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뭐든지 잘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돌아가리라
작성자
한창현
작성일
2001-11-01 12:00
조회
3213
돌아가리라
이창항 세바스티아노 수사
한줄기 회오리 바람이 흩어져 있던 낙엽을 모아 놓고 사라져 가고 까
만 밤 하늘엔 유난히 별이 많다.
이런 밤이면 모든 사람들이 넉넉한 가슴을 가진 시인이 된다.
나는 희미한 스탠드 불빛 아래서 깊게 숨 한번 들이키고 오늘과 같았
던 그날의 밤을 생각한다. 그날 밤도 오늘처럼 조용하고 상쾌한 밤이었
다. 텅빈 사무실에서 혼자 책상에 앉아 모두 퇴근하고 큰 건물들만 자
리를 지키고 있는 공장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책상에 놓여진 월급 봉투를 열어 총 급여 ○○○, 공제액 ○○○, 실
수령액 ○○○. 이런 것들이 나의 인생에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
나의 땀, 노력, 힘, 젊음, 무엇보다 30일이라는 내 인생과 바꾼 이 숫
자들이 나에게 얼마나 큰 의미를 가져다 주는가?
결코 적고 많음을 따지는 건 아니다. 그러나 30일이란 내 인생과 바
꾸기엔 허무하고 무가치해 보였다. 이런 무가치한 것들과 내 인생을 바
꾸고 난후 나에게 남는 것은 무엇일까. 내 무덤을 채우고도 남을 만큼
의 종이 봉투 뿐…
그날 밤 이후 앞으로는 이런 것들만을 위해 내 인생을 바꾸지는 않으
리라. 아니 최소한 30일에서 단 며칠 만이라도 좀더 가치 있는 일로 바
꾸어 보기로 결심했다.
그리고 나는 성당을 찾아갔다. 오래간만에 (그 동안 나는 일명 '나이
롱 신자'로, 생각나면 주일을 지키는 그런 신자 생활을 했다.) 찾는 성
당이어서인지 왠지 서먹서먹함이 느껴졌다. 처음 성당을 찾아갔던 어린
시절의 그때처럼…. 오랜만에 찾는 성당이지만 늘 나에게 편안함을 주
는 곳으로 다가오는 것은 아마도 주님의 따뜻한 눈길이 있기 때문일
까...
그 후 그렇게 몇 개월을 보내고 1989년 6 월 어느 날 입대 영장을
받게 되었다. 얼마 전 뜻밖의 사고로 발목 수술을 하게 되었고 그로 인
해 단기 사병(방위병)으로 소집을 받았다.
신병 교육은 힘들기는 했지만 재미있었던 시간이었다. 그리고 교육을
마치고 가슴에 단 짝대기 한개가 그렇게 자랑스럽게 느껴 질 수가 없었
다. (비록 방위이지만….)
그렇게 1개월의 신병 훈련을 마친 나는 사령부로 자대 배치를 받았
다. 참으로 난감했다. 집에서 출·퇴근 하기엔 너무 먼 거리었기 때문
이였다. 하루에 다섯 시간 이상 차를 타야 했으니까…. 그러나 보직이
좋다는 그 이유 하나만으로 전근을 포기 했다. 나의 병역은 그렇게 시
작되었다.
그러던 어느날 자고 일어났는데 머리에 열이 나면서 감기 기운 같은
것이 느껴졌다. 그래서 감기려니 하고 감기약을 먹고 출근한 나는 며칠
을 감기약을 먹으면서 출근을 했는데 감기는 낫지는 않고 점점 더 심해
지는 것이었다. 그래서 토요일을 이용하여 동네 병원을 찾아갔다.
그런데 감기인 줄 알았는데 장티푸스 같다는 진단이 나왔다. 그래서
입원을 하라는 권유에 따라 부대에는 나중에 연락하기로 하고 입원을
했다.
