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후에 발 가는 대로 멀리멀리 걸어갔었다.
마음을 스쳐 가는 생각의 끄트머리를 잡고 거기 젖어들어
멀리 시간이 허락하는 대로 가보리라 하였다.
좁은 도로를 따라 굽잇길을 돌고
사람이 지나가지 않은 길을 지나 어린 형제가 장난을 치는 먼 마을까지,
멋있는 소나무 네 그루가 선 논가를 거쳐
커다란 고목이 있는 마을에 가서 늙은 나무의 껍질을 만져보고 돌아왔다.
길을 걸으며 프로스트를 생각하고 그의 '가지 않은 길'과
'잠들기 전에 가야 할 먼 길'을 생각하였다.
내가 걸어가는 길과 이 길의 끝에 있는 것들을 ....
먼데 있는 불빛은 사람을 쉬게 하는 것이 아니라
더 걷게 하는 것임을... 생각하였다.
어떤 시인의 이 싯귀는 정말 깊은 의미를 담고 있다.
거기에는 깊은 탄식과 엄한 자기 단속의 정신이 스며 있다.
산 속으로 난 길을 따라 올라갔다가 어느 남매가
마흔 여섯에 돌아가신 자기 어머니를 기려 쓴 아름다운 묘비명을 보았다.
그 묘비에는 그들의 어머니인 듯
학사모를 쓴 단아한 중년여인의 사진이 붙어 있었다.
절실한 사랑과 그리움이 새겨진 길지 않은 묘비명.
그 묘비명을 보고 나도 내 생을 마쳤을 때
사람들에게 그런 사랑의 사람으로 남게 되기를 소망하였다.
사람들이 사랑의 사람으로 기억하며
그리워하는 사람이 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리라.
그 묘비 옆에는 작은 꽃병이 있고
연보랏빛 조화가 꽂혀 있었다.
푸릇푸릇 잔디싹이 나기 시작하는 묘와
연보랏빛 꽃잎, 이름 모를 새의 깃털들.
소나무가 자란 호젓한 산 속에 누워
그는 놀러오는 새들과 보라색 꽃잎과 함께 외롭지 않다.
그는 살고 사랑하며 길을 걸었으므로.
그 '잠들기 전에 가야 할 먼 길'과
'가지 않은 길'과 세상의 모든 길을 지나
이윽고 사랑하는 사람들과 다시 만날 것이므로.
그리고 다시는 헤어지지 않을 것이므로.
"맑고 밝고 옳고 바르게 사시며
저희에게 희생과 책임감을 보여 가르치셨고
무거운 십자가를 지고 사신 사십 육 년.
참사랑 주신 우리 어머니,
사랑해요."
<왕림 산길에서 만난 어느 분의 묘비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