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오로인은 성바오로의 표양대로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살아갑니다.
(창립자 G.알베리오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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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인수 신부
〈기쁨과 희망〉 26호 2020년 가을
날씨가 추워지자 나무들이 잎을 다 떨구었습니다. 마당가의 은행나무도 단풍나무도 앙상해졌습니다. 잎들이 다 떨어지고 나니 나무의 본 모습이 고스란히 보입니다. 서울의 외곽이었던 미아리에 수도회가 자리 잡은 지 오십 년이 훌쩍 넘은 지금, 우리 공동체에 뿌리 내리고 사는 여러 형제들 수만큼이나 많은 나무들이 수도원 여기저기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소나무, 잣나무, 목련, 벚나무, 느티나무, 고욤나무, 대나무... 그중에서도 수도원 마당가에 있는 은행나무는 형제들이 마당을 돌며 로사리오를 할 때 쳐다보곤 하는 나무입니다. 신기하게도 나무의 맨 끝 가지가 십자가 모양으로 되어 있거든요. 이 은행나무를 바라볼 때면 ‘이 나무는 제가 수도원에 있다는 걸 아나보다.’ 생각하게 되지요. 은행나무 꼭대기의 십자가를 바라보며 중얼중얼 마당을 돌다보면, 언제나 푸릇한 향나무들의 대열 끝에 서있는 단풍나무를 만납니다. 이 나무는 가지를 낮게 드리우고 있어서 그 밑을 지나면 나뭇가지가 머리에 닿습니다. 마치 머리를 어루만져 주는 것 같지요. 은행나무가 철따라 보여주는 아름다운 십자가, 봄이면 연록빛 고운 새잎으로, 여름이면 성성한 푸른 잎으로, 가을에는 황금빛 잎으로 치장하는 십자가는 이제 앙상한 가지로 내 앞에 서있습니다. 은행나무 십자가와 머리를 쓰다듬는 단풍나무의 가지가 어떨 때는 마치 주님의 얼굴 같기도 하고 주님의 손길 같기도 합니다.
“수사님, 주일에 성당 가서 미사 드린 지가 오래되었습니다. TV로 미사를 보는 것에 익숙해졌어요. 코로나 지나고 나면 어떻게 할지 걱정이 됩니다. 요즘 대면 미사, 비대면 미사, 이런 말을 자주 듣게 되는데 대면과 비대면 할 때 그 면(面), 그 얼굴은 누구의 얼굴입니까?”
확진자 수가 한참 늘어나 전국적으로 미사가 없을 때 친한 형님이 찾아와 던진 질문입니다. 그때에도 뭐라 답할 말을 찾지 못해 얼버무렸는데 지금도 답하기 어려운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그 물음 속에 담긴 뜻을 짐작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신학교 다닐 때 제일 어려웠던 과목은 삼위일체론과 그리스도론이었습니다. 본체라든가 위격이라든가 하는 이해하기 어려운 말들을 외우고 시험을 치르고 했지만 실은 아직도 어디 가서 이런 질문을 받게 되거나 하면 진땀이 납니다. 그 시절 “괜한 말을 덧붙이다가는 이단 되기 십상이다”, 이런 말을 하며 웃기도 했지요. 성부와 성자, 성령이 구별되면서도 한 분 하느님이시라는 것, 예수 그리스도는 하느님이시면서 사람이시라는 것, 이것을 설명하는 신학의 언어는 ‘속성의 교환’(comunicatio idiomatum)이라든가 ‘놀라운 교환’(admirabile commercium) 같은 말들이었습니다. 이제 와 돌아보니 그것은 이해하기 어려운 하느님의 언어이지만 동시에 우리 삶 안에 이미 들어와 있는 신비이기도 한 것 같습니다. 세 위격이시면서도 한 분이신 삼위일체, 신성과 인성을 가지고 계시는 예수 그리스도, 이를 신비라고 부른다면 우리도 매일의 삶에서 그 이해하기 어려운 신비를 살려고 애쓰는 사람들이니까요. 나는 나이고 너는 너인데 우리는 공동체(共同體), 한몸을 이루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신비는 그대로 우리 공동체, 교회의 신비가 됩니다. 이것은 제가 공동체에서 살면서 매일 곱씹는 묵상 거리이기도 합니다. 너는 너고 나는 나다. 이것은 실제다. 그러나 일상에서 나를 불편하게 하고 어려움을 주는 너와 어떻게 함께 살아야 하는가, 하는 질문입니다. 이는 비단 저만의 문제가 아니겠지요. “그 얼굴은 누구의 얼굴입니까?” 이 질문은 교회 공동체의 구성원이면 늘 품고 있는 질문일 것입니다. 사실은 우리 공동체, 교회 안에서 그 얼굴, 하느님의 얼굴을 보고 싶다는 열망이 우리 안에 있다는 말입니다.