그런데 그날 오후 의사선생님이 다시 오시더니 검사 결과를 다시 보
니 장티푸스가 아닌 것 같으니 우선 퇴원을 하고 주는 약을 먹고 구토
를 하게 되면 큰 병원에 가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주는 약을 먹고 집으
로 돌아왔는데 그날 밤에 나는 먹은 약을 토하면서 심하게 구토를 했
다. 나는 부모님 등에 업혀 택시를 타고 세브란스 응급실로 가게 되었
고 거기서 일주일을 누워 있었다.
부대에서는 내가 속해 있던 부관부 인사과 선임하사가 신자였던 관계
로 사정을 이해해 주시고 일주일이라는 휴가를 주셨다. 그렇게 일주일
을 쉬었지만 정확한 병명을 알 수 없었다. 열이 떨어지면서 백혈구 수
치가 떨어진다면서 퇴원해도 되겠다는 의사의 진단에 퇴원을 했고, 다
시 부대로 출근을 할 수 있게 되었다.
그 일이 있은 지 며칠 후 다시 옆구리가 결리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잠을 잘못 자서 그런 줄 알고 파스만 붙이고 있었는데, 옆구리는 점점
더 아프더니 척추 끝부분이 아파 오기 시작하여 앉아 있을 수 없을 정
도로 통증이 오기 시작했다. 그래서 다시 병원을 찾아갔는데 큰 병원으
로 가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다시 세브란스 병원 응급실로 가게 되었다. 큰 병원이라 병실
이 쉽게 생기질 않았다 우선 응급실에 가서 누워 있으면 쉽게 진찰을
받을 수가 있기 때문에 응급실로 갔다. 부대에서는 선임하사의 도움으
로 또다시 한 달이라는 휴가를 받게 되었다. (정확히 말하면 인사 비리
이다.) 정말 고마운 일이었다.
그런데 병원에서는 정확히 무슨 병인지 모르겠다는 것이다. 뇌에 이
상이 있는 것 같다면서 뇌 단층 촬영을 하자고 해서 했고, 군인이라는
이유로 생균성 무슨 병 같다면서 고대 병원에서만 할 수 있는 검사라면
서 피를 뽑아 보내기도 했다.
그러다 최종적으로는 콩팥에 염증이 생긴 것 같다면서 그냥 지켜 보
자는 것이었다. 그렇게 한 달을 병원에서 보내게 되었다. 그렇게 지내
는 동안 주님께 자주 이런 기도를 바쳤다. "주님! 저를 고쳐만 주소서.
퇴원하게 되면 다시 열심한 신자가 되겠습니다."라고.
하루하루 보내면서 다시 건강을 되찾게 되었고 마침내 퇴원을 하게
되었다. 물론 부대에도 다시 출근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성당을 찾아
가서 청년 레지오 단체에 가입을 했다.(사실 학창시절에는 열심한 레지
오 단원이었다.) 바로 옛 기억을 더듬어 다시 찾아갔던 것이다.
이것이 나의 성소의 시작인 것 같다. 그렇게 다시 시작한 나의 신앙
생활은 얼마 지나지 않아 또 다른 부르심을 받게 되었다.
그 주에도 회합을 하기 위해 성당을 찾아갔는데 마침 주일학교 교사
회합을 마치고 나가는 교감이란 직책을 맡고 있던 자매님을 만나게 되
었다. 그 자매님이 나를 본 순간 나에게 주일학교 교사 해볼 생각 없느
냐고 제의를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나는 선뜻 승낙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군인 신분이었고 또한 병원에서 퇴원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상태였으므로 건강도 자신이 없었다. 그리고 교사라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라 토요일, 주일은 꼬박 성당에서 살다시피 해야 하는 일이 아니던
가….
어머니는 강력히 반대를 하셨다. 그러나 왠지 해봐야겠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우선 내가 하느님에 대해 알고 싶었고, 또 꼭 해야겠다
는 사명감 같은 것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부모님께는 건강이 허락
하는 데까지만 하겠다고 하고 주일학교 교사단에 들어갔다.
