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뭐든지 잘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앗! 팔자가 누워 있네?
작성자
한창현
작성일
2001-11-01 13:00
조회
3418
앗! 팔자가 누워 있네?
임송균 프란치스코 수사
"갈대가 부러졌다 하여 잘라 버리지 아니하고, 심지가 깜박거린다 하여
등불을 꺼 버리지 아니하며, 성실하게 바른 인생길만 펴리라."
(이사 42,3)
하느님께서 나를 언제, 어디서, 어떻게, 어떤 모양으로 부르셨냐고 질문
을 하면 자신있게 이것이라고 답하기는 어렵다. 나에게는 특별한 사건
으로부터 하느님의 부르심이 있었다고 생각하지 않고 나의 삶, 전체를
통해서 이끌어 오셨고 불러 주신 것 같다. 우리는 어르신네들께서 보통
세상살이가 고달플 때는 푸념 섞인 말로 "이놈의 팔자가 왜 이다지도
드센가?"라고 말씀하시는 것을 들어왔다. 내가 지금부터 써내려가는 것
이 그런 의미의 팔자는 아니지만 팔자가 누운 이야기를 잠깐 들려 주
고 싶다.
지금 생각해 보면 내가 태어날 때부터 하느님의 은총을 받은 것 같다.
가끔 어머니께서는 나의 얼굴을 보시면서 이렇게 건강하게 키워 주신
것만으로도 하느님께 감사드려야 한다고 하시며 내가 태어날 때의 이
야기를 들려 주시곤 하셨다.
나는 보통 아이들처럼 세상에 나올 때 우렁찬 신고식(?) 으아앙 울음소
리를 제대로 지르지도 못하고 힘들고 어렵게 나왔다고 한다. 내가 세상
에 나오기로 예정된 날이 다시 말하면 출산 예정일은 3월 그믐이었는
데, 내가 나오기도 전에 아기집에 있던 양수만 나오고 아기는 나오지도
못하고 어머니 뱃속에 그대로 있게 되었단다. 그렇게 경과한 시간이 약
서른한 시간이 지나 사월 하고도 초이틀이나 되서야 새까맣게 타 버린
붉은 핏덩어리 생명체는 세상에 나왔지만 어떤 소리도 내지 못하고 있
었다. 출산을 도와 주던 사람들은 위급한 산모에게만 신경을 썼고 핏덩
어리인 아기는 윗목으로 올려졌다고 한다.
그러나 불행 중 다행인가? 외할머니께서 그래도 세상 구경하러 나온
놈인데 살려야 하지 않겠느냐고 하면서 어린 핏덩어리의 두 발을 잡고
거꾸로 세워 볼기를 때리니 그제야 '응애' 하고 신고식을 했다고 한다.
신고식은 그런대로 했지만 그것으로 험난한 고비는 끝난 것은 아니었
다. 내가 어머니 뱃속에 있었을 때 어머니는 계속 설사를 하셨단다. 그
런데 내가 세상에 나오니 내가 설사를 하더라는 것이다. 그때 집안 형
편은 가난해서 보리밥을 겨우 해먹을 정도였는데 나 때문에 쌀밥을 먹
어야 했다. 갓난아기 때부터 약통을 밥통과 함께 달고 다녀야 했다.
나는 태어나자마자 대세를 받았다. 그것은 내가 언제 죽을지 모르기 때
문에 대세라도 주자고 해서 이웃집에 천주교 신자 아저씨에게 부탁하
여 대세를 받게 되었는데 그 아저씨가 나의 대부님이 되신 것이다.
집안에 천주교를 믿게 하신 분은 어머니셨다. 어머니께서 나의 본명을
정하실 때 잘 불려지지 않는 성인을 택한다고 하신 것이 방지거 성인
이셨다. 이 성인은 지금 이 자리에 있기까지 나를 이끌어 오셨고, 수도
성소에 응답하게끔 해 주신 분이시다. 잠깐 집안 식구들을 소개하면 외
할머니, 부모님, 형, 여동생, 남동생 해서 3남 1녀 중 차남이다. 서열을
따지자면 두 번째이고 어찌 보면 나는 행복한 사람 중의 한 사람이라
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위로 형님이 계시고 밑으로 여동생, 남동생이라
골고루 갖추었다고나 할까? 그러나 어떤 때는 내 위치가 아무것도 아
니라는 생각이 들 때도 있었다. 장남은 장남대로 맏이이기 때문에, 여
동생은 외동딸이기에, 남동생은 막내이기에 사랑받고 있기에 나는 아무
것도 아니라고 어머니께 말씀드렸더니, 샌드위치는 속맛이 좋다는 식으
로 마음을 달래 주셨다. 아버지는 말이 없으셨고 어머니는 매사에 지혜
롭게 처리하셨다. 알기 쉽게 설명해 주셨고 생각할 수 있는 것을 던져
주셨다. 가정 분위기는 서로 이해해 주고 도와 주며 편안했다.
나는 경기도 안성군에 있는 조그만 마을에서 태어났다. 지금 생각해
보면 어렸을 때 뛰어놀기에는 정말로 좋았던 집이었다고 생각된다. 초
가집에 넓은 앞마당이 있었고 좌측에는 약간 높은 곳에 항아리가 크고
작은 것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장독대가 있었다. 집과 집을 구분하는
경계선인 울타리는 다른 나무들과 찔레꽃으로 되어 있었고, 어느 해인
가 형이 거름을 하기 위해 쌓아 놓은 퇴비 더미에 호박씨를 심어 울타
리를 호박 덩굴로 뒤덮었던 일이 생각난다.
하지만 고향에서의 어렸을 때의 이야기를 들려 달라고 하면 할 말이
별로 없다. 왜냐하면 내가 태어난 곳에서 여섯 살 때까지밖에 살지 않
았고 안양으로 이사 왔기 때문이다. 그래도 가끔 기억 저편에 하나, 둘
떠오르는 것들이 있다.
