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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립자 G.알베리오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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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창현 신부 특별기고
기쁨과 희망 24호 2019년 겨울
조국 전 법무부 장관의 임명 및 사퇴와 관련하여 지난 2019년 8월에서 10월까지 온 나라가 정치 사회적으로 몸살을 앓았다. 이 기간 동안 광화문 광장에서는 조국 전 장관의 임명을 반대하고 관련된 검찰 수사를 수용하자는 목소리가 터져 나왔던 반면에, 법원을 중심으로 한 서초동 일대는 임명을 지지하고 더불어 검찰 개혁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광화문 vs. 서초동 광장의 대립은 그 자체로 한국 사회에 깊은 상처를 입혔다. 이 상처의 치유를 위해서는 광장의 대립 과정에서 발생한 다양한 정치 사회적 역동성을 살펴보는 작업이 선행되어야 할 것으로 보인다.
광장의 대립은 일차적으로 진영 간의 대립 양상이었다. 사회적 사안이 정치화되어 진영 간 대립으로 발전한 경우가 이 번이 처음은 아니며, 앞으로도 이러한 대립은 지속 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이번 광화문과 서초동 광장의 대립 국면을 지켜보면서 심각한 우려를 갖게 되었다. 이제는 전혀 다른 양상의 대립이 펼쳐 질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우선 단순히 진보와 보수, 좌파와 우파의 진영 대립으로는 설명 될 수 없는 복잡한 정치적 역학 관계가 광장에 쏟아져 나왔다. 동시에 광장을 중심으로 반대 진영에 대해 서로에게 끊임없이 쏟아낸 혐오의 에너지가 사회 전체를 휘감았다. 하나의 사안에 대해서 정반대의 입장을 가진 사람들이 두 개의 광장을 중심으로 대립하는 국면을 지켜본 우리 사회는 어쩌면 이제는 돌이킬 수 없는 분열의 시대로 이미 건너 간 것은 아닌가라는 의문이 들었다.
이러한 의문에 답하기 위해, 기존의 진영 간 대결의 연장선에서 광화문과 서초동 광장의 대립을 통해 새롭게 드러난 몇 가지 지점을 살펴보고자 한다. 우선 과거에는 하나의 광장을 두고 주도권을 잡으려는 맞불 집회가 진행되었던 반면에, 이번에는 두 개의 광장에서 각자 자기의 목소리를 내는데 집회가 별도로 이루어졌다. 다음으로 지금까지 광장에 나서는 것을 주저하였던 보수 우파 진영의 사람들이 대거 광장에 모습을 드러내었다. 끝으로 조국 장관이 사퇴한 후 조국 전 장관에 대해 비판 했던 내용들, 즉 자녀들이 받았던 특권적 교육 혜택과 자신의 지위를 이용한 부당한 이익 편취에 대한 불평등과 공정의 문제는 개인 차원의 일탈과 위법의 차원에서만 다루어지고 사회적 의제로 발전하지 못하였다.
이에 대한 심층적 이해를 위해, 적극적으로 자신의 의견을 표명하게 되는 원리를 설명한 침묵의 나선 이론을 토대로 광화문 광장으로 사람들이 나올 수밖에 없도록 하는데 영향을 미친 요인들을 살펴보고, 이를 토대로 이 시대에 필요한 목소리가 무엇인지를 고민해 보고자 한다.
우선 침묵의 나선 이론에 따르면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여론을 파악하고자 한다. 이때 자신의 의견이 소수라고 생각 할 때는 고립의 공포로 인해 의견 표명을 주저하는 반면에, 다수라고 생각하면 주저함 없이 의견을 표명하게 된다. 예를 들어, 2016년 광화문 광장에서 진행되었던 박근혜 탄핵 촛불 집회(이하 ‘촛불 집회’) 초기에는 광장에 나와서 직접적으로 탄핵 찬성 의견을 표명하는 사람들은 소수였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촛불 집회 참석자가 늘어나고 탄핵에 찬성하는 사람들이 광장을 가득 메우게 되었다. 이 때부터 탄핵에 찬성하는 사람들은 주저함 없이 집회에 참석하였고, 촛불 집회는 어린아이들 까지도 함께 나와서 즐기는 축제의 장으로 발전하였다.