정말 바쁘게 시간이 지나갔다. 매주 목요일이면 퇴근하자마자 성당으
로 가서 교사회합에 참석하고 토요일, 주일은 거의 성당에서 살다시피
했다. 그리고 그 다음 날 새벽 5시면 부대로 출근했다. 지금 생각하면
어떻게 그렇게 했는지 모르겠다. 나에게는 가장 큰 은총의 시간이었다.
그러면서 나는 점점 신앙에 대해 눈을 뜨기 시작했고 기도생활에도
전념하며 지냈다. 출·퇴근하는 버스 안에서 나는 늘 묵주기도와 성서
를 읽었다. 어떤 날은 하루에 묵주기도를 100단도 해본 적이 있었다.
아마도 그때의 기도의 힘으로 아직까지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던 어느날 나에게 이상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것은 바로 건강이었다. 평소 같았으면 벌써 몇 번은 누워 있어야 했
는데 감기 한 번 걸리지 않을 정도로 건강해진 것이다. 나는 주님께서
당신의 도구로 쓰기 위해서는 건강의 은총을 허락하심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인지 건강 문제만큼은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 물론 남보다 월등
히 건강하지는 않지만….
그렇게 나는 군생활 동안 주일학교 교사 활동을 하면서 신앙에 대해
점점 눈을 뜨게 되었고, 내가 전에 생각했던 가치 있는 삶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교구사제가 되어 볼까 생각도 해보았지만 왠지 그것
은 싫었다. 사제가 되는 것 말고 다른 것이 없을까 하고 생각해 보았지
만 생각이 나지 않았다. 그때는 수도자라는 신분에 대해서는 알지도 못
한 상태였기 때문이다. 다른 길을 생각해 보기로 했다. 어디 봉사직이
라도….
드디어 1년 6 개월의 군생활을 마치고 나는 다시 수원으로 복직을
하게 되었다. 물론 교사활동은 더 열심히 할 수 있었다. 그리고 점점
성당일에 빠져들었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귀가 시간은 점점 늦어졌
다. 정말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열심히 봉사했다.
한쪽에 너무 열중해 있다 보니 자연히 집안일에는 소홀히 하게 되었
다. 하루는 어머니께서 굉장히 화가 나셨는지 그날도 늦게 들어오는 나
에게 "집은 여인숙이 아니니깐 나가라."고 하시는 것이었다. 어머니가
화를 내시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자식이라는 게 주중에는 수원에서
살다가 주일이라고 집에 오면 성당에서 종일 살다가 밤늦게 들어와 잠
만 자고 그 다음 날엔 수원으로 가버리곤 했으니까.
어머니께는 죄송했지만 성당일에 열심히 매달렸다. 마치 하고 싶었던
일을 하는 사람처럼 아주 열정적으로….
그러던 어느 날 나에게 또 다른 부르심을 주셨다. 그것은 나와 함께
근무하던 형이 수도원이라는 곳을 입회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나는 수
도원이란 곳이 어떤 곳인가, 또 어떤 사람이 수도원이란 곳을 들어가나
하고 궁금해서 그 형을 찾아갔다.
그 형을 보는 순간 그 충격! 그 형은 아주 맑은 눈을 가졌으며 온몸
에서 선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또 말 한마디 한마디가 그렇게 겸
손할 수가 없었다. 형으로부터 수도원이 무엇하는 곳이며 수사라는 신
분이 어떤 것인지 듣게 되었다. 그때 '바로 이거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이후 그 형을 따라 수도원을 방문하게 되었다.
그곳은 수원에 있는 마리스타 교육 수사회였다. 엄숙한 분위기…. 나
같은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 사는 모습이 굉장히 신기해 보였다. 한편
으로는 수도생활에 동경이 생기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의 삶에 대해 다
시금 생각해 보기로 했다. 기도하면서… .
나의 인생을 어떤 가치 있는 것과 바꿀 것인가.
