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뭐든지 잘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친구에게
작성자
한창현
작성일
2001-11-01 12:00
조회
2673
친구에게
권용훈 안토니오 수사
잘 지내고 있는지 모르겠구나. 너의 모습이 조금은 아련해지는 듯하구
나.
너는 내가 수도원에 들어간다고 했을 때에 조금은 이상한 눈길로 나
를 바라보면서 의아해했었지. 내가 너에게 조금씩 해준 이야기를 이제
는 전부 해주고 싶구나. 그러면 너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 내가 왜 수도원에 갔는지…
너도 잘 알고 있듯이 어머니는 불교를 믿으셨고, 형님도. 아버지와 누
님은 종교가 없는 듯하였지. 나 역시 정식으로 오계를 받지는 않았지만,
불교 쪽에 가까웠다고 생각했다. 그런 데서 생활한 내가 가톨릭을 믿고,
믿는 것으로 부족하여 이렇게 수도원을 들어가려한다니 이상하게 생각
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내 기억으로는 국민학교-지금은 초등학교라 부른다지-때부터인가 어
머니의 손을 잡고서 절에 가던 기억이 나는구나. 초파일이 되면 연등에
불을 붙이러 가던 기억도 나고 말이다. 어린 시절에는 뭐 별다른 특별
하게 너에게 해줄 말은 없구나. 참, 우리 집안에는 셋째 작은 어머니만
가톨릭 신자였었지. 처녀 적부터 믿었고, 시집 와서 우리 할머니를 모시
고 살면서 할머니는 세례를 받았고 작은 아버지와 삼남매 모두 신자가
되었다. 그런데 그 작은 어머니는 내가 고1때, 암으로 돌아가셨지. 아마
도 살아 계시다면 아마도 내가 수도원에 간 것을 좋아하시지 않을까 한
다. 그분이 우리 집안에 유일한 가톨릭 신자분이셨다. 작은 어머니가 돌
아가시고 작은 아버지와 삼남매(나랑 나이가 비슷하다.)는 성당을 안 나
갔지, 그 후 내가 수도원에 들어온 후 작은 아버지께서 가끔 성당에 나
가신다는 소리를 들었을 적에 나는 무척 기뻤단다.
이제는 내 이야기를 시작해야겠구나, 그것이 내가 너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니까 말이다. 중․고등학교를 6년 동안 미션 스쿨에 다녔다. 내가
선택한 것이 아니라 일명 '뺑뺑이'가 나에게 준 선물이었다. 순복음 계
통의 개신교에서 운영하는 학교였다. 학교에서는 한 달에 한 번씩 교회
에 가서 예배를 드리고, 수업시간도 종교시간이 있어서 목사님이 수업
을 했다. 나는 내 종교가 불교라고 믿었기 때문에 이런 시간을 아주 싫
어했고, 예배시간에 하나님(개신교 표현)이 계시다면 이런 시간을 없애
달라고 기도했을 정도였으니까 말이다. 다른 친구들은 나에게 교회에
나가자고 이야기했고, 지금 생각하면 우스운(?) 신학에 대하여서도 많이
논쟁하였다. 그것이 내가 기독교를 접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 고등학교
를 졸업하기 전까지는 별로 이렇다 할 일도 없이 그냥 평범하게 살았
고, 가끔 절에 다니니까 막연하게 스님들처럼 되어도 괜찮겠다고 생각
을 한 적이 있을 뿐이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그 해 3월에 누님은 결혼을 하셨고, 그 해 4월
에 아버지께서 갑자기 쓰러지신 후 일주일 후 돌아가셨지. 형님은 군대
를 마치고 직장을 가려고 준비하고 있었고, 이제는 아버지도 고생을 어
느 정도 하셨으니, 자식들이 벌어다주는 것으로 조금씩은 그것에 대한
보상을 받을 수 있으리라 나는 생각했다. 그런데 그런 일이 일어나기
시작한 때 더 이상 세상에 계시지 않았다. 나는 허공에 대고 외쳤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나야 하는지, 무엇 때문인지, 대답해 보라고. 그러나 아
무 대답도 듣지를 못했다. 안타까울 뿐이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아
무것도 없음이 더욱 나를 슬프게 만들었다.