그때 놀이기구는 별로 없었고 기껏해야 산에 있는 곤충들이 고작이었
다. 집 뒤로 낮은 산이 있었는데 참나무 밑이나 홈이 파져 있는 곳을
살펴보면 풍뎅이가 있다. 그리고 지금은 보기 힘들겠지만 장수하늘소가
있어서 그것을 다리에 실을 묶어서 가지고 놀았다. 하루는 그놈을 방에
다 놓고 문을 닫아 걸고는 실을 풀어 주었다. 그랬더니 창호지를 뚫고
날아가 버리는 것이 아닌가? 어린 마음에 얼마나 가슴이 아팠는지 모
른다. 겨울에는 물을 대어 얼려 놓은 논바닥에서 썰매타기로 하루가 다
가는 줄도 모르고 신나게 놀았다. 썰매타기에 싫증이 나면 소나무로 깎
아 가운데 쇠구슬을 박아 만든 팽이로 팽이치기를 했다. 가죽으로 만든
팽이채로 후려칠 때마다 팽이는 힘차게 돌아갔다. 마을 어귀에는 커다
란 미루나무 여러 그루가 줄지어 서 있었고 미루나무가 줄지어 서 있
는 길과 논 사이에는 냇물이 흐르고 있었다. 아버지께서 내가 아기였을
때 나를 업고서 논에 물고를 대려고 나가셨는데 물근처에 내려놓고 논
에 물을 대고 오시니 아기가 없어져서 찾아보다가 아기 울음소리가 나
는 곳으로 달려가 보니 물 위에 둥둥 떠내려가다가 나무에 걸려 있어
서 무사히 건질 수 있었다고 한다.
내가 여섯 살 때 안양으로 올라와서 살게 되었다. 집 앞에 개천이 흘
렀고 그 옆에 길을 따라서 철로가 놓여 있었는데 안양역과 병목안을
잇는 것으로 수리산에서 남포를 터뜨려 채취한 돌들을 운반하는 용도
로 쓰였다. 유년기를 보내면서 언어 습득 능력이라든지 깨우치는 것이
남들보다 훨씬 늦었다. 여기에서 내 팔자(?)가 누운 이야기가 시작된다.
초등학교를 입학해서도 숫자나 한글을 제대로 쓰지 못했다. 그래서 늘
아버지 손에 든 회초리는 내 주위를 맴돌았다. 다른 숫자는 그런 대로
제대로 써내려갔는데 유독 '8'이라는 숫자는 세워지지 않고 누워(∞)있
는 것이 아닌가? 그래서 그 다음부터는 "어떻게 하면 '8'자를 세울 수
있을 것인가?" 가 나에게 있어서는 최대의 과제가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누워 있는 '8'자를 세울 수 있는 묘안이 떠올랐다. 그
때 집에는 어머니께서 사용하시는 미싱이 안방에 있었다. 지금은 모터
가 달린 미싱이 나오지만 그때는 발로 페달을 밟으면서 하는 수동뿐이
었다. 그 발판과 몸체 사이에 상표가 있었다. 그 상표의 이름은 드레스
(DRESS) 미싱이었다. 그 글자를 유심히 바라보고는 'S' 자에 '/ ' 를 손
으로 그어 보았다. 그러고는 커다란 환성을 마음 속으로 올리며 무릎을
쳤다. 드디어 나는 팔자(?)를 세운 것이다. 지금 어린이에게 이 얘기를
들려 주면 배꼽이 달아날 정도로 웃어 죽겠다고 하겠지만 그 당시 그
어린이에게는 대단한 발견이었다. 그 이후로 배운다는 것이 재미있었다.
그래서 학교는 고등학교 때까지 개근을 할 정도로 하루도 빠짐없이 다
녔고 선생님이 말씀하시는 것은 무엇이든지 옳은 것이라고 믿었었다.
주일이면 아버지는 자전거에 나와 형을 태우고 성당에 미사 참례하
러 가셨다. 지금 자전거는 앞에 어린이용 의자가 부착되어 나오는 것이
있지만, 그 당시 아버지 자전거는 그것 없이 타고 다녀야 했다. 성당은
집에서 자전거로 10분 정도 걸리는 거리에 있었지만 성당에 도착하여
자전거에서 내리면 엉덩이가 아팠다. 그렇지만 이렇게 주일이면 성당
에 가는 것이 매우 기뻤다. 성당 안에 들어가서 조용히 기도하는 사람
들의 모습을 보면 매우 거룩하고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는 것처럼 보였
다. 성당에 긴 의자들이 네 줄이 있었는데 오른쪽 두 줄은 여자들이 왼
쪽 두 줄은 남자들이 따로 앉았다. 그래서 가족들이 함께 가면 어머니
와 여동생은 따로 앉았다. 그러나 세월이 지나면서 그런 구분이 없어졌
다. 미사 중에 신부님이 강론을 하시면 졸리기도 하고 어떤 때는 무슨
내용인지도 모르면서 강론 내용에 빠져들기도 했다. 그리고 무릎을 꿇
을 때는 장궤틀에 무릎을 꿇고 기도서와 성가책꽂이에 얼굴을 묻고 손
만 쳐들어야 했다.
주일학교에 들어가서는 매주일 어린이 미사에 참석했다. 그리고 미사
후에 있는 교리 시간에는 재미있어 열심히 성당을 다녔다. 또한 성당에
서 친구들과 만나는 것이 즐거웠고 부활절이나 크리스마스 때 파티하
는 것이 좋았다. 주일학교에서는 한 학년이 지나면 개근상을 주는데 한
번은 개근상을 받게 되었다. 부상으로는 크레파스와 스케치북을 받았다.
그때는 어린 마음에 뛸 듯이 기뻤다. 장마 때만 되면 집 앞에 냇물이
범람하여 집이 물에 잠기고 철로 앞에 있는 둑이 무너져 철로만 덩그
렇게 늘어져 있곤 했다. 한번은 새벽에 비가 몹시 내려 자다말고 뒷집
으로 물건들을 옮겨야 했다. 물은 이미 부엌에 찼고 내가 막 옆방으로
해서 뒷집으로 가려고 할 때 창문 너머로 보이는 벽이 힘없이 무너져
내렸다. 그렇게 비는 멈춰 날씨는 개었고 비 피해는 별로 없었다. 초등
학교 2학년 때 초등학교 뒤 산동네로 이사가게 되었는데 여기에서는
십 년이상을 살게 되었다. 그런데 이삼년 후 여름에 폭우가 내려 전에
우리가 살던 동네에 산사태가 나서 집이 무너져 내리는 등 피해가 많
았다고 한다. 4학년 여름방학 때 첫영성체를 하기 위해서 교리를 배웠
다. 주의 기도,성모송, 영광송을 외워야 했고 오락 시간에 즐겁게 놀다
가도 삼종기도 시간이 되어 종이 울리면 소리 높여 삼종기도를 받쳤다.