그때 수도자가 되어야 겠다고 결심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었다. 바로 부모님 이었다. 과연 부모
님의 곁을 떠나 살 수 있을까? 거의 부모님과 떠나 본 적이 없던 나
인데….
특히 어머니가 마음에 걸렸다. 우리 어머니는 나 하나만을 의지하면
서 사셨기 때문이다. 물론 동생도 있지만 어머니는 내가 더 의지가 되
셨나 보다. 나도 어머니를 무척이나 사랑했다. 아니 지금도 사랑한다.
어머니 어머니! 이름만 들어도 가슴이 미어지는 이름이다. 모든 어머
니가 그러하겠지만 특히 우리 어머니는 고생을 너무 많이 하셨다. 어머
니는 대전의 부유한 집안의 외동딸로 태어나셔서 고생이라고는 해본 적
이 없는 분이었다.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는 아버지를 만나 진실하다는
것 하나만 믿고 시집 온 분이셨다. 물론 집안에 특히 외가집의 반대가
매우 심했다. 그래서 어머니는 외가집에는 가실 수가 없었다. 하지만
어머니는 아버지 한 분만 믿고 사셨다.
내가 초등학교를 졸업하던 해 아버지께서 운영하시던 공장이 문을 닫
고 어음 부도로 아버지는 유치장에 들어가시게 되셨다. 갑작스럽게 당
하는 집안의 몰락은 우리를 당황하게 만들었다.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막막했다. 어머니는 집안 살림과 아버지의 변호사 비용을 마련하시기
위해 친구분이 운영하시는 가게에 나가시게 되었다. 어머니는 아침 일
찍 출근하셨고 밤늦게 돌아오셨다. 그런 어머니를 돕기 위해 나는 신문
배달을 시작했다.
이런 생활의 변화는 나에게는 감당하기 힘든 일이었다. 집안일을 도
우면서 낮엔 신문을 배달했고, 집에 돌아와서는 청소며 동생을 돌봐 주
어야만 했고, 가끔 빚을 받으러 오는 아저씨들에게 시달리기도 했다.
어떤 아저씨는 나에게 욕을 하기도 했다. 주저앉아 울고 싶었다. 그러
나 그럴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어머니 때문에….
어머니는 나보다 더한 수모를 당하셨기 때문이었다. 빚을 받으러 온
아줌마에게 길거리에서 머리채를 잡히고 매도 맞으셨기 때문이다. 나는
강한 모습을 보여 드리기 위해 우시는 어머니에게 휴지를 건네 드리면
서도 울지 않았다. 그때 처음으로 죽고 싶다고 생각을 했다. 너무 견디
기 힘들었기 때문에…. 이럴 때 형이라도 있었으면 의지가 될 텐데….
그렇게 몇 개월이 지난 뒤 아버지는 석방이 되셨고 우리는 대전으로
이사를 갔다. 왜 대전으로 이사를 갔는지 나는 잘 모른다. 하지만 무엇
엔가 쫓기는 기분을 느꼈다. 우리는 대전에 사시는 외할머니집에 얹혀
살았다. 대전에서 2 년 정도 산 우리는 서울로 상경을 했다.
아버지는 다시 조그만 사업을 하시기로 했다. 그러나 그것도 뜻대로
되지 않아서 우리는 다시 어려운 형편이 되었다. 우리는 집을 팔아서
상계동 지하실 방으로 이사를 했고 점점 어려워지는 집안 형편으로 나
는 인문고 진학을 포기하고 실업학교에 진학을 해야했다. 하루 빨리 취
업해서 어머니를 돕겠다는 생각이었다.
우리는 그 당시 거의 수입이 없었다. 그런데 주위 분들이 도와 주시
고 친척 누나들이 우리를 도와 주셨다. 지하실 방은 비만 오면 비가 하
수도를 통해 역류해서 집안 가득히 물이 새어 들어왔다. 어머니는 나를
붙들고 한참을 우신 적도 있었다. 우시는 어머니를 보고 따라 운 적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아버지는 새로운 장사를 하시겠다고 몇 달째 집에
들어오시지 않은 적도 있었다. 그렇게 어려운 생활을 하면서도 어머니
는 주택청약 예금을 열심히 붓고 계셨다.