진보 좌파가 촛불 집회를 통해 두려움 없이 광장에 나서는 체험을 하였던 반면에, 보수 우파는 탄핵 정국에서 소수였으며, 광장에 주저함 없이 나서지 못하였다. 광장에 나선다고 하더라도 그들을 바라보는 시선이 곱지 않았다. 가스통 부대나 태극기 부대라는 표현은 아직도 이들을 부정적으로 지칭하는 고유 명사처럼 사용되고 있다. 비판적인 사고 없이 물리적으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무작정 폭력을 행사하는 사람들로 비춰졌다. 이러한 분위기에서는 탄핵에 반대한다고 하더라도, 자신이 극단적 집회 참가자들과 똑같은 시선을 받게 될 것이라는 점에서 광장으로 나와서는데 주저 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조국 전 장관의 임명을 반대하고 사퇴를 요구하기 위한 보수 우파의 목소리는 집회 시작부터 광화문 광장을 가득 채웠다. 처음에는 광장에 나서는 이들이 소수였다가 다른 사람들이 나서는 것을 보고 숫자가 늘어나는 것이 아니었다. 이를 침묵의 나선 이론의 관점에서 본다면, 촛불 집회 정국에서 진보 좌파 진영이 광화문 광장의 주도권을 갖고 있는 상황에서 보수 우파 진영은 위축 될 수밖에 없었지만, 조국 전 장관과 관련해서는 경우는 진보 좌파 진영이 서초동에서 집회를 가졌기 때문에, 광화문 광장에 나서는 이들은 처음부터 주저 없이 광장으로 나섰다고 볼 수 있다. 또한 촛불 집회 이후로 3년이라는 시간이 지났는데, 그 동안 유튜브를 비롯한 SNS와 미디어 환경의 발전을 통해 보수 우파 진영의 개인들은 자신들이 다수라는 확신을 갖게 된 것으로도 볼 수 있다.
다음으로 침묵의 나선 이론에 따르면, 일반적으로 자신의 의견이 소수라고 인지하지만, 사안이 시급하고 자신이 옳다고 강하게 확신하는 경우는 다수의 의견과는 상관없이 자신의 목소리를 내게 된다. 광화문 광장에 나왔던 이들 중에는 자신의 의견이 다수라고 생각했던 사람들도 있었지만, 조국 전 장관의 임명만은 반드시 막아야 한다고 확신 때문에 광장에 나왔던 이들도 적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이런 측면에서 광화문 광장에 나왔던 이들이 조국 전 장관의 임명을 반대 한 이유는 무엇이며, 그에 대한 강한 확신을 갖게 된 배경에 주목하게 된다.
조국 전 장관 임명 관련 광장 간 대치 국면에서 ‘내로남불’이라는 용어가 특히 유행하였다. 이 말은 ‘내가하면 로멘스이고 남이 하면 불륜이냐’는 말을 줄인 것으로 동일한 사안에 대해 자신에게는 관대하고 남에게는 엄격한 사람들을 비꼬는 말로 사용된다. 이 용어는 국회 청문회를 비롯하여 언론에서도 자연스럽게 사용하는 관용적인 표현으로 자주 등장하였다. 누군가에게 내로남불의 태도를 갖고 있다고 비판하는 것은 그 자체로 이중잣대를 적용하는 비이성적인 태도를 견지하고 있음을 의미하였다. 상대방이 중립성이 결여된 비합리적 주장을 펼치고 있다는 강한 비난을 내포하고 있다.