세월은 흘러 군대에 갈 나이가 되어 국방의 의무를 하러 군대-일명 K
대- 라는 곳을 갔다. K대에서의 생활은 지금까지 내가 살아온 곳과는
틀린 것이었고, 육체적으로는 힘든 생활이었다. 그러나 채워지지 않는
그 무엇이 있었고 정신적으로는 공허함을 느끼고 생활하고 있었다. 훈
련소에서 종교시간에 천주교 교회를 가서 천주교에 대하여 알아보았다.
그리고 훈련소에서 가톨릭 통신 교리라는 제도를 알게 되었다. 그리고
훈병 생활을 마치고 자대에 배치를 받고 나는 본격적인 K대 생활을 시
작하였다. 그리고 훈련소에서 안 가톨릭 통신교리에 편지를 보내고 회
신이 오기를 기다렸지. 한 달 정도 지나자 문제지와 가톨릭을 소개하는
책자가 나에게 왔단다. 나는 무엇에 굶주린 사람처럼 문제지를 읽고서
답을 적어 보내려고 하였지만, 나는 이등병이었지, 계급이. 너도 잘 알
겠지만, 이등병이 내무반에서 책을 보거나 한다는 것은 거의 자살 행위
나 다름없었지. 그러나 나는 그 자살 행위를 무릅쓰고, 문제지를 읽고서
답을 써 내려갔다. 그러나 그 당시의 분위기에서는 조금 아니 많이 힘
들었던 일이 아무 문제 없이 잘 되어 한 달에 한 번 정도의 서신 왕래
로 한 10개월 정도에 걸려서 통신 교리를 끝마칠 수 있었다. 또한 나는
가톨릭에도 불교에서와 같은 스님이 있을 거라는 생각을 하였지. 수녀
님들이 있는 것을 알고 있었고, 신부님들도 계시다는 것을 알았지만, 남
자도 막연하게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가톨릭 성소국에 편지를
보내서 불교의 스님처럼 사는 남자들이 있는지 알아보았단다. 답신에서
는 그들을 수도자라고 부르며, 수사들이라고 한다는 말과, 입회를 하려
면 영세 후 3년정도가 지나야 된다고 했지, 나는 그때 세례를 받기 전
이었단다. 나는 그런 곳이 있다는 것을 안 것으로 만족하고, 통신으로
교리를 배우며 군 생활을 보냈다.
별로 가톨릭 신자를 만나기 어려운 상황에서도, 나는 정말로 운이 좋
았다고 해야 할 것 같구나. 신자들을 많이 만났으니 말이다. 부대에서는
일주일에 한 번씩 종교행사를 한 두 시간 정도씩 가졌지. 일요일을 제
외하고 말이다. 나는 훈련소에서부터 종교 시간에 가톨릭 행사를 찾아
갔지, 어떤 종교인지 알아 볼 셈으로 말이다.
수요일 저녁에 하는 종교행사에서 나는 우리 내무반장이 신자이고, 또
한 열심한 신자들이 많음을 알게 되어, 수요일을 기다리며 살았다고 해
도 과언(?)이 아니었다. 난 군 생활하러 군대에 갔는지, 종교 생활을 하
러, 아니 종교를 알아보려고 군에 갔는지, 생각은 안 해 보았지만 말이
다. 그렇게 지내던 중, 나는 상급 부대로 전출을 가게 되어, 이제는 육
체적으로 더욱 편한 생활을 하게 되었고, 그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한
번의 통신 교리를 더 했다. 역시 그것을 하는데도 한 10개월 정도가 흘
렀다.
