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뭐든지 잘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쟁기를 잡고 뒤를 ....
"쟁기를 잡고 뒤를 자꾸 돌아다 보는 사람은 하느님
나라에 들어 갈 자격이 없다."(루가 9, 62)
조용준 니콜라오 수사
사랑하는 하느님의 친구분들에게
지금부터 한 형제의 삶을 다시 돌이켜 볼 것입니다. 이는 그의 삶을 통해서 하느님의 자비가 얼마나 넓고 높고 크신지 깨달아 하느님의 섭리를 다시 한번 느껴보고자 하는 것입니다. 많은 이들이 하느님의 부르심을 깨달아 미리 보고 마련하신 천상 잔치의 초대에 응답하게 하고자 합니다.
평범한 서울 사람
1972년 6월 어느 날, 그는 서울 청량리 근처 홍릉이라고 불리는 서울치고는 조용하고 소박한 동네에서 태어났습니다. 홍릉이라는 곳은 지역이름에서 풍기는 인상과 같이 왕릉이 있는 곳이며 수목원이 위치해서 공기가 좋고 이웃간의 친분도 두터운 서민들이 사는 동네입니다. 다른 이웃과 마찬가지로 그의 부모님들도 이곳에서 살다가 다른 곳으로 이사가기가 싫을 정도로 동네에 대한 좋은 인상을 지니고 있는 곳이기도 합니다. 그는 이곳에서 20여 년 이상을 보내게 됩니다. 비록 잦은 이사는 있었지만 그 동네 안에서의 이사여서 그곳을 벗어나 본적은 없습니다.
그가 장남으로 태어났을 때 부모님은 물론이요 많은 친척들은 기뻐했고 많은 기대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는 이상하게도 그의 어린 시절을 자세하게 기억하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그저 어렸을 때 친구들과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놀던 생각들, 크게 다쳤던 기억, 친척집에서 놀러가서 며칠 지내다가 온 것 등 몇 가지 추억만을 가지고 있을 뿐입니다. 아무튼 이곳저곳 많이 돌아다니며 놀기를 좋아하는 그런 아이였던 것은 틀림이 없습니다. 그에게 부모님이 많은 기대를 가지게 된 사건이 있었습니다. 6-7살 때인가 그때까지 시계를 보는 방법을 모르던 그가 어느 날, 지금 몇 시 몇 분이라고 시계를 보면서 얘기를 한 것입니다. 주변에서 누가 가르쳐 준 적도 없었는데 시계 보는 방법을 스스로 배웠던 것입니다. 주변의 이웃들은 "개천에서 용났다."하면서 아마도 커서 큰 인물이 되리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그는 어릴 때부터 기계에 대한 관심이 많아서 발명가들의 얘기에 나올법 한 일들을 자주 했습니다. 시계 분해하기(비록 다시 조립은 못하지만)부터 TV 브라운관 조정하기를 시작해서 주변에 보이는 기계들에 대한 끝없는 관심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초등학교에 입학하다
이렇게 하루, 1주일, 1달, 1년 시간은 계속 흘러 그도 국민학교(지금의 초등학교)에 진학하게 되었습니다. 외숙모가 사 준 가방을 껴안고 학교에 갈 날만 기다리며 그렇게 좋아했다고 합니다. 1979년 3월, 그는 홍릉 초등학교에 입학했습니다. 가슴에 손수건과 이름표를 달고 줄을 서서 조회를 하던 기억이 있습니다. 아마도 배움의 기쁨이라고 할까 그것이 좋았나 봅니다. 자신에 대해 그가 초등학교에 들어가서 알게 된 것은 자신이 남들보다 글씨나 그림 그리는 것을 잘 못 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에다가 운동신경까지 뛰어나지를 못해서 남들과 하는 모든 운동에서 이겨보지 못했습니다. 이런 그가 유일하게 잘하는 운동은 달리기와 줄넘기였습니다. 그 당시 남들보다 발육상태가 빨라서 덩치가 컸던 그는 줄넘기와 달리기 할 때는 반 대표가 되어 나갈 정도였습니다.
