슬픔이 뒤범벅이 되어서….
왜 이리도 설레이고 기다려지는지 모르겠습니다. 마치 기름을 준비하고서 신랑을 기다리며 혼인 잔치에 들어갈 슬기로운 다섯 처녀의 마음이랄까요? 아니면 늙은 엘리사벳이 아기를 가지자 즈가리야는 몹시 기뻐하며 장차 태어날 아기가 사내일까? 계집애일까? 그리고 누구를 닮았을까? 하고 설레이는 마음으로 태어날 날만을 기다리는 마음이랄까요? 이는 아마도 "복되어라, 야훼를 경외하며 그의 길을 걷는자."(시편 128, 1)의 대열에 들어섰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제는 너무나 하느님을 사랑하고 사도 성바오로와 창립자와 수도회를 사랑하기에 이 길을 걷고자 하며, 나를 드리고 봉헌하며, 그분을 위해서 죽고자 합니다. 그러나 모든 면에서 너무나 부족하고 미약합니다. 그렇기에 더 더욱 그분만을 신뢰하면서 말씀 안에서, 성사 안에서, 그리고 수도 공동체의 사랑 안에서 "그분께서 주신 은총에 따라서" 끝까지 달려가고자 하는 열성으로 가득차 있을 뿐입니다.
이러한 믿음과 신뢰와 열성으로 "마리아가 예수를 세상에 내어 주었듯이" 내 안에 잉태된 말씀으로 창립자의 유산인 ''''성공의 비결''''을 가지고 목말라하고 배고파하는 이들에게 내어주고 심어주는 사랑의 도구가 되기 위해, 먼저 그리스도의 부드럽고 아름다운 마음을 잉태코자 성신의 은총을 구할 뿐입니다. "그리스도 내 안에 형성될 때까지…."
많은 이들이 "어떻게 당신을 사랑하느냐구요?" 라는 물음에 브라우닝은, "비록 그 빛이 안 보여도 존재의 끝과 영원한 영광에 내 영혼 이를 수 있는 그 도착할 수 있는 곳까지 사랑합니다. 태양 밑에서나 또는 촛불 아래서나 나날의 얇은 경계까지도 사랑합니다. 권리를 주장하듯 자유롭게 당신을 사랑합니다. 옛 슬픔이 쏟았던 정열로써 사랑하고 내 어릴적 믿음으로 사랑합니다. 세상 떠난 성인들과 더불어 사랑하고 잃은 줄만 여겼던 사랑으로써 당신을 사랑합니다. 나의 한평생 숨결과 미소의 눈물로써 당신을 사랑합니다. 주의 부르심 받더라도 죽어서 당신을 사랑합니다."
생명을 주시고 복된 길을 허락하신 주님께 감사 드리며, 미우나 고우나 낳아주시고 길러주신 부모님, 그리고 오늘이 있기까지 기도와 사랑으로써 이끌어주신 수도가족 모든 분과 은인들께 감사를 드립니다.
"복되어라, 그 행실 깨끗하고 야훼의 법을 따라 사는 사람.
복되어라, 맺은 언약 지키고 마음을 쏟아 그를 찾는 사람."(시편 119; 1∼2)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