그러던 중 기회가 찾아 왔다고 할까, 타 중대에 행정병이 있었는데, 대
신학교를 졸업하고 군에 온 것이었다. 그 신학생과, 먼저 생활하던 중대
의 열심한 신자가 가까운 동네의 성당에 찾아갔다. 그리고 우리의 상황
을 알리고 미사를 봉헌 할 수 있는지 여부를 알아보았다. 그 본당의 보
좌 신부와 중대의 행정병이 서로 신학교에서 선후배 사이로 학교에 같
이 다녀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쉽게 한 달에 한 번씩 주일 미사를 봉
헌하러 오게 되었지. 나는 그 미사에 꼭 참여하면서, 통신 교리를 두 번
마칠 수 있었다. 그리고 외출이나 휴가를 나가면 나는 성당에 가서 수
녀님을 만나 뵙고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그때 나는 자유스럽게 내무반에서 소설을 볼 수 있는 시기였고, 그때
본 책 중에 기억나는 것이 「휴거」와 「하늘 끝까지」라는 소설이었
다. 휴거는 착한 이들(?)이 휴거된 후에 지상에서 잘 살려 하다가 악마
의 꼬임에 넘어가 '666 코드'를 머리에 받아야 하는데도 양심상 머리에
받지 않고 손에 받아 고통당하고 왜 받았는가를 고민하면서 살아가는
어느 남자의 이야기였다. 두 번째 책 「하늘끝까지」는 A.J. 크로닌 씨
의 작품으로 살인 누명을 쓴 아버지의 누명을 벗기는 아들의 노력을 그
리고 있었다. 나는 두 번째 책을 재미있고 감명 깊게 읽었다. 그런데 성
당에 수녀님을 만나러 갔을 때 수녀님은 나에게 「천국의 열쇠」를 주
셨고 아주 재미있고 감명 깊게 읽어 보았다. 아직 네가 안 읽었다면 한
번 읽어 보기를 권한다. 참, 이야기가 주변으로 흘러갔구나. 그리고 세
례를 받을 수 있는지 여부도 알아보았다. 내가 세례를 받을 수 있음을
확인하고는 기쁨과 설렘 그리고 두려움이 교차되었다.
K대 생활에서 A.J. 크로닌을 만난 것이 나에게는 행운이었다. 이 소
설로 말미암아 나는 가톨릭에 대하여 그리고 신부님들의 삶을 어렴풋이
알 수 있었으니 말이다.
세례를 받을 준비를 하면서 나는 기쁨을 맛보았다. 그것은 세상 어느
것에서도 맛볼 수 없는 그런 기쁨이었다.
나는 대부가 되어줄 사람을 찾았고, 쉽게 우리 내무반에서 찾을 수가
있었다. 열심히 생활하며 부대에서 미사를 할 수 있도록 도와 주던 신
자는 이미 제대를 하여서 그를 대부로 하기는 힘이들었다. 그렇게 해
서 나는 1989년 9월 17일 세례를 받게 되었다.
가톨릭에는 세례를 받을 때 세례명이 있는데, 나는 세례명을 무엇으로
할까 고민도 많이 했지, 신학생이 준 인명 사전을 보고서, 세례 날짜로
정할까, 아니면 생일, 등등 고민을 하다가, 내가 되고 싶은 사람 중에서
세례명을 골라야 하겠다고 생각했을 때, 바로 은수자 안토니오를 발견
하게 되었다. 그 책자에는 수도자의 아버지, 수도 생활의 시초라고 설명
을 하고 있었지, 나는 보물을 발견한 듯이 그 이름으로 세례명으로 삼
고 세례를 받았다.
그렇게 해서 K대 생활을 하면서 세례를 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K대
생활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왔을 때 나의 종교 생활은 결코 쉽지 않았
다. 어머니는 내가 성당에 나가는 것을 싫어하셨다. 어머니도 예수님을
좋아하셨던 것 같은데, 그리스도인들이 하는 말과 행동은 별로 좋아하
시지 않으셨던 듯싶다. 어머니는 단호하게 나에게 말씀하셨다. 당신과
같이 사는 동안에는 그럴 수 없다고 말이다. 난 거역할 수 없었으며, 성
당에 나가지 않기 시작하였다.