중학교를 진학하면서
6년간의 초등학교 시절을 보내고 어느덧 중학생이 되었습니다. 그는 제기동에 위치한 성일중학교를 다니게 되었습니다. 중학교 시절 그에게 나타난 가장 큰 변화는 천주교를 알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초등학교 시절 불교, 무당, 철학관, 교회를 전전하면서 제대로 된 종교를 갖지 못했던 그가 천주교 신자가 된 것입니다. 옆집에 천주교를 독실하게 믿는 구교 집안 가족들이 살고 있었습니다. 한 살 위인 옆집 형과 같이 잘 지내다가 중학교 1학년 여름방학 때 "집에만 있지말고 성당에서 하는 캠프에 같이 가자."는 옆집 가족들의 권유를 받은 그의 부모님은 그를 주일학교 여름캠프에 보냅니다. 3박 4일의 시간들을 재미있게 보낸 것은 물론이요, 그때부터 청량리 성당의 주일미사에 나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몇 주 후 중고등학생 예비자 교리반에 등록하고 예비자 교리를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사실 그때까지 천주교가 무엇인지 제대로 알지 못하고 있었고 거기다가 뚜렷한 종교관이 없었기 때문에 천주교의 의식과 용어들이 처음에는 생소하게 느껴졌었습니다. 예비자 교리를 하면서 많은 것들을 배우게 됩니다. 1985년 12월, 그는 '니콜라오'라는 세례명으로 영세를 받게 되었습니다. 천주교 신자였던 이모님의 도움으로 이때 그의 어머니도 '실비아'라는 세례명으로 영세를 같이 받게 되셨습니다. 다른 영세자들은 대부분 다른 사람에게 세례명을 어떻게 정할지 물어보고 추천해 주는 이름을 사용했지만 그는 초등학교 시절 어린이 잡지에서 보았던 산타클로스를 생각해 내고, 그 분이 '니콜라오'라는 것을 알고는 스스로 '니콜라오'라고 정했다고 합니다. 그의 동생들도 이듬해에 '엘리사벳'과 '토마스 아퀴나스'라는 이름으로 영세를 받게 됩니다.
그 시절부터 그는 학교와 성당만 왔다갔다하는 그런 중학생이 되었습니다. 여름에는 캠프를 가고 겨울이 되면 장미제라는 학생들 발표회를 준비하고 발표하는데 시간을 많이 보내게 됩니다.
이 당시는 사회적으로 매우 혼란하던 시기였습니다. 노태우씨의 6 . 29선언, 연일 계속되는 시위로 민주주의의 싹이 트기 시작했던 때였습니다. 많은 것을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성당에서 듣게 되는 많은 얘기 속에서 군사정권에 의한 인권말살과 민주주의의 발전저해, 5 . 18 광주민주화 운동 등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때부터 현 정치인들과 정부에 대한 반감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반감은 중학교 2학년시절 '평화의 댐 모금 운동' 때 들어나게 됩니다. 이 당시 매스컴에서는 연일 금강산 댐의 위험성을 경고했습니다. 63빌딩의 모습이 비치면서 그 댐을 폭파하면 63빌딩의 20층까지 물이 찰 것이라며 우리나라에서 평화의 댐을 지어서 이것을 막아야 한다며 국민들의 모금운동을 시작했습니다. 그는 이러한 매스컴의 말을 믿지 않았습니다. 학교에서 개인당 500원씩의 모금을 반강제로 했을 때 돈을 내지 않고 버텼습니다. 학생부 앞에 끌려가 복도에 서 있는 벌을 서기도 했지만 자기의 주장이 맞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끝까지 돈을 내지 않았습니다.
중학교 시절에는 학교에서 단축수업을 하고 단체로 반공운동 대회나 대통령 외국순방 때 거리에 나가 태극기를 흔드는 일을 몇 차례 했었습니다. 단축수업을 하면서 왜 이런 일에 동원이 되어야 하는지 의문이 가시질 않았습니다.
또 하나 그가 새롭게 바라볼 수 있던 것이 있었습니다. 중학교 1학년 시절, 그는 특별활동으로 컴퓨터 반에 들어가게 됩니다. 컴퓨터가 흔하게 있지 않았던 시절 학교에 몇 대 없던 컴퓨터를 보고 작동해 보면서 굉장한 흥미를 느끼던 것은 물론 컴퓨터를 가지는게 소원이었습니다. 컴퓨터 반에서는 매주 베이직 프로그램을 숙제로 내주었습니다. 예를 들어 "1부터 10까지 더하는 식을 만들어 보아라", "1부터 10까지의 수를 피라미드형태로 출력해보아라" 이런 식의 숙제였습니다. 지금 같으면 별 의미도 없을 것 같은 프로그래밍을 하면서 그 시간들이 마냥 즐거웠었습니다. 부모님들은 당시 컴퓨터를 사 줄 여유도 없으셨기에 중학교 2학년 특별활동으로 컴퓨터 반에 들어가지 못하게 되면서 그 관심은 사라지는 듯 보였습니다.
