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4주일-사회 복지 주일-복음(루가 4,21-30)
루가 복음사가는 참 이상한 분이시다.
자신의 복음서에서, 예수님의 공적 활동을 시작하는 첫 마당에다 예수님의 실
패담을 먼저 소개하고 있으니 말이다.
오늘 복음은 나자렛에서의 첫 설교가 대 실패로 돌아갔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 성서의 말씀이 오늘 너희가 들은 이 자리에서 이루어졌다."
이처럼 짧고 명확한 설교가 어디 있을까?
예수께서 읽은 성서는 이사야 예언서 61,1-4로써 하느님의 백성을 새롭게 구
원해줄 위대한 종에 관한 말씀으로, 그 말씀이 설교를 듣는 <오늘 이 자리>
에서 이루어졌다고 하심은 그 위대한 종이 당신이라는 말씀 아닌가.
이 말씀은 또한 앞으로 당신이 하실 일을 가르쳐 주시는 설교이다.
그것은 다름아닌 "묶인 사람들을 해방시키고, 눈먼 사람들을 보게 하고, 억눌
린 사람들을 자유롭게 해주며, 주님의 은총의 해-禧年-를 선포하는 기쁜 소식
을 전하는" 일이라는 말씀이시다.
회당의 사람들은 이 말씀을 듣고 탄복하였다고 전하고 있다.
그런데 갑자기 분위기가 반전되고 있다.
사람들은 "저 사람은 요셉의 아들이 아닌가?"하고 수근거렸고, 끝에 가서는
화가 잔뜩 나서 예수를 끌어내어 죽이려고 하는 것이 아닌가.
학자들은 이 대목에는 두 개의 전승이 합쳐져 있다고 이야기한다.
하나의 전승은 첫 번째 회당에서 설교하시고 마을 사람들의 열렬한 환영을 받
았을 때의 일이고(16-22a)
또 하나의 전승은(22 b-30) 후일 다시 나자렛에 들렀을 때의 일이었다고 추정
하고 있다.
그럼 왜 루가 복음사가는 하필 나중에 있던 좋지 않은 이야기를 굳이 맨 처음
에 배치하면서까지 두 전승을 합쳐놓고 있느냐는 것이다.
복음서마다 맨 처음 배치하는 예수님의 활동은 그 분의 전 생애를 요약하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따라서 복음사가는 예수께서 처음에는 모든 사람들의 열렬한 지지와 환영을
받으셨으나 나중에는 배척을 받고 수난을 당하신 분이시라는 것을 이 대목 하
나에서 벌써 설명하고 있는 중이다.
배척한 사람들은 고향 사람들, 크게 보아서 유다인들이었다는 사실도 이야기
하고 있다.
그렇다면 그들이 등을 돌리게 된 원인은 무엇이었을까?
그분의 출신이 문제가 되었다.
예루살렘 성전 뜰에서 가르치는 예수께 당대의 지도자들이 차례로 와서 묻던
말.
"당신이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합니까?"
사제 가문 출신도 아니고 합법적인 율법 교육을 받은 학자도 아니고 도대체
당신이 무엇이길래 하느님에 대해 아는 척하느냐는 질문이다.
기껏해야 목수 요셉의 아들, 변변찮은 나자렛 시골 출신이 아니던가.
그렇다면 루가 복음사가는 예수를 어떤 분으로 보았는가도 이 대목에 나타나
있다.
"어떤 예언자도 자기 고향에서는 환영 받지 못한다." 고 하시면서 예언자 엘
리야와 엘리사의 에피소드를 전해주고 있는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 복음사가
는 예수를 <예언자>로서 소개하는 것이다.
예언자란 하느님의 뜻을 알려주는 사람이다.
예수는 하느님의 뜻을 가장 완벽하게 알려주신 예언자 중의 예언자이신 것이
다.
고향 사람들이-유다인- 예수를 배척하게 된 또 다른 이유도 이 대목에 들어있
다.
"가파르나움에서 했다는 일을 네 고장인 여기에서도 해 보라"는 고향 사람들
의 속내가 그것이다.