그 넓은 성당 앞마당에서 신자들이 하던 일을 멈추고 기도하는 모습이
너무나 아름다워 보였다. 첫영성체하는 날은 정말 좋았다. 멋진 옷을
입고 여자애들은 머리에 꽃까지 꽂으니 더욱 예뻐 보였다. 그날의 기쁨
은 그 동안에 힘들었던 것을 말끔히 잊게 해주었다. 그렇게 첫영성체를
하고 주일미사에 나오다가 서서히 옆길로 가게 되었는데, 그 길은 집과
성당 사이에 있는 만화가게로 가는 길이었다. 집에서 어머니께서 성당
에 다녀오라고 헌금할 돈을 주면 반은 헌금을 하고 반은 돌아오는 길
에 만화가게에 들러 만화책을 보는데 써버렸다. 나중에는 아예 성당에
가지도 않고 만화가게에서 만화책을 보다가 미사가 끝나는 시간에 맞
춰 집에 돌아오곤 했다. 형과 함께 다녔던 만화가게로 가던 길이 형에
게 있어서는 아직도 돌려지지 않고 있다. 하지만 언젠가는 성당으로 가
는 길에 들어서리라는 것을 믿고 있다. 나에게는 중학교 2학년 때까지
계속되었다. 나는 성격이 내성적이었고 부끄러움을 몹시 타는 아이였다.
하지만 나에게도 친구들을 사귈 수 있던 기회가 있었다. 하느님께서 운
동을 잘 할 수 있는 선물을 주신 것이다. 초등학교 때 축구부 활동을
한 것이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친구들을 쉽게 사귈 수 있는 좋은 계기
가 되었다.
중학교 1학년 때 같은 반이었던 한 친구를 알게 된 것이 지금까지
친구로 지내고 있다. 내가 입회하기 전에 아들을 낳았는데 막무가내로
대부를 세운 이 친구와의 만남도 하느님의 손길임이 확실하기에 들려
주고자 한다. 이 친구는 지병이 있었다. 그래서 수업시간에도 가끔 발
작을 일으키는 일들이 있었다. 그래서 친구는 집에서 쉬게 되었다. 내
가 2학년이 되었을 때 1학년 때의 담임 선생님이 부르셨다. 그 친구의
병에 잘 듣는 약과 외국인 의사 선생님의 연락처를 전해 주라고 하셨
다. 우리 집에서 그 친구집에 가려면 산 하나를 넘어야 한다. 그 친구
집도 산동네에 있었다. 그렇게 약심부름을 몇 번 한 것으로 그 친구와
의 연락은 끊어졌고 시간이 흘렀다. 고등학교 때 우연히 성당에서 그
친구를 만났다. 그 전까지는 그 친구가 천주교 신자라는 것을 몰랐다.
정말로 반가웠다. 그렇게 해서 연락이 계속되었고 후에도 청년회 활동
을 함께 했다.
중2 때 형은 구미에 있는 공업고등학교에 입학해서 기숙사 생활을
했고 방학 때만 올라왔었다. 그때에 나에게 펜팔을 해볼 생각이 없냐고
하면서 반 친구의 여동생의 이름과 주소를 건네 주었다. 나에게 이성에
대해서 생각해 볼 기회가 주어졌지만 어떻게 해야 할 지 몰랐다. 그래
서 어머니께 조언을 얻기로 했다. 그랬더니 어머니는 편지에 쓸 내용을
연습장에 적어 오라는 것이었다. 내가 연습장에 적어 오면 몇 가지를
고쳐 주셨다. 그리하여 난생 처음으로 여자 친구에게서 편지를 받아 보
았고 그 기분은 말로 표현을 못할 정도였다. 내가 편지를 쓸 때는 어머
니의 손을 거쳐야 했고 그것이 차츰 나 혼자서도 써내려갈 만큼 되었
을 때는 나 혼자 직접 편지지에 쓸 정도가 되었다. 그 여자 친구는 창
녕에서 농사를 짓고 산다고 했다. 그렇게 우리는 사춘기를 보내면서 서
로의 고민들을 나누고 답장을 해주고 때로는 시를 베껴 보내기도 하면
서 우정을 쌓아갔다. 우리의 우정은 군복무를 하고 있을 때까지 계속
되었다.
중3 때 새로운 반 친구를 만났다. 지금 그 친구는 사제가 되어 본당
사목을 열심히 하고 있을 것이다. 학년 초에 그 친구는 나에게 다가오
더니 학생회에 함께 나가자고 제의했다. 그때까지는 성당에도 잘 나가
지 않았다. 나를 어떻게 알았냐고 하니까 주일학교 때 봤다는 것이다.
이러한 계기로 해서 다시 성당을 찾게 되었고 그 동안의 무거웠던 마
음들이 조금씩 가벼워졌으며 활기를 되찾게 되었다.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 일이 처음 학생회에 나가 쎌이라는 모임이라는 데서 발생을 했다.
쎌 지도자로부터 성서에 대한 가르침을 듣고 난 후 한 가지 주제를 놓
고 돌아가며 발표하는 시간이었다. 그때 주제는 "이 세상에서 가장 힘
든 것은 무엇인가?"였다. 내 차례가 되었을 때 아무말도 못하고 얼굴만
빨갛게 되어 있었다. 속으로는 이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것은 남을 용
서하는 것이라고 소리치고 있었지만 입밖으로는 나오지 않았고 그래도
용기를 내어 한다는 말이 "그 물음에 답하는 것이다."라고 하는 것이었
다. 그렇게 해서 첫 쎌 모임을 마치고 끝난 후에는 잘 가는 분식점으로
나를 데려갔다. 성당이 시장과 가까이 있었기에 조금만 걸어가면 되었
다. 중3은 고입을 준비해야 하기 때문에 사실 학생회 활동이 부담스럽
기는 했지만 함께 모여 공부할 수 있어서 좋았다. 평일 때도 구 유치원
지하 회의실에 모여 공부를 했다.