직장생활을 하면서 나와 종교는 조금씩 멀어지는 듯하였고, 사회생활
의 바쁨 속에서 내 몸을 맡기고 지내고 있었다. 직장이 조금 멀어서 어
머니와 나는 형님 집을 떠나 회사와 가까운 곳으로 이사를 하였다. 그
런데 그 집 가까이에 성당이 있음을 알고 나는 기쁨과 설렘을 감출 수
없었다. 그러나 교회를 안 나간 지 2년이 가까운 세월은 나로 하여금
다시 교회로 돌아가기 힘들게 만들었다.
매일 출퇴근을 하면서 보이는 성당의 십자가를 보면서 이제는 가야 하
는데 하는 생각을 매일 하다시피 하면서도 성당에 가지를 못하였다.
그러나 이제는 더 이상 미룰 수 없다고 생각을 했지. 그리고 퇴근길에
성당에 갔었지. 사실 어머니보다 형님이 더욱 내가 성당에 나가는 것을
반대하였다.
늦은 시간이었는데도 몇몇 사람들이 있었고, 나는 그냥 둘러보다가
돌아왔지. 탐색이라도 한 듯이 보이는 성당의 길을 알려고 노력이나 한
듯이 말이다.
그리고 일요일, 나는 성당에 갔다. 오랜만에 미사에 참여했지. 너도 아
마 알 거라고 생각한다. 가톨릭에서 사람들이 모여 예배드리는 것을 미
사라고 한다는 것을 말이다.
나는 참으로 오래간만에 미사에 참여하고 주보를 한 장 들고 집으로
돌아왔지.그리고 목말라 하던 사람처럼 주보를 처음부터 끝까지 글자
하나 안 빼놓고 다 읽었다. 그런데 그 글 중에 나의 눈을 집중하게 하
는 한 줄의 글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성소모임을 안내하는 많은 수도
회의 모임 소식 중에 성바오로 수도회의 전화번호와 모임 날짜가 적혀
있었다. 며칠이 지나고 알게 된 일이었지만, 내가 성당에 간 날은 바로
성소 주일이었지, 우연이라고 하기는 너무나 이상하지 않니.
나는 다음 날 용기를 내어 전화를 했단다. 남자의 목소리를 기대하면
서, 그러나 전화에서는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오고, 나는 순간 잘못 걸었
나 하고, 성바오로 수도회냐고 물어 보았단다. 여자는 맞다고 했고, 위
치를 가르쳐 주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직원이었단다.
나는 그 주간을 설렘과 망설임으로 지내며, 어떻게 할까 생각을 했지.
모임은 토요일 오후였지만, 회사는 격주로 토요일은 일을 하고 격주 토
요일은 6시까지 근무를 해야 했으니, 상사들의 눈치도 보아야 하고, 매
주 토요일마다 쉴 수는 없었단다.
그러나 한 번 정도는 쉴 수있다고 생각하고 나는 휴가원을 내고 오후
3시에 있는 모임을 위해 성바오로 수도회를 갔다. 이게 내가 수도원에
처음 가본 것이다.
후배와 이야기를 나누면서 성바오로 수도회가 있음을 알고 있었지만
말이다. 아마도 너에게도 이야기 한 듯하구나. 후배는 열심한 신자였고,
시간이 나면 성소피정 등을 다녀왔다. 후배에게 "너 수도원 갈거냐?"라
고 물었을 때 후배는 "아니요, 2세를 위해서 다니는 거예요. 내가 모르
면 알려줄 수 없잖아요." 하고 대답했다. 나는 그 후배에게 어떤 수도원
들이 있는지 많이 알았고, 성소모임과 성소피정이라는 것이 있다는 것
을 알았다. 나보고 여러 곳을 다니면서 알아보라고 권하기도 하였다. 나
는 교회활동을 조금씩 하면서 나의 신앙생활을 해 나가고 수도원에 대
하여 여러 가지로 알아보고 지냈다. 교회의 서적을 통하여 성바오로 수
도회가 하는 일을 피상적으로 알게 되었다.