우리는 어머니께서 부으신 예금 덕으로 원당에 있는 임대 아파트로
이사할 수 있었다. 15평의 조그만 아파트, 큰 집에 살던 우리가 15평
에 그것도 임대로 살게 된 것이다. 아파트로 이사하던 날 어머니는 내
내 우셨다. 지하실 방에서의 서러움. 또 어떻게 될지 모를 불안한 운명
때문일까.
원당으로 이사한 우리는 조금씩 형편이 나아지기 시작했다. 나는 학
교를 졸업하고 삼성에 입사를 하게 되었고, 아버지도 조그만 가게를 시
작하게 되었다. 물론 남의 가게였지만 어머니는 사촌 누나가 하는 가게
에 나가 일을 하셨다. 동생도 진학을 포기하고 실업학교에 진학을 했고
역시 취업을 해서 살림에 많은 도움을 줄 수 있게 되었다. 어머니는 열
심히 예금을 하셨다.
동생과 나는 우리에게 주어진 일들을 운명으로 받아들이고 나중에 형
편이 더 나아지면 대학에 진학하기로 했다. 공부는 계속하고 싶었기 때
문이다. 그러나 그것 또한 뜻대로 되지 않았다. 하지만 우리는 열심히
살았다. 그렇게 형편은 조금씩 나아져 갔다. 지금 말로는 다 할 수 없
을 만큼 어머니는 고생을 많이 하셨다.
그리고 내가 발목 골절로 수술실에 들어갔을 때 제일 먼저 생각났던
것도 어머니였다. 3 시간이란 수술 후에 나의 눈에 처음으로 들어 온
것은 바로 너무 우셔서 눈이 부어 있던 어머니의 얼굴이었다.
그런 어머니 곁을 떠나 살 수 있을까…. 꼭 그것이 어머니를 배신하
는 것 같아서 내 마음은 괴로웠다.
그러나 자주 수도원을 방문했고 기도하고 또 성당생활도 열심히 하면
서 때를 기다렸다. 아마도 때가 되면 하느님께서 용기을 주시리라 믿으
면서….
그렇게 나에게 도움을 주시던 형은 수도원에 입회를 하여 지금은 첫
서원을 하고 필리핀에서 공부를 하고 계신다. 그렇게 2 년을 보낸 나는
이제는 더 이상 지체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성서에서 예리고의
맹인이, 예수님이 지나가신다는 소식을 듣고 자기 옷을 벗어버리고 그
분의 부르심에 응답한 것처럼 나도 그렇게 응답해야겠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하느님께, 어머니께 말씀드릴 수 있도록 용기를 달
라고 청했다.
어느 날 어머니께 수도원에 입회하고 싶다고 말씀을 드렸다. 그랬더
니 어머니는 선뜻 허락해 주셨다. 아마도 어머니는 내가 괜히 하는 얘
기인 줄 아셨나 보다. 그래서 내가 살 집을 찾기 시작했다. 내가 다니
던 마리스타 교육 수사회도 생각해 보고 한국 복자 수도회도 가 보았
다. 본당 수녀님은 내가 어린이들을 좋아하는 것을 아시고는 살레시오
를 가 보라고 했다. 그런데 나는 점점 어려움에 빠지기 시작했다. 과연
내가 살아야 할 집은 어디인가?
그때 나에게 도움을 줄 누나가 나타났다. 그 누나는 숙대 독문학과
조교로 있던 누나였는데 예수의 작은 자매회에 입회하기로 되어 있었
다. 그 누나는 나에게 이런 말을 해주었다. "나의 마음 속에 있는 예수
님의 모습을 찾아보라고… 그리고 그 모습을 가장 효과적으로 전할 수
있는 수도회를 선택하라고…" 그래서 내 안에 계신 예수님의 모습을 찾
기 위해 며칠을 열심히 기도하며 나 자신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그때 내 안에 계신 예수님의 모습을 찾았다. 내 안에 계신 예수님은
"무거운 짐진자 나에게로 오너라. 내가 너를 쉬게 하리라"고 하시는 위
로자의 모습이셨다. 그래서 그 모습을 가장 효과적인 방법으로 전할 수
있는 수도원을 찾기 시작했다.