집에서 학교까지 30분 정도 걸리는 거리에 있었다. 학기 초에 환경정
리를 한다고 선생님은 공휴일에 학교를 나오라고 하셨다. 그래서 가벼
운 차림으로 학교까지 버스를 타지 않고 자전거를 타고 갔다. 이것이
내가 3년동안 그러니까 고 2때까지 자전거로 통학을 하게 된 동기가
되었던 것이다. 지금의 인덕원 사거리는 8차선으로 넓게 포장되어 있었
지만 그때는 2차선이 겨우 놓여진 때였다. 같은 동네에 자전거로 통학
하는 친구가 있어 함께 다녔다. 그 이후로 비가 오나 눈이 오나 항상
타고 다녔다. 주말에는 코스를 바꿔 지금은 아파트 단지가 들어섰지만
그때 논들이었던 평촌동 쪽으로 갔다. 그리고 하교길에는 항상 성당에
들러 기도하고 잠깐 쉬었다가 집에 가곤 했다. 나는 집이 산꼭대기에
있었기에 자전거를 끌고 올라가야 했다. 자전거로 통학하면서 위험으로
부터의 보호는 하느님의 손길이셨고 수호천사의 보살핌이었다고 생각
된다. 겨울이 되고 연말이 되니 학생회에서는 불우이웃돕기 운동의 일
환으로 장사를 했다. 회원 전부 모여서 서로 도와 주고 열심히 하는 모
습이 보기 좋았다. 판매를 하다가 눈이 내리면 눈싸움도 했다. 매년 눈
이 내리면 연락이 없어도 성당에 모여서 눈싸움을 신나게 하고나서 제
설 작업을 한다. 이렇게 정성스럽게 모은 돈을 가지고 나환자촌인 나자
로 마을을 방문한다. 난생 처음 가보는 곳이라 두렵기도 하고 설레기도
했다. 식당에 모여 우리들이 준비한 장기 자랑을 해 보이고 함께 즐거
운 시간을 갖게 되었다. 약냄새와 환자들에게서 나는 역겨운 냄새가 견
디기힘들었다. 그렇지만 이런 방문이 계속되면서 차츰 좋아졌다. 나환
자들의 열심한 신앙생활의 모습을 그들의 기도 모습에서 엿볼 수 있었
다.
고등학교는 선생님 제안도 있었고, 나도 또한 마음에 들어 같은 재단
인 학교로 택하였다. 위치는 중학교와 나란히 있었다. 매번 진학할 때
마다 희망사항들이 이루어지는 느낌이 들었다. 중학교 때는 고등학생
선배들의 교복과 모자가 멋져 보였고 언젠가는 나도 저런 모습이 돼야
겠다고 생각을 했던 것이다. 고등학교에 입학을 해서 등교하는 첫 날
교실 분위기는 중학교 때와는 엄청나게 틀렸다. 그렇게 꿈 많고 희망찬
고교 시절이 시작되었던 것이다. 변화된 모습이 대화 속에서도 확연히
드러났다. 종교에 대해서 개인적으로 반 친구들 사이에서 오고가는 것
을 듣고는 조금은 성숙해져 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개신교에서 운영
하는 학교이기에 교목 선생님이 가르치시는 성경공부 시간이 있었다.
하루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하셨다.
"연탄을 하얗게 만들 수 있는 방법을 말해 보라"고. 나는 여러 가지 생
각이 났는데 그중 한 가지를 말했다. 흰색 종이로 싸면 된다고 했다.
그때 그 질문은 죄가 많은 우리 인간이 어떻게 회개해야 하는가를 물
어 보기 위한 것이 아닌가 생각했다. 그 질문의 대답의 올바른 대답인
지는 모르지만 연탄을 태우는 것이다. 그것은 열이라는 에너지를 발하
여 음식물을 조리하고 방을 덥게 하는 등 여러 가지로 쓰일 수가 있다.
그러고는 새까만 모습은 사라지고 새하얗게 변화된 자신의 모습을 발
견할 수 있을 것이다. 지금 생각해 보면 자신을 태우는 것이 완전한 회
개이고 하얗게 만드는 것이라 생각한다. 번개탄이나 장작이라는 하느님
의 은총으로 연탄이라는 내가 타오를 수 있다면 뜨겁게 타올라 새하얗
게 변화되려는 삶을 살고 싶다. 그래서 음식물을 조리하든지 방을 데우
는 데 사용되어 이웃에게 쓸모있고 유익한 존재가 되고 싶다. 그리고
나의 역할을 다하고 주님 앞에 나가는 그날 나의 새하얀 모습을 주님
앞에 보이고 싶다.
각 반에는 종교부장이라는 직책이 있는데 그 친구 이야기를 들려 주고
싶다. 이 친구는 한때 불량스런 자신의 행동을 뉘우치고 교회에 열심히
다니고 반에서는 종교부장의 직책을 맡았다. 이 친구의 질문이 가끔 나
에게 무언가를 던져 주는 것 같아 기억이 되살아나곤 한다. 이삼 년 뒤
에 길에서 우연히 만났는데 대뜸하는 질문이 "너 아직도 성당 다니니?"
였다. 그 순간 나는 신앙생활이 좋으면 하고 싫어지면 그만두는 놀이가
아니라는 생각을 해왔기 때문에 이러한 질문은 내 귀에 생소하게 들렸
고 좋게 느껴 왔던 그 친구의 인상이 약간은 흐려지는 듯한 느낌을 받
았다.