그 후 나는 한 달에 한 번 있는 성소 모임에 있는 휴가를 내고 갈
수 있었다. 그러나 너도 알다시피 직장 생활을 하면서 격주로 쉬는 회
사에서 토요일마다 어떻게 휴가를 낼 수 있니? 눈치를 보면서, 그래서
한 번은 성소 모임에 참여를 하지 못했지. 일도 많았고, 눈치도 보이고
그래서 말이다. 그리고 그 중에 아마 몇 번은 토요일에 출근을 하고 오
전 근무만 하고 조퇴를 했지. 일도 많았고, 눈치도 보여서 말이다. 직장
의 과장은 어디를 그렇게 가냐고 하면서 의아해했고, 나는 볼일이 있다
고 말하고 휴가를 내었다.
수도회 모임에서 나는 성바오로 수도회 창립자인 알베리오네 신부님의
전기를 받아 왔고, 그 책을 읽으면서 신부님이 세상을 내다보고, 그리고
현대적인 수단을 이용하여 복음을 전하는 것에 대하여 아주 감명 깊었
으며, 내가 관심을 가지고 있는 분야이기도 하기에 나는 관심을 더욱
많이 가졌다.
어머니도 내가 성당에 다시 나가는 것을 알고 계셨지. 그러나 그렇게
맨 처음 반대하시던 것처럼 반대는 하시지 않았지. 성당에 나가는 것은
어머니의 허락 아닌 허락이 있었다. 그러나 내가 수도원 성소모임에 나
가는 것을 아시고는 가지 말 것을 이야기하셨다. 수도원에서 성소모임
편지가 오는 것을 보고 아셨지. 어머니가 싫어하셨지만 어쩔 수 없었다.
나의 삶을 찾으려는 노력의 일환이었으니까 말이다. 1993년 8월, 회사에
서 여름 휴가를 얻어서 수도원에서의 삶이 어떤지 3박4일 동안 지내기
도 했다. 어머니는 아마도 내가 그 모임에 갔다오면은 다시는 안 가겠
지 생각하셨는지 잘 갔다 오라고 하셨다. 여름 휴가마다 배낭을 메고
등산을 가던 내가 휴가에 등산을 가지 않기로 한 것은 큰 결단이었다.
수도원에서 4일 동안의 생활은 신선한 것들이 많이 있었다. 마지막 날
의 독서를 읽고난 후 강론을 하시는 신부님이 나를 지적하면서 "수도원
의 생활을 다른데에 가서 어떻게 이야기할 것인가?" 하고 질문하셨다.
"오늘 독서에 나오는 사람처럼 좋게, 아니면 나쁘게 말하겠는가?" 그날
독서는 민수기 13장의 내용으로 모세가 가나안 땅에 정탐대를 보내 가
나안 사정을 알아보고 그들에게 보고를 듣는 내용으로 되어 있다. 그러
나 그 정탐대는 두 패로 나뉘어 한 패는 좋은 곳이라고 이야기하고, 다
른 한패는 살 곳이 못 된다고 보고하는 그런 대목이다. 강론을 하신 신
부님도 나에게 두 패중 어느 사람들처럼 이야기할 것인가를 질문한 것
이었다. 너도 기회를 내어서 한 번 읽어 보렴. 수도원에서는 보통 아침
5시 30분 정도에 일어나는데 마지막 날은 난 4시 정도에 일어나 성당
에 내려가 기도하였다. 하느님께서 나에게 원하시는 바가 무엇인지를
알려 달라고 말이다. 내가 수도자가 되기를 원하는지, 아니면 결혼하기
를 원하는지 알려 달라고 기도했다. 그러나 아무 말도 나의 귀에는 들
리지 않았다. 그렇게 수도원의 4일 동안의 생활을 마치고 일생생활로
되돌아 왔다. 그래서 그 해에는 너와 여행을 같이 할 수 없었다. 너도
아마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11월에 일일 피정을 통하여 수도생활이 무엇인지, 수도자는 누구인지
등에 대하여 생각하여보았다. 피상적인 것이 조금씩 구체화되어 갔다.