그때 성바오로 수도원을 알게 되었다. 매스컴을 이용한 사도직, 특히
나는 미디어 사도직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음악이란 매체를 통해 모든
사람에게 그리스도의 위안과 평화를 전해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수도원을 다시 방문하여 상담을 했다. 그러나 생각했던 것보
다 훨씬 바빠 보였고 생각했던 그런 수도원의 모습은 아니였다. 망설이
기 시작했다. 어떻게 해야 할까….
생활체험을 하기로 결심하고 수도원을 다시 방문해서 3박 4일을 수
사님들과 같이 보냈다. 그러나 공교롭게도 추석 연휴였기 때문에 수도
원에 지내면서 아주 편하게 쉬고 돌아가야만 했다. 체험다운 체험을 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수도원에서 하는 사도직을 머릿속에 두고
내내 생각하기로 했다.
나는 더 이상 지체할 수 없음을 느꼈고 어머니와 상의한 후 다니던
회사를 정리하고 다시 생활 체험에 들어갔다. 어머니는 체험을 하고 나
면 입회하겠다는 생각이 없어질 줄 알고 계셨나 보다.
그러나 나는 20일 넘는 체험을 통해 수도원에서 일어나는 인간적인
모습도 보고 사도직을 하는 모습을 보면서 나의 성소를 더욱 굳게 결심
하게 되었다. 그리고 주님께서 나를 여기에 보내 주신 이유를 알 것 같
았다. 나는 내 안에 계신 위로자의 예수님을 매스컴을 통해 세상에 전
하고 또한 수사님들의 조그만 위로자가 되기 위해서 이곳으로 보내 주
셨다는 것을… 어쩌면 우스운 생각이겠지만 나의 조금만 재주가 사도직
으로 힘들어하시는 수사님들을 위로해 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렇게 결심을 하고 부모님께 최종 허락을 받기 위해 나의 생활체험
이야기, 나의 느낌 등을 말씀드렸다. 그랬더니 이전까지 굉장히 긍정적
이셨던 분들이 갑자기 반대를 하시는 것이었다. 아마도 부모님들은 내
가 포기하기를 바라고 계셨던 것 같다. 그러나 완고하게 나의 길을 가
겠다고 말씀드렸고 부모님은 절대 반대를 하셨다. 내 힘으로는 부모님
을 설득시킬 수 없음을 느꼈지만, 나의 완고한 태도에 부모님은 마지못
해 허락을 해주셨다. 이 일로 아버지는 생전 보이지도 않으시던 눈물도
보이셨다. 그러나 나는 강하게 보이려고 눈물을 보이지 않았다. 그 후
나는 내가 부모님을 떠나겠다고 생각한 자체로도 나에게는 수도 성소가
있다고 확신하게 되었다.
어렵게 부모님의 허락을 받은 나는 본당 신부님의 추천을 받는 일만
남았다. 나는 매일 성당에 나가 성당 사무실 일을 도와드리면서 나의
성소에 대해 신부님과 상의하기 시작했다. 신부님도 긍정적으로 생각해
주셨다. 그래서 나는 아주 편한 마음으로 나의 입회날을 기다렸다. 주
위의 사람들은 나의 성소에 대해 이해하지 못했다. 왜 하필이면 수사냐
며 교구 사제가 더 좋지 않느냐고… 그러나 나는 나의 뜻을 분명히 말
씀드렸고 이런 나를 주위에서도 이해해 주기 시작했다. 모든 것이 순조
롭게 되어 가는 듯했다.