고1 겨울방학 때에 매년 연중행사로 이번에도 어김없이 나자로 마
을 방문을 위해서 성당 앞에서 리어카에 판을 올려놓고 귤, 엿, 찹쌀떡
커피 등의 물건을 판매하였다. 이제는 제법 능숙하게 잘하였다. 그런데
그해는 연말에 가지 못하고 연초에 세배하러 가게 되었다. 마침내 그
날이 왔다. 이제는 한번 다녀왔다는 경험이 있어서인지 떨리거나 어색
하지 않았다. 왠지 가슴이 설레었다. 작년에 만나 뵈었던 할아버지, 할
머니는 안녕하신지 하루하루가 어떻게 될지 모르는 분들이기에 더욱
궁금하였다. 우리가 갔을 때는 식당에 모여 계시지 않았기에 각 방을
순회 방문하였다. 그곳에는 병의 경중에 따라 나뉘어져 있고, 남자와
여자가 구분되어 있었다. 어느 집 방문을 노크하고 문을 여는 순간 한
젊은 나환자는 얼굴을 가리며 "제발. 돌아가 달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함께 살고 계시는 할아버지는 그런 소리 말라고 하시며 "우리를 위해
이렇게 방문해 주셨는데 그냥 돌려보내면 어떻게 하느냐."고 하며 반겨
주셨다. 그래서 우리는 조심스레 들어갔다. 방에는 대여섯 분 정도가
살고 계셨다. 내가 간단한 인사말을 하고 난 후 나와 한 자매가 노래를
부르고 나니, 너무나 좋아하신 나머지 눈물을 글썽이시며 나와 자매의
손을 꼬옥 잡으시는 것이었다. 그분들의 손을 보면 손가락이 성한 것이
없었다. 떨어져 나간 것, 구부러진 것 등. 떨어져 나가 딱딱한 부분이
나의 손에 닿으니 엄청 아프기도 하고 약간은 무서운 생각에 몸을 움
츠렸다. 다른 곳도 들러 세배하고 병동에 대한 설명도 듣고 준비해 간
장기자랑을 보여 드리고 그곳에 할 일이 있다고 해서 그 일을 도와 드
리고 돌아왔다. 집이 산꼭대기에 있었기 때문에 수돗물이 올라
오지 않았다. 그래서 산 너머 중간쯤에 위치한 약수터에서 떠다 먹어야
했다. 겨울에 눈이 내리면 집 뒤부터 산 너머에 있는 약수터까지 눈을
쓸어야 했다. 그렇게 하다가 약수터 앞쪽으로 우물을 파서 우리 집까지
파이프를 묻고 중간에 모터를 달아 그 물을 올려 먹게 하는 대공사를
했다. 그리고 아버지께서 자전거로 출퇴근을 하셨기 때문에 마을 어귀
까지 눈을 쓸어 내리고 연탄재를 깔아 놓아야 했다. 집 앞에는 하수구
를 묻지 않아서 도랑물처럼 하수가 흘러 내려가고 있었고 겨울에는 얼
고 얼어서 높아지면 하수가 사람이 다니는 길로 넘쳤다. 그래서 그 얼
음을 깨는 작업을 하고 있던 어느 날 앞집에 사는 두 살 밑의 여자아
이가 나에게 다가오더니 느닷없이 하느님에 대해 물었다. 그 집은 종교
가 없었고 부모님들 역시 심한 반대를 하고 있었다. 그래서 내가 아는
대로 하느님에 대해 설명해 주었다. 몇 주 후에 그 아이를 성당에서 만
나게 되어 물어 보았더니, 예비자 교리를 듣는다고 하였다. 그 다음에
는 영세를 받고 그 뒤에 나의 초등학교 동창인 그 언니도 영세를 받고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 사실은 그 집의 어머니가 만신이었다.
처음부터 만신이 아니었고 동네에서 사고를 치고 도망갔다가 돌아와서
는 집안에 차려 놓았던 것이다. 그 집을 통해서 하느님께서는 모든 이
에게 공평하게 역사하고 계심을 여실히 보여 주고 계셨다.
집안에 상당한 변화가 있었다. 회사에 다니시던 아버지는 정년 퇴직
을 눈앞에 두고 계셨는데 직매장 책임자로 발령을 받게 되었다. 상인들
은 판매에 경험도 부족하셨고 마음씨도 너그러우신 아버지를 이용해서
물건을 외상으로 가져갔고 수금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래서
회사측에서는 정년 퇴직을 앞둔 아버지를 강제로 퇴직시키셨던 것이다.
이에 마음의 상처를 받으신 아버지는 퇴직금으로 계란 가게를 하셨다.
하지만 장사에 대한 경험이 없으셨던 아버지는 조금씩 적자를 보셨고
규모를 줄여야만 했다. 그래서 시장 안으로 들어가 조그만 가게를 얻어
다시 시작하셨다. 아버지의 정직과 근면한 성품을 주위 사람들은 높이
샀던 것 같다. 그래서 여러 모로 도와 주었고 조금씩 거래처가 늘어갔
다.
고3 때는 가게에서 다녔다. 고2 때까지 자전거로 통학한 나는 버스로
통학하는 것이 어색했다. 특히 여학교가 두 군데가 있어서 여학생들과
함께 타야 했는데 전에 느끼지 못한 감정들을 느끼게 되었다. 자유분방
하게 통학하던 것과는 달리 힘들다고 느꼈지만 서서히 적응해 갔다. 시
간이 날 때마다 아버지의 일을 도와 드렸다. 주문이 들어오면 위치를
물어 보고 배달을 하였다. 성당에서도 부활절이 되면 학생회에서도 구
입하곤 했다. 2학기가 되자 마음은 바빠지고 집에서는 공부가 되지 않
아 반 친구들끼리 저녁에 교실에 모여 공부를 했다. 나는 학교 수업이
끝난 뒤에 집에 가서 찬합에 밥과 반찬을 넉넉히 가져와서 야참과 다
음 날 아침과 점심을 해결했다. 담요는 가방에 넣어 의자 밑에 넣어 두
었다. 당직 선생님께서는 10시 이후에 우리가 공부하는 것을 허락하셨
다. 그 허락한 기간도 10월까지였다. 11월이 되어서는 집에서 공부를
해야 했다. 학력고사 날이 임박했을 때 하느님께 기도를 했다. '고생하
시는 부모님께 보답할 수 있는 것은 대학 시험에 합격하는 것이니 시
험을 잘 치를 수 있게 도와 주십시오.' 하고 간구했다. 학력고사 날은
왔고 차분한 마음으로 시험을 치를 수 있었다.
ᄌ대학에 원서를 내고 약간은 초조한 마음으로 기다렸다. 발표 전 날
학교에 연락을 했더니 합격했다는 것이었다. 전화 주위에서 듣고 계시
던 부모님은 매우 기뻐하셨다. 나는 나의 기도를 들어 주신 하느님께
감사의 미사를 드렸다. 무엇보다도 기쁜 것은 더 공부할 수 있다는 것
과 내 또래 사람들과 함께 활동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나는 가톨릭 학
생회에 문을 두드렸다. 과선배가 같은 과이며 그 써클에 총무를 맡고
있는 선배를 소개시켜 줌으로써 만나게 되었고 그런 만남은 열심히 활
동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대학에 들어와 처음으로 개강 미
사를 하게 되었다. 그 자리에서 가톨릭 학생회 회장에게 인사를 했고
첫마디가 미사하기 전에 성가 연습을 하라는 것이었다. 당황하기도 했
고 한편으로는 기뻤다. 그 이후로 매번 개 . 종강미사 때는 성가 연습
과 미사 해설을 도맡아서 했다. 성당에서 고등학교 때부터 해 온 전례
부 활동이 도움되었다.
