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뭐든지 잘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하늘을 향한 노래 1
하늘을 향한 노래
- 박근일 아나니야 수사-
1. 하느님을 만나기까지…
(∼70년대)
긴 시간의 터널을 지나
지금의 자리에 있는 나는
오늘,
지나온 시간들을 돌아보며,
나를 사랑하시고
아껴주시는 분에게
감사의 노래를 부릅니다.
보이지는 않지만
함께하시는 숨결을
느끼게 해주시는 분,
사랑을 알게 해주신 분.
그분의 사랑은
내가 세상에 태어나기도 전부터 나를 사랑하셨답니다.
내 기억으로는 우리 집이 그리 넉넉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할아버지께서는 물려받은 유산으로 새우잡이를 하다 돌아가셨고, 아버지께서는 월남전 참전 후 야산을 과수원으로 일구어 열심히 살려고 하셨는데 70년대 산업화의 물결에 따라 우리 집도 고향을 떠나 울산으로 내려오게 되었다는 기억이 있다.
고향은 경기도 수원시 화성군 서신면 쇠경주(지금 경기도 화성시)라는 곳인데, 경기도에서 저녁놀이 아름답기로 유명한 제부도와는 그리 멀지 않은 곳이다. 지금도 고향 생각을 하면 평화로운 풍경이 그려지는데 아마 나의 마음속 깊은 심성에 자연을 간직하게 한 향기가 되었던 것 같다.
바다에서 불어오는 미풍, 해당화, 망둥어, 염전, 나무망치로 상수리나무를 두드려 도토리를 줍던 일, 손을 파랗게 물들이며 호두를 따먹던 일, 햇볕이 드는 마당에 옹기종기 모여 아이들과 놀던 일 등, 많은 풍경의 기억들이 아직도 남아 내 마음을 추억으로 적셔주곤 한다.
그 어린시절에 잊을 수 없었던 기억 한 가지가 있다면 죽음을 체험한 일이었다.
어느 여름날, 동네 아이들이 조그만 웅덩이에 모여 수영을 하고 있었다. 빨래터이기도 했던 웅덩이는 아이들이 놀기에는 그만이었고, 나는 동네 형들이 타고 노는 자동차 튜브를 타고 싶어했던 모양이다. 아무 생각 없이 아니, 튜브만을 생각하고 뛰어든 것이 그만 웅덩이 속으로 빠지게 되었다(그 후 두 번 더 물에 빠져 죽을 뻔한 일이 있은 후 수영을 싫어하게 됨). 그때는 너무 어려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없었기에 물 속으로 빠져들며 받은 느낌은 환상적이었던 것 같다. 내 얼굴 위로 올라가는 물방울들이 너무나 신기하고 아름다워 죽는다는 생각을 할 겨를도 없었다. 그때 수영을 잘하는 형이 나를 건져주었고, 비로소 죽을 뻔했다는 사실을 약간 이해할 수 있었던 것 같다.
이런 유년시절의 추억은 울산으로 이사하면서 그리움으로 나에게 다가왔고 너무 갑작스런 변화에 나는 그만 내성적인 성향의 사람이 되어버렸다. 그리고 힘겨움은 더해만 갔는데, 공부라는 것과 경쟁이라는 것, 사회가 어떤 것이라는 걸 일찍부터 배워야 했다.
울산에는 친척들이 있었고, 우리는 친척(이모)의 집에서 더부살이를 시작하였다. 방이 두 칸인 작은 아파트에서 두 집 식구들이 바글바글 모여 산 것이다. 지금 그렇게 살라고 한다면 살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들기도 한다.
지난 세월 모르고 지내왔지만 그때가 어머니와 아버지에겐 제일 힘겨웠던 시절이었고, 청춘을 다 받친 나날이었다는 걸 알았다. 그렇게 고생하면서도 어머니와 아버지는 공부만이 나중 인생을 성공할 수 있다는 말을 귀에 못이 박히도록 말씀하셨는데, 그 시절의 여느 부모님들의 소망과 꿈들이 한결같았다는 생각을 해본다. 이렇게 사춘기 전까지는 지,덕,체,예,미 등 학교 이름표 위에 붙이는 훈장(상장을 상징하는 것) 같은 것을 다 달고 다닐 정도로 모범생이었다.
사춘기를 접하며 "착하다." "순하다." "공부 잘한다."라는 말들이 왠지 듣기 싫었다. 그냥 고향 산천에서 뛰어놀던 것처럼 자유롭고만 싶었다. 그 시기에 신앙을 접하게 되었는데, 막연히 어떤 예감 같은 느낌, 천주교가 나에게 삶의 영향을 줄 것 같은 느낌으로 마냥 좋아 보였다. 그때 '현대중학교'를 다녔는데 그곳은 샬트르 성바오로 수녀회 대구관구 수녀님들이 직접 가르치셨고 종교반도 운영하셨다.
늘 나의 마음 한구석엔 종교반에 가고픈 갈망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때 종교반에는 외사촌 누나 '세실리아'(같은 학년)가 있었는데―언제 세례를 받았는지 모르겠지만―그 시절 우리가족 중에서 신앙을 가진 첫 번째 인물인 것 같다. 사돈 할머니(세실리아의 친할머니)와 함께 성당에 다니는 유일한 사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