조국 전 장관의 임명을 반대하는 핵심적인 이유 중에는 바로 이러한 내로남불의 태도가 자주 언급되었다. 실제로 광화문 광장에서 조국 전 장관의 임명 반대의 목소리를 내고 온 지인들에게 조국 전 장관을 반대하는 이유를 직접 물었다. 대부분의 대답은 한결같이 그러한 사람은 장관이 돼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이어서 그렇다면 도대체 그런 사람이 어떤 사람이냐고 물어보면 거의 공통적으로 내로남불의 태도를 지적하였다. 언론 또한 조국 전 장관이 과거에 했던 말들을 복기하여 여전히 내로남불의 태도를 보이고 있다고 비판하였다. 심지어 일부 언론은 조국 전 장관의 내로남불 리스트를 만들어 제공하기도 하였다,
조국 전 장관의 과거 구체적인 비리나 위법 행위가 아니라 내로남불의 태도가 그 자체로 임명 반대에 중요한 근거로 제시되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할 것이다. 이는 사람들이 광장으로 나서는 과정에서 정서적 역동성이 진영 간 대립 구도의 중요한 축이었음을 의미한다. 대표적으로 모멸감은 감정적 폭발을 가져 오는 정서의 역동이다. 모멸감을 한국인의 일상을 지배하는 감정으로 소개하고 있는 김찬호 교수에 따르면, 이러한 모멸감은 쉽게 잊혀 지지 않는 감정의 응어리이며, 상대방에 대한 복수의 형태로 나타나게 된다. 장관 임명 과정에서 드러난 사실들은 조국 전 장관에 대한 실망과 분노를 가져왔다. 그리고 이러한 정서적 반응들은 모멸감으로 이어졌을 수 있다.
평소 조국 전 장관은 사회적 정의와 공정한 경쟁을 강조하였다. 그러한 조국 전 장관의 자녀들이 대학 및 대학원에 입학하는 과정에서 부모의 동료 교수들로부터 도움을 받았다는 사실은 그 자체로 충격이었다. 더불어 조국 전 장관은 자본주의적 폐해를 지적하면서 사모 펀드를 비판하였는데, 실제로 그 가족들이 사모펀드에 거액의 금액을 출자해 왔었다는 사실은 사람들에게 실망감을 안겨 주었다. 이러한 충격과 실망은 조국 전 장관 개인에 대해서 뿐만 아니라, 기득권 세력의 교육 특혜 및 공정성이 사라진 사회에 대한 불만으로 이어졌을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상황에서 이러한 실망, 충격, 불만 등의 부정적 정서가 각성된 상황에서는 아무리 정확한 정보가 제공 된다고 하더라도 부정적인 태도가 유지되거나 오히려 더욱 부정적인 태도가 강화 될 수 있다. 따라서, 조국 전 장관과 그의 가족이 공문서 위조와 지위를 이용한 이익을 편취한 정황이 있다는 검찰의 조사 결과는 실제 위법성 여부와는 상관없이 그 자체로 분노로 이어졌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이렇게 부정적 정서가 강하게 각성된 후에 보여 주었던 조국 전 장관의 태도는 사람들에게 강한 정서적 폭발력을 가진 모멸감으로 이어 졌을 수 있다. 조국 전 장관은 자신과 관련하여 의혹을 제기하는 사람들은 거짓 정보에 현혹되어 있으며, 그러한 의혹들은 자신과 전혀 연관이 없는 일이라고 선을 그었기 때문이다.
구체적으로 모멸감과 관련 된 조국 전 장관의 태도는 이후에도 내로남불이라는 비난과 더불어 언론에서 지속적으로 복기 되었다. 예를 들어 조국 전 장관이 자신을 비판한 서울대생들에 대해서 태극기 부대와 같은 극우 세력이라고 비난하는 글을 자신의 페이스북에 올려서 논란이 된 적이 있다. 이러한 조국 전 장관의 태도는 자신은 남들에게 비판을 할 수 있지만, 자신을 비난하는 의견은 일방적으로 무시하는 내로남불이라는 비판으로 이어졌다. 조국 전 장관은 그 동안 자신이 쓴 책과 언론의 인터뷰 및 SNS를 통해 날선 비판을 쏟아 내 왔기 때문이다. 특히, 자신들이 태극기 부대와 같다는 비난은 모멸감으로 이어졌을 수 있다. 자신들이 전술하였던 것처럼 비판적인 사고 없이 물리적으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무작정 폭력을 행사하는 집단이라는 비난은 수용되기 힘들었을 것이며, 부정적인 정서적 폭발로 이어졌을 것이다.