2학기가 되니 순교자료 전시회 준비를 하느라고 정신이 없었다. 나는
총무를 옆에서 도와 주었다. 전시회 장소는 예대 건물에 있는 전시장이
었고, 자료들은 한국천주교회사 연구소에서 협찬하였다. 전시 내용은 사
진, 고서, 형구, 순교자들에 대한 책들이 주류를 이루었다. 이러한 작업
을 하면서 형구들 중에 칼이 있어서 그것을 써 보았다. 길이는 약 2미
터 정도 되어 보였다. 그 당시의 되풀이되는 고문과 협박 앞에서도 신
앙을 꿋꿋하게 지켜 나가셨던 순교자들의 숨결을 느낄 수 있었다. 순교
자료 전시회는 성황리에 끝났고, 전시회를 통해서 회원들의 단합된 모
습을 볼 수 있어서 좋았다.
대학 생활에 잘 적응해 나갔고 시간이 흘러 군 입대라는 것 때문에
휴학계를 내고 집에서 쉬는 동안 성당 선배님을 통해서 가톨릭 신문사
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게 되었다. 지금은 독립하여 다른 건물에 있지만
그때는 교구청 안에 있었다. 내가 맡은 일은 용인 안성 지구의 구독자
들의 수금과 보급이었다. 때는 여름이었고 기간은 2개월 정도였다. 그
아르바이트를 통해 교우들의 생활상과 훈훈한 인정을 느낄 수 있었다.
더위와 다리의 통증은 말끔히 씻어 버릴 수 있었다. 10월 초에 입대를
했는데 그 전에 하느님께 기도를 했다. "어느 부대를 가든지 신앙생활
을 계속할 수 있도록 해주십시오." 하고 청을 드렸던 것이다. 내가 입대
할 때 거의 십여 년 이상 쉬고 계셨던 어머니가 성당에 나가셨고 아버
지도 함께 나가시게 되었다.
군복무는 전방에서 하게 되었다. 군 생활을 하면서 나의 생활 신조를
하나 세우게 되었다. 그것은 '주어진 여건 하에서 최선을 다하는 것'이
었다. 12월 초에 자대배치를 받았는데 그곳의 중대장과 대대장이 천주
교 신자였기에 크리스마스 때에는 인근 마을의 성당에서 미사참례를
하고 교우들과 간단하게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같은 중대에 열 명의
동기가 있었고 함께 소대배치를 받은 동기는 나이도 같았고 신자였기
에 더욱 좋았다. 소대 고참들은 주일이 되어 종교 집합이 있으면 우리
두 명에게는 하던 일을 멈추게 하고 종교 활동에 참석할 수 있게 해주
었다. 미사는 드릴 수 없었지만 공소 예절은 할 수 있게 해주었다.
이 부대는 철책 뒤에 있는 부대이기 때문에 훈련이 많았고 또한 보
병이기에 걷기를 많이 하였다. 보통 훈련을 하게 되면 100킬로미터 행
군은 기본이었다. 이러한 훈련을 네 번 정도는 하게 된다. 걷고 뛰는
것에는 별 어려움이 없었다. 사단의 방침에 따라 한 개의 기동 타격대
를 창설하게 되었는데 우리 소대가 차출되어 다른 연대로 가게 되었다.
그곳은 전보다 큰 마을이었고 특히 좋았던 것은 사단 성당이 마을에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얼마 후에 사단장이 바뀌었는데 천주교 신자였
다. 그래서 주일이면 부대 안으로 종교활동 하기위해 나가는 사병들을
수송하기 위한 버스가 왔다. 처음 생긴 대대이기에 군기는 강했고 제한
사항들이 많았지만 시설 면이나 영내 생활은 전보다 좋았다. 그러나 군
생활 중반에서 말기로 접어들 때쯤에 그 동안 훈련과 작업을 하면서
몸을 제대로 관리를 못한 탓인지 남자들에게 잘 걸리는 병에 걸려 그
곳에 조그마한 것이 돋아났고 그것이 행군할 때마다 쓸려서 통증과 함
께 조금씩 커져갔다. 이것이 화근이 되어 최고로 고생한 것이 3박4일에
걸쳐서 200킬로미터 행군이었다. 통증이 심해서 도저히 참을 수 없어서
살펴보니 피가 고여 있었다. 그래서 지대병에게 가서 말하니 환자들이
차에 가득 차서 태워 줄 수 없다는 것이었다. 나는 이를 악물고 행군을
계속했으며, 무사히 훈련을 마칠 수 있었다. 훈련을 마치고 난 후 상급
부대 의무실을 찾아다니며 치료를 받았다. 주일이면 종교활동을 나갔고,
사단 성당에 몇 번 나가니 군종병이 나더러 독서를 하라는 것이었다.
그 이후로 독서를 맡아서 했으며, 크리스마스 때는 대대별 장기 자랑까
지 했다. 새로 창설된 부대 대대장이 신자였기에 주일이면 성당에서 사
복을 입은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군생활을 마무리하면서 어떻게 제대
후에 생활할 것인가를 나름대로 설계를 해 나갔다.
제대를 하고 4학년에 복학을 했다. 그런데 형은 군복무를 마치고 이
과에서 문과로 바꾸어 대학 시험을 쳐서 학교에 다니고 있었던 터라
나와 같은 4학년이었다. 그렇지만 집에는 별부담이 없었다. 형이 장학
금을 받으며 다녔기 때문이다. 성당에 나가보니 어렸을 때부터 친구이
고 고등학교 때까지 같은 학교를 다닌 절친한 친구가 전례부를 맡아서
해달라며 전례부원들에게 소개시켜 주었다. 그렇게 시작된 인연으로 전
례부 활동을 입회하기 전까지 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맡아서 하다가 후
에는 부원으로 있었다. 그렇게 하면서 무엇인가 알 수 없는 수도성소에
대한 부르심을 청년회 활동을 통해 느낄 수가 있었다. 그래서 주위에
있는 선배나 신부님께 조언을 듣기로 했다. 세월은 흘러 형과 함께 같
은 해에 졸업을 했고 무턱대고 내딛은 사회의 첫발은 나를 매섭게 몰
아붙였다.