연말이 다가오자 성소담당 신부님이 입회 여부를 물으셨다. 너에게도
가끔 이야기했듯이 수도생활을 하고 싶었던 나는 입회를 할 것이라고
말씀드렸다. 그리고 본당 신부님의 추천서도 필요하다는 것을 알고 본
당 신부님에게도 수도회에 입회할 예정이라고 말씀드렸다. 그리고 신부
님에게 추천서를 써 주시길 부탁드렸다. 신부님은 그 이야기는 다음에
하자고 하시며 왜 수도원에 가려고 하는지 등 여러 가지 질문을 나에게
하셨고, 내가 대답을 드리지 못한 문제에 대하여서는 생각을 해보고 다
음에 이야기하자고 하셨다.
본당 신부님과 두 번째 만나서 더 많은 이야기를 하고, 제일 궁금한
"내가 하느님을 찾는 것인지, 아니면 하느님이 나를 부르시는 것인지
모르겠다"는 질문을 드렸다. 신부님은 "사도행전 9장의 바오로 사도의
부르심을 한 번 읽어 보고 생각해 보게." 하고 말씀하셨다. 나는 사도
행전을 읽으며, 나에게도 바오로 사도처럼 "안토니오 너는 수도원에 가
라." 하고 말씀해주기를 얼마나 바랬는지 모른다. 4일 동안 수도원에서
생활하면서 내내 드렸던 기도를 다시 하게 되었다. 바오로 사도에게 나
타난 것처럼 나에게도 일어나길 바랬다. 그러나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
았다. 그러므로 내가 짝사랑을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마저 들었
다. 더욱이 어머니는 "수도원에 가지 말라."고 하셨다. 이런 궁금증을
안고 세 번째 본당 신부님과 만났을 때에 신부님은 나의 질문에 "그렇
게 생각하는 것만으로 하느님께서 부르시는 것이다."라고 말씀하셨다.
나는 여기에 위안을 얻었다. 그리고 본당에서 나보다 더 열심히 활동하
던 형제가 나에게 왜 수도원에 가려고 하는지 자기는 그런 생각 안 한
다고 하였을 때에 어렴풋이 이해할 수 있었다.
직장에서도 회사를 그만두겠다고 하였을 때, 직장 상사가 "여기에 있
는 사람들을 도우면서 살아갈 수 있지 않습니까?" 하고 나에게 질문을
하더구나. 너 역시 나에게 이렇게 물어 보았지. 나는 웃으며 말을 하지
않았지. 직장 상사에게도, 너에시의 게도 말이다. 시의한 구절이 생각
나는구나.
"왜 사냐고 물으면 웃지요"
나 역시 이것이 너에게 할 수 있는 대답이다 .
수도원에 살기로 작정하고 온 날, 어머니를 전철역까지 배웅하고 돌
아서 올 때 수도원에 보내고 싶지 않지만, 보내 주신 어머니께 감사드
렸다.
친구야, 나는 수도원에 오면서 한 가지 바라는 것이 있었다. 다른 사
람이 나를 생각하고 " 왜 그가 수도원에 갔을까?" 하고, 질문하게 하고
그 질문에 " 하느님 때문일 것이다."라고 답을 얻기를 기도하였다. 너도
나 때문에 하느님을 한 번 생각해 주기 바라며 이만 줄인다.
수도원에서 친구 용훈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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