조국 전 장관의 내로남불의 태도가 촉발한 모멸감의 정서적 폭발력이 광화문 광장을 채웠다면, 서초동 광장에도 거대한 정서적 흐름이 감지되었다. 광화문 광장과는 반대로 서초동 광장에서 조국 전 장관의 임명은 문제가 없다는 입장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검찰이 권력을 사용하여 조국 전 장관을 희생양으로 만들고 이를 통해 현 정권을 견제하려 한다는 이야기가 흘러나왔다. 이는 검찰에 대한 실망으로 이어졌을 수 있다. 진보 좌파 진영에서 여전히 검찰이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고 있다는 사실은 그 자체로 실망에서 분노로 이어졌을 것이다. 더욱이 노무현 대통령을 죽음으로 몰고 갔던 검찰 권력이 이번에는 조국 전 장관의 가족을 대상으로 무리한 수사를 진행하고 있다는 주장이 제기되면서, 이는 단순히 분노의 차원에서 머물 수 없었다. 노무현 대통령 죽음에 대한 정서적 부채감이 이러한 분노를 모멸감으로 이어지도록 했을 수 있다.
광화문과 서초동 광장을 가득 채웠던 정서적 폭발력은 상대 진영에 대한 혐오와 비난으로 쏟아내는 결과를 가져왔다. 특히, 편향된 정보에 기대어 내로남불의 이중잣대를 적용하고 있다는 비난의 목소리가 높았다. 광화문 광장에 모인 사람들이 보기에 서초동 광장에 나온 사람들은 터무니없는 근거를 들어 조국 전 장관의 결격 사유를 무마하려 한다고 보았다. 반대로 서초동 광장에 나온 사람들은 광화문 광장에 모인 사람들이 말도 안 되는 이유로 반대하고 있다고 보았다. 두 광장에 나온 이들은 서로가 상대방이 편향된 시선으로 왜곡된 정보, 즉 루머를 무비판적으로 수용한다는 생각이 깔려 있다.
정보의 왜곡으로 인한 루머는 인간의 역사이래로 언제나 누군가에 의해서 만들어지고 확대 재생산 될 뿐만 아니라, 그 영향력이 극단적인 사회적 대립으로 이어져 왔다. 일반적으로 매일 쏟아져 나오는 정보들이 자신의 기존 태도와 유사하다고 생각하면, 루머인지를 인식할 겨를 없이 선별적으로 정보를 선택 할 뿐만 아니라, 자신과 비슷한 생각을 가진 사람들에게 그 루머를 전파한다. 루머를 전달 받은 사람은 전달자에 대한 신뢰를 바탕으로 루머의 진위를 따지기 보다는 새로운 정보를 통해 자신의 태도를 강화하게 된다. 특히, 정치적 성향이 비슷한 조직 내에서는 다양한 루머들이 공유 되는 과정 자체에서 신뢰가 쌓이고 결국에는 진실인걸로 받아들여진다. 정보의 확산 과정에서 자신이 가진 정보가 루머에서 기인한 것일 수 있다는 이러한 가능성을 배제하는 경우, 자신들은 절대 편향되지 않았으나, 반대 진영에 있는 사람들은 철저히 편향되었다는 확신을 갖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당시 광장의 대결 국면에서 두 진영이 서로 상대방이 편향되어 내로남불하고 있다고 확신 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자신들이 가진 정보가 루머에 기인하지 않았다는 확신이 있었다. 이 과정에서 개인 차원의 미디어 활용 및 분열의 정치가 무책임한 언론과 조응하는 거대한 흐름이 있었다. 유튜브의 시사 분석가들은 자신들이 속한 진영의 논리가 왜 진실에 가까우며, 반대 진영의 논리가 왜 잘못되는가를 자세히 설명해 주었다. 언론은 광장의 분열 상황에서 정확성, 독립성, 불편부당성이라는 저널리즘의 기본 원칙을 충실히 수행하기 위해 사실을 검증하고 공정성을 답보하기 보다는 광장을 지배하는 루머들에 휘둘리거나 진영 논리를 강화하려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정치는 광장의 대립을 조정하기 보다는 분열을 가속화하여 차제에 지지층을 결집하여 정치적 우위를 선점하는 데만 정신이 팔려 있었다.