처음에는 보험회사에 문을 두드렸다. 성격에 변화를 가져오고 싶어서
라는 이상을 가지고. 하지만 사회는 호락호락 하지만은 않았다. 그래도
해내고야 말겠다는 의지로 열심히 뛰었고 수습기간 4개월이 지나면 팀
장으로 독립할 수 있다는 그 4개월이 지나는 월말에 나는 심한 열병을
앓게 되었다. 열이 38도에서 40도를 오르내리며 정신을 차릴 수 없을
정도였다. 사흘이 지나서야 어느 정도 가라앉았고, 어머니는 회사를 그
만두라는 것이었다. 계속 다니면서도 꺼림직했던 것이 있었는데 나에게
일어난 일들도 있고해서 생각 끝에 회사를 그만두고 유통업계에 발을
들여놓게 되었다. 교수님께서 늘 말씀하시던 유통업의 전망은 밝다는
것을 되새기며, 자격증을 준비하면서 다니고 있었다. 그런데 유통업계에
서 근무하는 동안 주일은 쉴 수가 없었고 평일에 쉬게 되었다. 그래도
주일은 궐하지말아야 겠다는 생각에 새벽 미사 참례를 했다. 성당에서
는 청년 연합회를 구성하여 활발하게 의욕적으로 활동을 해 나가고 있
었다. 나도 연합회 임원이 되어 대학 때 편지를 통해 만나게 된 김정식
씨를 청년 연합회 차원에서 초대하여 생활성가를 매달 배우기로 하였
다. 그러던 중 김정식씨를 통해 처음으로 성바오로 수도회를 알게 되었
고 몇 번 면담을 통해 91년 초에 시간을 내서 일 주일간의 생활체험을
하게 되었다. 그 기간 중에서도 신부님과 면담을 했고 별다른 것이 없
다가 목요일에 무엇인가 끌리는 두 가지 기도 체험을 하게 되었다.그
한 가지는 할아버지가 어린 아이를 귀여워해 주시는 모습이었고, 또 한
가지는 묵상 중에 내가 하느님을 위해, 이웃을 위해 봉사하겠다는 생각
이 신앙심을 바탕으로 하지 않는 것이면 아무 소용이 없다는 생각이
들게 되었다. 그러자 한순간에 물거품처럼 사라지고 생활체험을 하게
되는 이유조차 사라져 버렸다. 신부님께는 몸이 좋지 않다는 말을 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집에 돌아와 보니 이 일로 충격을 받은 어머니는 머
리를 싸매고 누워 계셨고 형은 말이 없었다. 다시는 수도원에 가겠다는
말을 하지 않겠다고 어머니를 안심시켜드렸다. 아직은 신앙에 대해 견
고하지 않은 나의 모습을 발견한 것이었다. 그래서 내적성숙에 신경을
썼다. 그 일이 있은 뒤 3월에 성당에서는 청년을 대상으로 출애굽기 성
서공부를 한다는 공고와 함께 봉사하시는 분이 나타나셨는데 이 분이
바로 나를 다시 성바오로 수도회로 이끌어 주시리라고는 꿈에도 생각
하지 못했다. 군대가기 전에 창세기 공부를 했던 나는 출애굽기를 배우
게 되었다. 하느님을 더 잘 알고 믿음에 대한 확신을 가지기 위해서 열
심히 공부했다. 문제를 풀어 가면서 나의 생활과 생각을 듣고 계시던
봉사자님은 나에게 수도성소에 대해서 다시 한 번 생각해 보라는 말씀
을 하셨다. 그리고 직장생활은 수도회를 찾기 전에 앓았 던 것과 같은
열병을 3일이나 앓고 나서야 그만두고 집배원을 하면서 공무원 시험
준비를 하기 위해서 우체국에 시험을 치고 들어갔다. 시험을 치는 날도
이상이 생겼다. 시험장으로 들어가는 입구에 도착하자 심한 복통이 일
어났고 화장실로 직행해야 했다. 시험을 다 치르고 다음에 있을 면접을
기다리고 있었다. 면접을 보러 갔을 때도 복통으로 고생했고 면접관은
집배원이 무슨 일을 하는가를 물어 보았다. 나는 잘 설명했고 면접관은
다른 질문을 하였다. 나는 가까운 우체국에 발령을 받아 다니게 되었고
내가 맡은 지역으로 일을 나갈 때는 아침기도를 하면서 오늘 만나는
사람들과 좋은 일이 있기를 기도하면서 페달을 힘차게 밟았다. 지난 10
년 이상 나에게 편지를 전해 주었던 집배원 아저씨에게 감사하는 마음
에서 내가 전해 준 한 통, 한 통의 편지가 받는 사람들에게 기쁜 소식
이었으면 하는 마음으로 일을 했다. 내가 나가는 구역에 신자들이 많이
있었다. 등기나 소포 등을 나누어 줄 때 여러 가지 이야기를 했다.
어려운 점도 있었다. 그것은 연말에 물량이 많아졌을 때의 일이었다.
그날은 바람이 불었고, 자전거 뒤에 실려 있던 우편물이 무게에 이기지
못하고 넘어 가는 바람에 도로에 우편물이 쏟아졌다. 처음에는 막막했
지만 그러한 것이 반복이 되다보니 요령이 생겨 여유있게 추스르게 되
었다. 웃지 못할 일들이 많이 있었지만 그런 중에서도 초등학교 여학생
의 친절은 내 마음을 따사롭게 해주었다. 그 아이는 「내 친구들」을
구독하는 교우집 딸이었다. 나를 멀리에서 보면 달려와 반갑게 인사하
였고, 우편물을 달라고 손을 내밀었다. 그렇게 만나는 사람들 속에서
더 좋은 것을 전해 주어야 한다는 것을 느꼈고, 보다 가치있는 삶을 살
아야 하겠다는 생각이 그 어느 때보다 굳어졌다.