복음사가는 아직 예수께서 행하지도 않은 사건들을 지적하고 있는 바로 이 구
절 때문에 4,14-15의 갈릴래아 활동의 집약문을 슬쩍 먼저 배열하는 치밀함
도 보이고 있다.
그런데 그 집약문은 또 하나의 역할 즉 위에서 이야기한, 처음 군중들로부터
열렬한 지지를 받으셨다는 증거로써도 완벽한 역할을 맡고 있다.
복음사가의 구성의 치밀함에 경탄을 하느라고 약간 이야기가 샜지만,
고향 사람들은 예수를 자기네들이 마음먹은 대로 움직여 주도록 요구했다는
것이다.
자신들의 편협한 하느님觀에 맞추어 주기를 원했다는 이야기이다.
치유이적이나 다른 기적들로 자신들의 고통을 즉각 즉각 해결해 주시는 하느
님.
자신들의 메시아觀에 따라 이방 민족들에게서 정치적으로 군사적으로 해방시
켜주는 하느님.
이방인이 아닌 유다인만을 위한 하느님을 원했던 것이다.
예수께서는 엘리야와 엘리사의 일화를 예로 들으시며 그들의 옹졸한 마음을
꾸짖으신다.
예수께서 하필 이방 여자들에게 기적을 베푸시는 일화를 꺼내시는 것은 그들
을 일부러 열 받게 하시려는 의도가 아니었다.
(복음의 기록은 약간 그렇게 표현되어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시돈 지방 사렙다 마을의 과부는 실상 온 나라에 기근이 너무 심해 먹을 것
이 하루치 밖에 남지 않았는데도 하느님의 사람 엘리야가 먹을 것을 청했을
때 그것을 선뜻 내어주는 여인이었던 것이다.
하느님께 자신을 의탁하는 마음이 없고서는 행할 수 없는 믿음의 행위였다.
또한 시리아 사람 나아만 장군도 자기 나라의 유명한 의사들을 모두 제쳐두
고 하찮은 종의 말을 듣고 멀리 이스라엘까지 하느님의 사람 엘리사를 찾아
온 믿음의 사람이다.
문둥병이라는 위중한 병을 치유할 방도가 겨우 볼품없는 요르단 강물에 목욕
하면 된다는 엘리사의 믿기지 않는 말을 듣고도 그대로 따랐던 순종의 사람이
었다.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의도는 지역이나 민족이 문제가 아니라 하느님의 종의
말씀을 믿고 따르느냐가 문제라는 말씀이셨다.
그러나 고향 사람들은 모두 화가 나서 예수를 동네 밖으로 끌어냈다.
산 벼랑까지 끌고 가서 밀어뜨리려 하였으나
예수께서는 그들의 <한가운데를 지나서> 자기의 갈 길을 가셨다.
하느님이 원하시지 않으면 아무도 그분을 방해할 수 없다.
주님은 인간의 손에 의해서 조종되는 분이 아니시다.
만일 자신에게 유리하게 주님을 이용하려는 사람이 있다면 주님은 등을 돌려
당신의 갈 길을 가실 것이다.
성서의 말씀을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을 종
종 본다.
모두 자신에게 유리하게 해석하기 때문에 그런 말이 나왔으리라.
"예언자는 자기 고향에서는 환영받지 못한다"는 말씀을 자신의 표어처럼 써먹
는 사람을 보았다.
가는데 마다 입으로 평지풍파를 일으키는 사람이 오히려 다른 사람들을 예언
자를 몰라보는 인간들로 치부해버리는 것을 보고 실소(失笑)를 금할 수 없었
다.
가정은 엉망으로 해 놓고 다니면서 식구들을 신앙의 박해자로 몰고 다니는 못
말리는 아줌마도 보았다.
자신의 뜻에 거슬린다고,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우리는 무수한 사람들에게 성
서의 말씀을 뜯어내어 자신을 합리화하는 편리한 도구로 사용하고 있지는 않
는지 살펴볼 일이다.
이런 말을 하고 있는 나 자신을 비롯하여 성서를, 주님을 자신의 코걸이 귀걸
이로 전락시키는 사람들이 아닌가 돌아보아야 하겠다.
주님이 나에게서 영영 등을 돌리시지 않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