이 흐름은 개인, 정치, 언론 중에 누가 먼저 시작하였다고 특정하기는 힘들다. 하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이들이 하나의 거대한 순환 구조를 이루고 있으며, 이 구조 속에서 광장의 대립은 극단으로 이어 질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다. 특히 주목해야 할 점은 이러한 흐름 속에서 개인, 정치, 언론은 자신들이 극단으로 치닫고 있다는 것을 스스로 인식하기 힘들 뿐만 아니라, 이를 인정하는 것 자체가 어려운 반면에, 반대편 광장에 모여 있는 이들이 자신들과 얼마나 다른지를 확실히 인식하게 되었다. 또한, 그들이 반대편 광장에 모여서 자신들을 향해 쏟아내는 저주와 혐오의 목소리를 뚜렷하게 들을 수 있었다. 이러한 몰이해와 혐오 에너지에 의해 두 개의 광장을 중심으로 드러난 한국 사회의 진영 간 대립은 앞으로 더욱 공고해 질 것으로 보인다. 어쩌면 한국 사회는 정치와 권력뿐만 아니라, 자신과 다른 생각을 가진 이들과 대화 할 수 있다는 희망마저 포기 한 것일지 모른다. 서로를 바라보는 차가운 시선 속에서 한국 사회는 이미 돌아 올 수 없는, 건너지 말아야하는 강을 건너버린 것은 아닐까?
조국 전 장관의 임명 및 사퇴 정국에서 한국 사회는 극단적인 진영 간 대립의 징후가 나타났다고 볼 수 있다. 진영 간의 극단적 대립과 관련하여 미치코 가타쿠니가 그녀의 저서 <진실 따위는 중요하지 않다>에서 진단한 미국 사회의 모습을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 그녀에 따르면 현재 미국 사회는 가짜 뉴스가 넘쳐나고 있다. SNS를 비롯한 다양한 매체들은 가짜 뉴스를 토대로 경멸, 욕설, 모욕, 극단적이고 불합리한 논리들을 끝없이 전파하고 있다. 그 첨단에는 미국 대통령 트럼프가 있다는 점에서 그녀는 개탄을 금치 못한다. 트럼프 대통령은 상대방의 이야기는 무조건 가짜뉴스로 치부해 버린다. 대화가 되지 않는다. 진실이라는 것이 더 이상 중요하지 않는 시대가 된다. 상대방이 하는 이야기는 그냥 가짜로 자신들을 속이는 것이 되어 버린다. 무슨 이야기를 해도 가짜로 속이는 걸로 밖에 안 보인다. 이중잣대 내로남불, 그냥 저들은 우리를 속이려 거짓말을 하는 사람으로만 보이게 된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자연스럽게 시민들은 권력과 정치에 대한 냉소주의와 체념에 빠지게 된다.
두 개의 광장을 가득 채웠던 부정적 정서의 역동은 상대 진영에 대해 어떠한 기대도 할 수 없다는 인상을 주었을 수 있다. 미국 사회에 만연한 냉소주의와 체념이 한국 사회에서는 상대 진영에 대한 대화 가능성 포기로 나타날 수 있다. 얼마 전 문재인 대통령의 어머니가 부산의 한 병원에서 돌아 가셨다. 돌아가신 그 순간에까지 아무도 대통령의 어머니께서 일반 병동 6인실 침대에 누워계셨을 것이라고 생각조차 하지 못하였다. 문재인 대통령이 일체 공식적인 조문을 받지 않고 조용하고 엄숙한 분위기에서 장례 미사를 통해 어머니를 떠나보냈다. 이러한 문재인 대통령에 대해 일부 유튜버들은 자신들이 보기에는 합리적 의심이라며, 문재인 대통령의 어머니가 친어머니가 아니기 때문에 부산에 모셨고, 공식적인 조문을 받지 않았다는 영상을 올렸다. 처음에는 무작정 화가 났다. 하지만 조금 지나자 정말 그렇게 생각하는 것일까? 정말 스스로 합리적인 의심이라고 생각하는 것일까? 도대체 어떻게 무슨 말을 해야 하지? 아니 대화를 시작을 할 수 나 있는 것일까? 등의 질문들이 안에서 쏟아져 나왔다. 그렇다면 서로를 향한 혐오의 에너지가 한국 사회에서 거대한 흐름이 되어 버린 시점에서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아니면 할 수 있는 것이 있기는 한 것인가라는 의문이 든다.