중학교 3학년이 되자 그도 다른 사람과 마찬가지로 입시라는 전쟁을 치루게 되었습니다. 인문계 고등학교를 진학할 것인지 아니면 공업, 상업 고등학교를 진학할지는 그 당시 대부분 성적으로 판가름되었기 때문에 200점 만점에 최소한 몇 점 이상을 얻어야 된다는 식의 잔소리를 늘상 듣게 되었습니다. 초등학교 시절부터 의무감으로 숙제하는 것 외에 예습, 복습을 한다는 것을 끔찍이도 싫어하던 그도 어쩔 수 없이 당장 눈앞에 닥친 시험을 준비했고 별 어려움 없이 인문계 고등학교를 진학하게 되었습니다.
고등학교 합격발표를 듣고 그가 새롭게 시작할 수 있던 것은 기타를 치는 것이었습니다. 성당 선배형의 도움으로 매일 친구들과 함께 기타를 배웠습니다. 칼립소라는 주법부터 시작해서 C, Am, Dm, G7이라는 생소한 코드도 알게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이 4개의 코드와 칼립소라는 주법만을 가지고 거의 일주일 이상을 연습했습니다. 그리고 조금 숙달이 되자 '바위섬'이라는 노래를 가지고 노래의 처음부터 끝까지 제대로 될 때까지 계속 연습했습니다. 손가락은 아프고 아무리 연습해도 박자와 코드 잡는 것이 잘 안 되고…. 그 당시 조금이나마 악기에 대해 알 수 있었던 것은 많은 연습만이 악기를 사용할 줄 알게 하고, 결국에 가서 훌륭한 연주가를 만든다는 것입니다. 이때부터 배웠던 '기타'라는 것이 나중에 그에게 많은 체험을 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주면서 노래에 대한 관심까지 가지게 했습니다.
고등학교에 들어가다
88년 3월, 길음동에 위치한 서라벌 고등학교에 입학했습니다. 중학교와 사뭇 다른 분위기(입시와 경쟁의식)를 느끼면서 교복을 입게 되었습니다. 말이 교복이지 패션 감각이 전혀 없는 사람이 선택했는지 살색 바지에 밤색 마이를 입고 3년이라는 시간을 보내게 되었습니다. 고등학교 1학년 때 성당에서 그는 학생회 부회장이 되어 활동하게 되었습니다. 그 자신은 왜 자기가 부회장이 되었는지를 모르고 있었지만 사실 중학교 3학년 시절 학생미사 전에 있던 『복음 묵상 모임』에 꾸준히 나오는 것을 본 선배들이 그를 부회장으로 점찍었다는 것은 나중에나 알게 됩니다. 또 다른 시작은 '하늘의 문 Pr.'이라는 학생 레지오의 단원으로 입단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비록 아직까지 남을 위해서 봉사한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모르고 있었지만 자신에게 주어지는 병원방문, 신자방문, 주보접기 등의 활동을 하면서 많은 것을 깨달을 수 있던 기회가 되었습니다. 학생 레지오의 주회를 하다보면 '활동보고'라는 것이 있는데 이때 단순히 활동보고만을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학교에서, 집에서, 성당에서 했던 활동과 느낌을 나눔으로써 서로의 고민과 어려움을 함께 나눌 수 있는 시간으로 채워졌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의 삶 안에서 많은 가능성과 의미를 부여했던 활동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는 하나'라는 노래모임이었습니다. 이 모임은 고등학교 2학년 남학생으로 구성되어서 성바오로 병원에서 주일 새벽마다 각층 로비에서 성가를 부르는 봉사활동을 하기 위해서 만들어진 모임이었는데, 주임신부님 이외에 철저히 비밀로 활동하는 것을 알리지 않고 활동을 계속 했습니다. 이 모임을 통해 친구들간의 우정과 단합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그 당시는 생활성가가 이제 막 시작되던 해였기 때문에 천주교에서는 가톨릭 성가와 '임쓰신 가시관(낙산중창단)', 김정식 생활성가 이외에는 젊은이들이 함께 부를만한 성가들이 별로 없었습니다. 그래서 개신교의 복음성가, Gospel을 구해다가 많이 연습을 했었습니다. 『주찬양』, 『예수전도단』, 『두란노 찬양』, 『다윗과 요나단』, 『최인혁』, 『김석균』등 많은 개신교 찬양팀들의 노래를 섭렵하면서 새로운 성가에 대한 가능성을 짐짓 확인하면서 함께 할 수 있는 성가들은 악보를 복사해서 함께 배워 병원에서 불렀습니다. 이렇게 성당일에 많은 시간을 보내던 그가 고등학교에서 처음으로 시험을 보게 되자 큰 갈등을 겪게 됩니다. 중학교 때보다 반등수가 거의 2배이상 떨어졌던 것입니다. 당연히 부모님들은 탐탁치 않게 여기셨고 다른 집의 학생들처럼 주일미사만 나가기를 바라셨습니다. "공부를 잘해야 대학에 진학할 수 있고 대학을 나와야 성공할 수 있다."는 우리나라 사람들의 당연한 논리속에서 그도 많은 영향을 받으면서 지내지만 그에게 있어서 제일 중요한 가치는 학교에 있지않고 성당활동에 있었기 때문에 여전히 학교성적은 좋지 못했습니다. 사회적 성공이 중요한 것임을 알고는 있었지만 과연 그렇게 가치를 둘만한 것인지 그는 조금씩 여기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게 되었습니다.