성당에서 하는 출애굽기 성서공부는 충실하게 해 나갔다. 진도를 나
가면서 내 안에 있는 또 하나의 파라오가 있었음을 깨닫게 되었다. 자
신의 뜻을 굽히지 못하고 발악을 하는 나의 모습을 보게 된 것이다. 중
요한 일이 계획되고 실천에 옮기려고 할 때에는 성당에서 기도할 때에
체험했던 것이 가끔 떠오르곤 하였다. 93년도에는 청년 연합회 회장직
을 맡게 되었다. 내가 하기에는 무거운 직책이었고 부담스러운 자리였
지만 그전에 선배님들이 연합회 구성을 해 놓고 지탱해 나가기 어려워
서 유명무실하게 되고 자취도 없어져 버린 연합회가 다시는 되지 않게
하기 위해 어려워도 차근차근히 해 나갔다. 후배들이 잘 도와 주었고,
서로 협력해 나가는 모습이 보기 좋았다. 연합회의 일을 하면서 기억에
남는 것은 안양 지구 연합회에서 계획한 피정이었다. 대상은 9개 본당
청년들이었다. 그때 어떤 자매가 나에게 오더니 수사님이 아니냐고 하
면서 신앙 상담을 해 왔다. 나는 들어 주는 것을 좋아했기 때문에 자매
의 얘기를 들어 주었고 내가 아는 범위 내에서 얘기해 주었다. 그때 고
생했던 간부들은 지금 자리를 잘 잡고 열심히 살고 있고, 또한 기쁜 것
은 그렇게 단체활동을 하다가 지금은 결혼을 해서 행복하게 살아가는
한 쌍의 커플이 나온 것이었다. 매달 청년을 대상으로 해서 신앙강좌를
하는데 그때 성서공부 봉사자님의 섭외로 성 바오로딸 수도회의 체칠
리아 수녀님을 모시게 되었고 강의 후에 봉사자님은 저를 수녀님께 소
개시켜 주셨다. 그래서 전에 있었던 일을 얘기했더니 유 야고보 신부님
을 찾아가 뵈라고 말씀을 건네 주셨다. 봉사자님은 11월 정기총회를 통
해서 연합회 회장직을 넘겨 주고 나이도 꽉 찼으니 잘 생각해 보라고
말씀하셨다.
결정적으로 내 마음을 굳히게 했던 일이 집에서 일어났다. 여동생이
계속 나에게 짜증을 부리고 전에 없이 차갑게 대했다. 그래서 그 까닭
을 물어 보기로 작정을 하고 날을 잡았다. 여동생을 자리에 앉혀 놓고
차근차근히 물어 보았다. 그랬더니 "오빠는 나에게 있어서 고등학교 때
까지만 내 오빠였고 지금은 아닌 것 같아. 오빠가 이러고 있으니까 오
빠답지 않아. 오빠가 가고 싶은 길을 자신있게 결정했으면 좋겠어." 하
면서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어머니도 "더 이상 너의 방황하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다. 네가 가고 싶은 데로 가거라. 저 윗동네에 아기를 어
렵게 난 여자가 있는데 그 산모는 양수가 빠져 나오고 3시간만에 아기
가 나온 것을 가지고도 기적이라고 하더라. 너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닌
것을. 네가 이 세상에 나온 것만으로도 기적이고 너를 빼앗기고 싶지
않은데 하느님께서 쓰시겠다면 나도 하는 수 없구나."라고 말씀하셨다.
이 일이 있은 후에 내가 정리하고 처리할 부분들은 일사천리로 빠르게
진행되어 갔다. 그러고 난 후 야고보 신부님을 만나 뵈었더니 성소담당
신부님을 소개시켜 주셨고 나는 "제가 이 수도회에 입회하는데 결격사
유가 없다면 입회하고 싶습니다."라고 말씀드렸더니 몇 가지 질문을 하
시고 입회에 필요한 항목이 적힌 종이와 입회원서를 주셨고 한 달간의
여유를 주셨다.
내가 회사를 다니는 동안 여동생이 구비서류를 다 준비해 주었다. 본
당 신부님의 추천서를 부탁하러 갈 때에는 성서공부 봉사자님과 나에
게 전례부를 맡긴 친구 - 지금은 사제서품 준비를 하고 있을 친구 -
가 함께 가 주었다. 청년회 활동을 통해서 점수를 따 놓은 터라 쾌히
승낙하셨고 단숨에 써 주시고 나서 한 말씀을 해주셨다.
"지금 들어갈 때에는 너의 두 발로 들어가지만 나올 때는 너의 두발
로 나와서는 안 된다. 네가 나오게 될 때에는 수도회와 얘기가 다 되었
더라도 나에게 꼭 말 해주어야 한다. 내가 비록 미국에 있더라도 말이
다.열심히 살아라."말씀을 마치신 후에 내 손을 꼭 잡아 주셨다. 함께
온 친구도 반가워했다. 서류가 다 갖추어져서 신부님께 갖다 드렸더니
입회에 필요한 생필품이 적힌 종이를 주셨다. 집에 돌아와서는 회사에
사직서를 내고 2년 2개월 동안의 어찌보면 수도 생활 적응 훈련 코스
인 집배원 생활을 마감하면서 같은 조원 아저씨들과 업무 과장님과 환
송파티를 끝으로 마무리를 하였다. 업무 과장님은 여기에서 일한 것만
큼 어디에 가서든지 하면 열심히 살 수 있을 것이라고 하시며 잘 되기
를 바란다고 하셨다. 성당에서는 청년 연합회의 정기총회에서 내가 지
목하고 있던 후배가 새 연합 회장으로 선출이 되었다. 입회 허락이 떨
어지고 입회하는 날까지 새벽 미사를 드렸고 성당에 오고갈 때는 묵주
기도를 했다. 그 거리는 묵주기도 5단을 할 수 있는 거리였다. 내가 지
면을 통하여 나의 삶을 조금씩이나마 적어 본 것은 보잘것 없는 한 사
람이 어떻게 하느님의 사랑을 받아 왔는가를 보여 주고 나에게 베풀어
주신 하느님께 받은 은총에 대해 감사와 찬미와 영광을 드리기 위해서
이다.
팔자가 누워 있는 사람은 누구인가? 하느님께서 당신의 아드님을
보내 주심으로 해서 죄많은 인간들을 구해 주시어 당신과의 올바른 관
계를 갖게 하시고 성령에 힘입어 당신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
게 사랑을 베풀어 준 사람들이 아닌가 생각한다. 그 안에 이 보잘것 없
는 이 사람도 불러 주셨기에 스승이신 그리스도를 살고 세상 사람들에
게 전하는 도구가 되고 싶다. 그리고 지금까지 아니 앞으로 살아갈 시
간이 더 많은 나이지만 내 삶을 뒤돌아 보았을 때 사도 바오로가 말씀
하신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내 안에서 사시는 것
입니다."(갈라 2,20)라는 것을 깊이 깨달을 수 있었다.
"여러분은 나무랄 데 없는 순결한 사람이 되어 이 악하고 비뚤어진 세
상에서 하느님의 흠없는 자녀가 되어 하늘을 비추는 별들처럼 빛을 내
십시오."(필립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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