정치적 문제에서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무력감을 느끼는 이들을 위해 <비통한 자들을 위한 정치학>을 쓴 파커 J. 파머는 현대 민주주의의 위기와 그로 인해 상처 받은 이들을 위해서는 상처 받은 이들이 자신들의 마음을 다스릴 수 있도록 도움을 주어야 한다고 역설한다. 마음 살핌의 중요성과 관련하여 한국 사회는 부정적 정서의 역동성이 어떻게 광장을 분열 시키고, 혐오의 에너지를 생산 할 수 있는지 목격하였다. 파커가 이야기하는 상처 받은 이들의 마음 살핌이 제대로 되지 않았을 때, 얼마나 큰 파괴력이 쏟아져 나오는지를 목격한 것이다. 따라서, 한국 사회는 파커가 제시하는 섬세한 마음 살핌의 작업이 필요한 시점으로 보인다. 이와 관련하여 파커는 우선적으로 정치, 언론, 교육, 종교, 사회 각 영역에서 입체적인 노력이 필요하다고 한다.
이러한 마음 살핌과 관련하여 종교의 측면에서 본다면, 프란치스코 교황은 <복음의 기쁨> 98-101 항에서 싸움과 폭력으로 찢겨진 세상에서 과거의 갈등과 해묵은 분열은 필연적으로 반복 될 수밖에 없다고 지적한다. 또한 분열로 상처 받은 이들을 용서와 화해로 이끄는 것은 매우 어려운 작업이라고 언급한다:
"그들은 우리가 그들의 고통을 무시하거나 그들의 기억과 이상을 포기하라고 요구하는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와 관련하여 그리스도교인은 악을 뛰어 넘어 선을 행하는 태도(로마 12.21)를 포기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한다.
조국 장관이 사퇴한 후 조국 전 장관에 대해 비판 했던 내용들, 즉 자녀들이 받았던 특권적 교육 혜택과 자신의 지위를 이용한 부당한 이익 편취에 대한 불평등과 공정의 문제에 대해서, 두 개의 광장이 조국 전 장관의 개인 차원의 일탈과 위법의 차원에서만 대립하고 있다. 이러한 내용들이 광장이 국면이 끝난 이후 사회적 의제에서 사라졌다는 것에 대해 젊은 세대는 강한 배신감을 느끼고 있다. 젊은 세대는 불평등과 공정성의 문제가 사회적 의제로 발전되어 사회가 함께 고민하고 자신들의 어려움을 해결하기 위해 머리를 맡데 주길 기대 했을 것이다. 젊은 세대의 이러한 실망은 다음번에는 두 개의 광장이 아니라 세 번째 광장으로 나타날 수 있을 것이다. 파커가 언급한 마음 살핌과 프란치스코 교황이 강조한 선의 행함을 우리 사회가 전면적으로 받아들이기에는 낯선 개념일 수 있다. 그에 비해, 젊은 세대에 대한 공감은 지금이라도 시작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시작을 통해 우리는 아직도 희망 할 수 있을 것이다.
▲ 특별 기고, 특별 좌담 한창현 신부 성바오로수도회
출처 〈기쁨과 희망〉 24호
성바오로수도회 한창현 신부도 자리를 함께 하였습니다.
아래 링크를 통해 특별좌담을 보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