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뭐든지 잘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하늘을 향한 노래 2
2. 방황
"아픈 만큼 성숙해진다고 했던가!"
사춘기를 보내며 맞은 격동기의 내적 갈등과 사회 현실에 대한 부정(모순에 대한 생각)은 나를 더욱 견고하게 막고 나 외의 모든 것을 부정하는 울타리를 치게 하였다. 심지어 부모님의 마음까지도 편협된 생각으로 바라보며 반항하게 되었고, 무엇인가 채워지지 않는 목마름에 헤매는 학창시절이 계속 이어졌다. 이미 공부에 대한 흥미는 사라져버렸다.
공부가 삶의 성공을 좌우한다고 강조하시던 부모님의 말씀이 싫었고 나만의 자유를 찾기 위해 글을 쓰고, 소설책 등으로 대리 만족을 느끼며 하루하루를 보내던 시절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짝사랑의 쓴잔도 마셨고 현실의 요구에 더욱 저항하며 침묵하는 벙어리가 되다시피 하는 생활로 일관하였다. 이런 생활의 연속에서도 하느님은 늘 나와 함께해 주셨다. 사돈 할머니의 죽음을 통하여 울산의 가족들이 차례로 세례를 받게 되었고 멀리서만 바라보며 목말라하던 나도 세례를 받게 되었다. 이때의 기쁨은 어떤 해방감 같았지만 그 시간은 그리 오래 가지 못했다. 삶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기에….
나에게도 직면하여 다가오는 입시라는 큰 사건은 그 해방감을 사라지게 했다.
고등학교는 '현대 고등학교' 1회 졸업생이라는 명함을 하나 만들어 주었다. '대학'이라는 것에 부모님과 신경전을 많이 하여 이미 기운은 쇠진해 있었고 그럴수록 더욱 내게 다가오는 목소리는 나를 혼란과 혼돈에 빠지게 하였다. 함께 어울리던 친구들이 거의 전교 30등 안에 드는 아이들이었기에 부모님의 비교공식은 나를 더욱 무너지게 했다. 물론 지금은 그 말씀의 진위를 사랑으로 받아들이며 죄송한 마음을 갖지만, 그때는 너무나도 무거운 십자가였고 자유롭고 싶다는 그 어떤 의무감에 몸부림치고 있었던 같다. 그래서 학교를 반항적으로 포기하고 '현대 중공업'의 하청업체에 현장체험 겸, 돈이 어떤 것인가? 사회가 어떤 것인가?를 알기 위해 배우기 위해 취직했다. 그 시기는 우리나라에서 노동운동이 시작되던 시기이기도 했다. (87년)
그때 세경이라는 친구와 함께 일을 하러 다녔는데 세경이는 성당에서 CELL 회장을 맡고 있으며 내 사촌 세실리아를 짝사랑하던 친구였다. 그 친구의 본명은 마르티노였는데 마르티노와 그 시절에 나눈 이야기들은 내 삶의 큰 믿음의 뿌리를 내리게 한 것 같다.
사랑(이성)에 관한 이야기부터 세상사와 어줍잖은 철학 등등 서로에게 잡다한 것까지 나누는 그런 관계가 되었다. 아마 그 시절부터 삶의 혼돈이 또 다른 국면을 맞은 것 같다. 방학 때면 친구들과 함께 일을 했는데 사회정의에 관한 쟁점들을 이야기하고 나누며 친구들의 학교생활, 데모 이야기 등으로 저녁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그러면서 나는 레지오, 주일학교, 청년회 활동을 하면서 좀더 보편적인 사랑의 꿈을 피우기 시작했다. (88년)
마르티노가 학교 입학을 하고 난 계속 현장에 남아 땀을 흘리며 있었지만 또 다른 부름을 받고 있었다. 현장생활은 나에게 다른 진리의 실천을 하라고 하였고 수도회라는 문을 두드리게 되었다. 본당 선배가 예수회에 입회하던 날, 그 버스를 얻어 타고 수원까지 와서 다시 서울로 성소자 모임을 다니면서까지 나는 새로운 모습을 꿈꾸고 있었다.
"그래, 인생에서 공부가 다는 아니야. 사람으로 태어나 정말 값진 삶을 살아보는 거야."라며 조금씩 조금씩 정리하고 있을 무렵 또다시 꺾이는 절망을 맛보게 되는데 나를 지도하고 이끌어 주시던 신부님께서 울산에 오셔서 아버지와 면담을 하시고 아버지의 불허로 입회가 좌절되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던 것이다. 그 당시 나는 모든 희망을 그곳에 두고 있었던 터라 다시 한 번 낭떠러지에 떨어지는 비참함을 맛보았다.
이제 친구들이 하나 둘씩 군대 가고, 나도 단기사병(방위)으로 군대라는 곳을 갔다. 자포자기의 심정이었으므로 이러면 이러는 대로 저러면 저러는 대로 살면서 교회와도 멀어지게 되었고 술로 나날의 즐거움을 찾았다. 단기사병이라는게 동네 선후배들로 구성된 부대이기에 퇴근 시간이면 어디어디에 모여 술을 마셨다. 더 이상 추락할 곳이 없는 이의 최후의 발악이라면 이때의 모습이었을 것이다. (89년)
단기사병 제대를 하면서 부대에 함께 있던 선배들과 팀을 만들어 일을 시작선배들은 공고를 나와 웬만큼 기술이 있었고 나는 그들의 뒷바라지를 하며 돈맛을 알아가고 있었다. (93년) 주머니에 돈이 생기니 조금은 자신감이 살아났는지 또 다시 내 모습에 대한 생각이 고개를 들어 다시 발걸음은 내가 외면한 아버지와 교회로 돌아왔다.
성당은 많이 변해 있었다. 함께 하던 자매들은 수녀원에 몇 명이 들어가 있었고, 8년 전 내게 배우던 아이들은 처녀티를 내며, 또는 다 큰 총각이 되어 주일학교며 청년회의 새내기들이 되어 있었다. 이것이 1995년의 일이다.
돌아온 탕아는 자존심을 회복하려고 열심히 뛰었다. 레지오 활동도 다시 시작하고 본당 청년회 활동을 재개하면서 소공동체 운동을 위한 노력으로 떨어져 가는 청년의 위상을 교회 안에서 세우고자 노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