시간이 흘러 입회를 일주일 남겨 놓은 상태였다. 그런데 그때까지도
본당 신부님은 추천서를 주시지 않는 것이었다. 그래서 신부님에게 추
천서를 써 달라고 말씀드렸다. 그랬더니 이게 왠 날벼락인가. 두 달이
넘게 말씀드렸고 긍정적으로 보이셨던 태도는 어디가고 추천서를 못 써
주시겠다는 것이었다. 눈앞이 깜깜해짐을 느꼈다. 나에게 수도 성소가
보이질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때의 그 배신감! 입회를 일주일 남겨 놓
은 상태에서 그전부터 그렇게 생각하고 계셨다면 미리 얘기해 줄 수 있
는 문제가 아니겠는가. 너무 서운했고 배신감마저 들었다. 그날 술을
잔뜩 먹고 한참을 울었다. 그리고 그 다음 날 신부님을 찾아가서 고해
를 하면서 나는 당신을 미워한다고 말씀드렸다. 그래도 신부님은 상관
이 없다는 식으로 얘기를 하셨다. 수도원에 전화를 했다. 펠릭스 신부
님께 나의 사정얘기를 해드렸더니 신부님께서는 "너라면 내가 추천해
줄테니 걱정하지 말고 입회하라."고 하셨다. 얼마나 감사했던지 나를 믿
어 주시는 분이 있구나 하는 생각에 든든함도 느껴졌다.
그렇게 나는 부모님과 형제들을 두고 어렵게 수도원에 입회를 했다.
입회하던 날 울었다. 그 동안에 힘들었던 일들이 생각이 나서…
그러나 나의 성소의 길은 이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수도원에 입회하
고 나니 내가 생각하지 못했던 것들이 현실로 다가왔다.
우선 진로의 결정 문제였다. 나는 위로자이신 예수님을 전해야 했고
또 수사님들의 위로자가 되고 싶었다. 그런데 그 방법을 찾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어느 날 어느 수사님을 통해 이런 얘기를 들었다. "자기는
성체를 모실 때 가장 큰 위로를 얻는다고." 바로 그것이었다. 진정한 위
로는 그리스도로부터 오는 것이었고 그 위로는 사제의 손을 통해 이루
어진다는 것을… 나에 의해 축성되는 성체 내 손으로 쪼개 주는 성체를
통해 모든 이들이 위로를 얻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고해성사를 통해 영
적 위로를 얻는 것이다. 그래서 수도사제가 되기로 결심을 하고 다시
기도하기 시작했다. 나의 선택이 올바른 것이 되기를…
결코 사제가 특별한 신분이라고 생각한 적이 없다. 우리는 어차피 수
도자이고 단지 성무집행을 하는 수도자라고 생각했다. 그 직분이 나를
높여 준다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 신분을 통해 어떤 명예나 인정을
받고 싶은 생각이 있었다면 아마도 교구사제를 선택했을 것이다. 나의
이런 생각을 신부님과 상의를 했고 수도회의 허락을 받았다.
그러나 모든 것이 순조롭지는 않았다. 우선 시험과목에서 어려움이
있었다. 학교를 졸업한 지 7년이나 지났고 시험과목의 대부분이 들어
보지도 못한 과목뿐이었다. 그러나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하고 열심히
했다.
그러나 그것보다 나를 더 힘들게 했던 것은 수도원에서 들리는 소문
때문이었다. 나의 진로 변경이 수사님들의 권위를 실추 시켰다는 것이
다. 수사님들의 이런 오해는 내게는 큰 부담으로 다가왔다. 정말 그런
이유는 조금도 없었는데, 단지 수도회와 수사님들에게 봉사하겠다는 생
각뿐이었는데…. 정말 힘이 들었다. 괜히 수사님들이 지나갈 때마다 눈
치를 보게 되었다. 그러면서도 언젠가는 이해해 주실 것이라고 생각하
면서 열심히 공부했다. 낮에는 사도직하고 밤에 늦게까지 공부했다. 하
루 3시간 이상 자본 적이 없었다. 그렇게 어렵게 공부했다.