“수도원 건물이 아니라 수도회 회원들이 수도회다.”
수도회에 들어온 지 얼마 안 되었을 무렵 들은 이야기입니다. 건물이 아니라 믿는 사람들이 교회다, 이렇게 바꾸어 말할 수도 있겠지요. 복음서에는 가난한 과부의 헌금 이야기가 나옵니다. 우리는 이 구절에서 자기의 모든 것을 바치는 과부의 갸륵한 믿음을 읽어내는 데 익숙하지만 어떤 이들은 그것이 당대 종교의 모습을 담고 있다고 말합니다. 성전을 중심으로 돌아가던 당시 유다교의 상황이 거기에 투영되어 있다는 거지요. 유다인들은 성전에 들어가기 위해서 온갖 명목의 돈을 바쳐야 했고 그래서 가난한 과부는 몇 푼 되지도 않는 자기 생활비 전부를 헌금함에 넣어야 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것을 지켜보던 예수님은 “얼마나 굉장한 성전입니까!” 하고 성전의 규모와 아름다움을 찬탄하는 제자들 앞에서 말씀하십니다. “저것을 바라보고들 있지만 돌 위에 돌 하나 남지 않고 허물어질 날이 올 것입니다.”(루카 21,6) 복음서에서 이야기하는 예수님의 삶은 어쩌면 크고 화려한 외적인 하느님의 집이 아니라 아주 다른 종류의 집을 짓기 위해 애쓰신 여정이 아닐까 싶습니다. “이 성전을 허무시오. 내가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소.”(요한 2,19) 예수님은 성전을 정화하시면서 이렇게 외친 적이 있거니와, 당신 뒤를 따르겠다는 사람에게 “여우도 굴이 있고 하늘의 새도 보금자리가 있지만 사람의 아들은 머리 둘 곳조차 없다”(마태 8,20)라고 하셨던 것은 당신의 삶이 어떤 것인지를 말씀하신 내용이었던 겁니다. 이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진리를 찾는 이들의 삶에 공통되는 요소인지도 모릅니다. 사마천은 공자가 당대에 ‘상가지구’(喪家之狗)라는 평을 받았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상갓집 개’, 보잘것없는 비루한 존재라는 뜻이겠지요. 그런 의미라면 ‘집 잃은 개’라고 풀어도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집이 없으니 주인도 없고 떠돌아다니며 사는 존재입니다. ‘머리 둘 곳조차 없는 사람의 아들’의 처지와 다를 바가 없는 모습이지요. 이를테면 예수님은 보이는 집에 의지하여 살기보다는 보이지 않는 집, 당신 스스로가 하느님께서 머무시는 집이 되고자 하셨던 것입니다.
“교회가 왠지 하느님에게서 멀어진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 건 무엇 때문일까요?”
일전에 존경하는 분을 찾아뵙고 이야기하던 중에 드린 질문이었어요. 그분의 답은 “건물이 너무 커져서 그런 게 아닐까?”였습니다. 건물을 세우고 제도를 만드느라 우리가 정작 그 건물에 사시는 분, 그 건물에 모여오는 분들을 소홀히 하고 있는 것이라는 말씀으로 들렸습니다. 코로나 19로 인해서 교회의 삶도 변화하고 있고 이 감염병이 지나간 뒤에 신앙인들의 삶도 이전과는 크게 다를 것이라고 걱정하는 목소리가 높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많은 것이 변하더라도 그분의 얼굴을 찾는 사람들의 마음은 변함이 없지 않을까, 그렇다면 우리가 내놓을 대답도 어쩌면 그 얼굴을 찾는 데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옛 집이 무너진 자리에 새로운 집을 지을 기회가 아닌가 하는 생각도 해봅니다.
잎을 다 떨군 은행나무 아래서, 새봄이 오면 연록빛 새잎으로 갈아입을 나무를 그려봅니다. 그때는 제 속의 하느님, 우리 교회 안의 하느님도 한 뼘쯤 더 자라서 우리가 조금은 더 그분 닮은 모습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미사를 ‘보기’ 위해(서양 언어에서는 미사를 말한다, 읊는다 say mass, 라고 하지만 우리는 ‘미사를 본다’라고 합니다) 모인 사람들이 서로에게서 그분의 얼굴을 더 잘 볼 수 있게 되기를 소망합니다.
▲ 황인수 신부 성바오로수도회 성바오로출판사 편집장
출처 〈기쁨과 희망〉 26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