수도회와의 만남
고등학교 2학년 시절 여름방학 때, 학생 레지오 연합 피정을 우이동 명상의 집에서 1박 2일동안 하게 되었습니다. 이때 처음으로 남자 수도자를 만나게 됩니다. 청량리 근처에는 프란치스코회에서 운영하는 프란치스코 식당과 작은 예수회의 분원이 위치하고 있었지만 실제로 만나뵌 적은 없었습니다. 당시 피정지도를 예수 고난회의 수사님과 신부님들께서 해 주셨는데 좋은 프로그램을 가지고 많은 생각들을 하게 해 주었습니다. 피정이 끝날 무렵 예수 고난회의 수사님과 상담을 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고 그는 용기를 내어서 수사님과 상담을 하게 됩니다. "수사님 같이 사는 것이 더 좋아보인다."는 그의 말에 수사님께서는 금방 그의 의도를 알아채시고 공부에 대한 중압감 때문에 회피적으로 수도원을 생각하는 것은 좋지 않다고 말씀하시면서 고난회는 군대에 갔다와야 입회가 가능하다는 것까지 알려 주셨습니다. 피정이 끝나고 그는 새로운 삶의 모습에 대해 끊임없은 동경의 마음을 지니게 되었습니다. 고등학교 2학년 때 학생회에서 전례부장을 맡고 있었기 때문에 모르는 교회용어나 전례, 교리에 관한 서적을 구하러 이곳저곳 알아보던 중, 고등학교 근처에 성바오로 서원이 있다는 것을 알고 직접 찾아가게 됩니다. 이곳이 미아리 성바오로 서원인데 성바오로 딸 수녀원 안에 위치한 조그만한 서원이었습니다. 이곳 서원에서 근무하시는 한 자매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어느 날 "수도원에 대한 소개가 나와 있는 책이 있느냐?"는 그의 질문에 자매님은 『오늘의 수도자들』이라는 책을 추천해 주셨습니다. 그 책을 구해다 보면서 수도원에는 활동수도회와 관상수도회가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고 수도회마다 하는 일들이 다르다는 것도 알게 되었습니다. 그중 성바오로 수도회와 예수회가 눈에 띄었습니다. 활동수도회에다가 그가 관심을 가지고 있던 교육, 매스컴에 대한 사도직을 한다는 것이 그 주된 이유였습니다. 미아리 서원에 계시던 자매님은 "성바오로 수도회가 바로 수녀원 옆에 있다는 것을 알려 주셨고 ○○날 오후 4시에 성소자 모임이 있으니 한 번 가보라."는 권유를 해 주셨다. 그는 많이 망설이다가 수도회에 전화를 했고, 89년 10월경에 처음으로 성소자 모임을 나가게 됩니다. 당시 성소자 모임 담당은 야고보 신부님이셨는데 따뜻하게 맞아 주시면서 매 모임 때마다 성서에 나오는 부르심에 관한 구절을 설명해 주셨습니다. 90년 1월에 있던 성소자 피정에 참석해서 매스미디어에 대한 강의도 듣고 직접 슬라이드나 라디오 방송을 제작해서 발표하는 시간을 가지면서 매스미디어에 대한 중요성을 체험하게 됩니다.
고등학교 3학년이 되자 그도 다른 입시생들과 마찬가지로 대학 입시를 준비했습니다. 그러면서 수도원 성소모임을 계속 나가면서 구체적인 입회에 대한 것은 나중에 대학을 졸업하고 평수사로서 살기를 원했습니다. 대학교 진학에 대해 원래 이과였기 때문에 전자공학과나 정보통신과를 들어가기를 원했습니다. 고등학교 3학년 때 노력은 했지만 그렇게 좋은 성적이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대학입시에 소신껏 지원했습니다.