드디어 시험날, 결과는 만족스럽지 못했고 결국 그 해는 진학을 포기해
야만 했다. 그 실망감을 어찌할 수가 없었다. 이제 어떻게 되는 것인가.
이렇게 수도회를 떠나야 하는가. 그러나 수도회에서는 나에게 기회를
다시 주셨다. 그래서 밖에 나가서 공부하기로 하고 수도원을 떠났다.
떠나던 그날 나는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영영 다시는 돌아오지 못
할 것 같은 불안감. 수사님들의 오해. 나에 대한 좋지 못한 시선 등 때
문이었다. 그러나 꼭 돌아오리라고 다짐을 했다.
우선 독서실에 아르바이트를 구했다. 낮에는 학원에 다니고 저녁에는
독서실에서 공부하면서 관리를 하기로 한 것이다. 이런 생활을 며칠 하
고 있는데 수도원에서 전화가 왔다. 수도원에서 나의 이런 사정을 알고
도와 주시겠다는 것이었다. 나는 선뜻 결정할 수가 없었다. 공부할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신 것만해도 감사드릴 일인데 경제적인 부담까지 드리
고 싶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수도원에서 특히 마지아 수사님의
설득으로 나는 수도원의 도움을 받기로 하고 수원 공동체로 내려 갔다.
그 당시 공동체는 아주 어려운 상황이었다. 가건물에 방도 부족하여
한 방에서 여러 명이 자야만 했다. 그러나 나에게는 특별히 조그마한
방을 주셨다. 그래서 혼자 공부할 수가있었다. 학원은 수원에 있는 학
원을 다니기로 했는데, 지도 수준이 맘에 들지 않아 어렵지만 서울로
통학하기로 했다.
아침 일찍 기도를 하고 나와 노량진에 있는 학원을 다녔고, 도시락을
싸가지고 다녔다. 장시간의 통학은 너무 힘든 일이었다. 그리고 좁은
강의실에는 너무 많은 학생이 있어서 제대로 앉아 있기도 불편했으며
날씨는 유난히 더웠다. 나의 체력은 점점 떨어져 식사도 제대로 할 수
없는 지경이 되었고 차만 타면 멀미를 했다. 그러나 공동체에 돌아와서
는 밝은 표정을 보이려고 무척이나 애를 썼다. 신부님이나 수사님들은
나에게 너무나도 잘해 주셨다. 마지아 수사님은 몰래 용돈도 집어 주셨
다. 그러나 이런 사랑에도 불구하고 나는 눈치밥을 먹어야 했다. (누구
하나 눈치 주는 사람도 없었는데도….) 그리고 이번에 실패하면 퇴회해
야 한다는 심적 부담이 나를 더 힘들게 했다. 어쩌다 본원에 오면 반갑
게 맞아 주는 사람 하나 없었다. 어떨 때는 그 냉랭한 분위기 때문에
이방인이 되어 버린 것 같은 착각에 빠지기도 했다.
그러나 그럴 때마다 이렇게 결심했다. 꼭 돌아오리라!. 누구 하나 반
겨 주는 사람 없지만 이곳은 나의 집이기에 꼭 돌아와야만 한다. 내가
살아야 할 집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도 내가 돌아와야 할 이유는 충분
하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나의 선택이 어떤 인간적인 욕심에서 이루어
진 것이 아님을 보여 주기 위해서라도 열심히 공부했다.
역시 나의 선택이 옳았는지 그 해 수원 신학교에 들어갈 수 있었고 나
의 성소를 지킬 수 있었다. 이제 나의 원의를 지키며 열심히 사는
일만 나에게 남았다. 내가 가졌던 원의를 순수하게 지켜나가면서 지금
의 내가 있기까지 나를 이끌어 주신 하느님께 감사드리며 부모님, 수도
원의 모든 어른들, 수사님들께 감사드린다. 그리고 열심히 밝게 살아보
리라 결심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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