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수사님들하고 얘기하다가 영원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다.
무슨 얘기 끝에 그랬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어떤 수사님이
"영원이라는 말은 쉽게 입에 올리는 게 아닌 것 같아요"했다.
정말 그렇다. '영원'이라든가 '절대'같은 말은 나를 넘어서는
말이다. 나는 가늠할 수 없는 영역에 영원이 있다.
시작도 없고 끝도 없으신 하느님이라는 말도 있지만 말하는
나 이상의 것이 거기에 스며있다.
영원이라는 말은 내 고향 섬의 언덕 기슭에서 해송에 기대어
바라보던 가없는 바다를 떠올리게 한다.
나무에 기대 선 소년은 사라지고 나무도 늙어 없어지겠지만
바다는 변함 없이 한 선, 수평선으로 남아 있으리라.
2.
영원 속에 모든 시간이 있다.
나비가 날고 풀잎이 흔들리고 구름이 흘러가고 아이가 자란다.
그것들은 때로 눈 하나 깜박일 순간에 들어있을 수도 있다.
나는 그걸 예전의 경험으로 알고 있다.
언젠가 어떤 일로 기절한 적이 있었는데
정말 많은 것들이 눈앞에 스쳐가는 것이었다.
깨어나서 보니 그건 불과 일 이초 사이에 일어난 일이었다.
3.
이천 년. 떠들썩하게 시작했던 올해도 저물어 간다.
세월이 흐른 뒤에 나의 연대기는 올해를 어떻게 기록할까
생각하면서 한 해를 돌아보는 것도 좋으리라.
나의 일생 속에서 이천 년은 어떤 해로 남을 것인지,
다가오는 한 해는 또 어떤 해가 될 것인지....
나와 함께 하며 인도해준 모든 선한 능력
온갖 두려움을 넘어 위안과 힘을 주었습니다.
내 곁의 당신을 생각하며 이날들을 보냅니다.
그리고 새해를 당신과 함께 맞으렵니다.
과거는 아직도 우리의 영혼을 아프게 합니다.
우리들 슬픔의 나날은 계속될 것입니다.
아버지, 시련을 허락하신 영혼들에게
당신이 약속하신 위로와 치유를 허락하소서.
슬픔의 잔에서 고통마저 비우는 것은 우리의 몫입니다.
당신의 뜻이기에 머뭇거리지 않고
감사히 받겠습니다. 그 모든 것은 당신이 사랑으로 주신 것입니다.
그러나 당신이 원하신다면 우리에게 한 번 더
삶의 기쁨과 따뜻한 햇살을 맞이하게 하소서.
슬픔에서 배웠으니 그 기쁨은 더할 것입니다.
그 모든 것은 당신께 바쳐집니다.
오늘은 촛불들이 기쁨을 비추게 하소서.
보라, 우리의 어둠을 비추는 당신의 빛이 아니신가요?
우리를 간절한 만남으로 이끄는 빛이 아니던가요?
당신은 가장 어두운 밤도 밝힐 수 있으십니다.
이제 침묵은 더 깊어져 가고
당신 자녀들의 노랫소리에 귀기울이게 하소서.
보이지 않는 세계는 어둠에 싸이고
당신을 찬양하며 감사의 노래를 부릅니다.
선한 능력이 우리와 함께 하니
용기를 내어 미래로 향합니다. 두려움 없이
저녁과 아침에 하느님은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새 날이 시작될 때마다.
디트리히 본회퍼
<2000. 12. 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