재수, 입회를 결심하다
그는 대학시험에 응시했지만 결국 모든 시험에서 떨어졌습니다. 쓸쓸하게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집에 있으면서 많은 생각들이 그의 뇌리를 스쳐갔습니다. 재수를 해서 다시 지원을 할까? 다른 일을 해 볼까? 그때 불연듯 생각나는 성서 말씀이 있었습니다.
"쟁기를 잡고 뒤를 자꾸 돌아다 보는 사람은 하느님 나라에 들어 갈 자격이 없다."(루가 9, 62)
이 구절은 성소모임에 가서 신부님의 강의 중에 들었던 구절이었다. 성서를 잘 읽지 않던 그에게 왜 이 말씀이 떠올랐을까? 그는 생각했습니다. "지금 나의 모습이 이와 다를 바가 무엇이 있는가? 하느님의 부르심을 느꼈지만 나는 그 긴박함을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만약 내가 대학에 들어가거나 다른 일을 했다면 그때 과연 입회를 할 수 있을까?"그는 갑자기 자기의 생각을 바꾸어서 수도회에 입회해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자기의 상황을 비추어 보면서 신학교 시험을 준비해야겠다는 결론에 도달하고 재수를 하게 되었습니다. 이과에서 문과로 옮기고 신설동 근처의 학원을 다니기 시작했습니다. 91년 3월, 성소자 모임에 참석해서 신학교 시험을 준비하겠다는 것을 담당 수사님께 말씀드리고 허락을 받게 됩니다. 본당 신부님께도 찾아가서 수도원에 입회하겠다는 말씀을 드리고 1년간 준비를 하게 됩니다. 다른 재수생과 마찬가지로 살게 되었지만 그의 마음만은 달랐습니다. 공부이외에 다른 준비도 해야겠다는 마음으로 종교서적을 하루에 30분씩 읽고 교리문답을 외웠습니다. 이상하게도 이 시기에 그는 입시에 대한 스트레스나 중압감을 받기보다는 마음이 평화로웠습니다. 그해 12월 대학입시 접수가 시작되자 노란 봉투에 들어있는 서울신학교 원서를 사다가 부모님께 보여드렸습니다. 그동안 말 한마디 없다가 그때 가서 말씀을 드렸던 것입니다. 그의 뜻을 존중하고 그의 부모님들은 반대하지 않으셨습니다. 수도원 원장님 추천서, 본당신부님 추천서, 세례 증명서, 견진 증명서 등 필요한 서류를 준비해서 신학교 시험을 보게 됩니다. 똑같은 시험이지만 고등학교 3학년 시절 대학시험을 보았을 때와는 다르게 시험이 끝날 때까지 마치 모의고사를 보듯이 편안 마음으로 시험을 치룰 수 있었습니다. 며칠 후 서울 신학교 합격자 명단에 이름이 있었습니다. 수도원에서 한 수사님께서 신학교까지 오셔서 축하해 주셨습니다. 집과 친척집에 합격 소식을 알리고 수도원에 들러 입회하기 위한 준비물과 입회서류를 가지고 집에 돌아왔습니다. 그는 많은 분들의 축하를 받았습니다. 본당 주보에 이름이 실리고 교중미사 시간에 앞에 나와 인사까지 했습니다.
수도회에 입회하다
수도원에 들어간다는 것은 결혼과 마찬가지로 부모님을 완전히 떠난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렇게 쉬운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불과 필요한 옷가지를 준비했고 건강진단도 받았습니다. 주소까지 수도원으로 옮기게 되니 부모님들은 그가 떠난다는 것을 실감하면서 말은 안 하셨지만 굉장히 서운해 하셨습니다. 이러한 서운함을 남겨둔 채 그는 96년 2월, 수도원에 입회하게 됩니다.
새로운 시작
그의 성소에 관한 글은 여기서 마칠까 합니다. 그가 입회한 지도 6년의 시간이 지났습니다. 파란만장한 그후의 삶은 다른 기회에 다시 말씀드릴까 합니다. 입회는 새로운 삶의 시작입니다. 그 새로운 시작부터 자신의 전 생애를 통해서 하느님의 뜻을 찾게 될 것입니다. 비록 아직 인간적으로 많은 약점과 악습을 지녔지만 하느님께서는 당신 선으로 모든 것을 이끄실 것입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