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뭐든지 잘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은총의 이끄심
정우성 비오 수사
* 유년시절의 추억
1967년 음력 3월 9일생, 광주 토박이, 기억의 저편 아득한 곳에서 어머니는 나를 유산시키려는 생각을 하셨다고 한다. 그리고 첫 아이인 날 낳자마자 거의 죽음에 한 발을 들여놓으셨다고 옛날 얘기 듣듯이 몇 번들은 적이 있다. 그때 아마 세상에 태어나 가장 중요한 어머니의 따뜻함을 느낄 수 없는 환경을 경험했을 것이라 생각된다. 이런 무의식의 상처가 현재 나의 일부분으로 자라나 아주 못마땅한 부정적인 성격이 되어버렸다는 것을 알았을 때는 이미 내가 너무 커 버렸다. 최소한 내가 나를 바라볼 때 긍정적이지 못하다는 얘기다.
유아영세를 받았다는데 기억이 없다. 언젠가 교적을 보니 70년이었다. 네 살이었나? 헌데 중학교 2학년이 될 때까지 성당에는 가 본 일이 없었다. 할머니, 고모, 어머니 모두 신자이셨고 아버지만신자가 아닌 구교 집안은 확실한데 성당에 대한 기억이 없으니 신앙은 그저 씨앗으로 남아있었던가 보다. 가장 오래된 기억 중 선명하게 남아있는 것은 할아버지의 익사 사고, 기차가 다니는 철교 밑 강물 위로 할아버지의 머리가 둥둥 떠있는 기억이 선명한 칼라사진처럼 지워지지도 않는다. 그리고 그 죽음은 기억의 일부분이 되었다. 할아버지는 나를 끔찍이 사랑해 주셨는데, 그분의 사랑은 상여, 무덤, 슬픔 등 이 모든 것과 함께 가끔 오래된 영화처럼 어린 마음에 남았다. 할아버지의 공백은 누구도 채워주질 못했다.
그때까지 셋방살이하던 우리 집은 혼자되신 할머니 집에서 같이 살게 되었다. 이 시기에도 나의 세례명이 '비오'라는 것만 알고 지냈다. 집은 항상 손님들이 많았는데 거의 할머니 친구들이셨다. 어떤 음식이 생기면 이웃, 친지들에게 나누어 보내느라 심부름도 무척 많이 했었다. 할머니들이 모이시면 막걸리 심부름도 많이 했는데 한번은 막걸리를 받아 돌아오는 골목 어귀에서 목이 말라 한 모금 마셨다. 시원한데다 달고 맛있었다. 그 다음부터 막걸리 심부름만 있으면 꼭 골목 어귀에서 한 잔 걸치고 들어왔다. 지금 막걸리는 잘 먹지도 못하지만 그때의 맛은 없다. 심부름하는 나에게 할머니 친구분들은 항상 "니는 뭐든지 '예'라고 대답항께 이뻐야!.", "말 잘 듣는다." 하셨다. 나는 착한 아이였다. 그 말을 듣기 위해 더 열심히 대답하고 심부름하고 말썽피우지 않으려고 했다. 그러나 놀기 좋아하는 성격에 관심의 대상이 되질 못하니 한 번 나가 놀기 시작하면 저녁 늦게까지 놀았다. 상점들이 문을 닫는 시간까지 돌아다니다가 집 앞에서 머뭇거리며 곧바로 들어가지 못하고 근처를 맴도는 일이 자주 있었다.
막내가 초등학교 3학년 때 태어났다. 막내는 사내아이였고 이렇게 해서 나는 2남 3녀의 장남이 되었다.장남이라면 누구나 그러겠지만 항상 가족, 친지들의 기대섞인 목소리를 들으며 자라야 했다. 또 온갖 혜택을 누리는 자리다. 그러나 그런 것들은 여린 가슴에 감당하기 힘든 부담감이었다. 지난 시절을 되돌아 볼 때 장남으로서 동생들에게 군림하는 독재자였다. 동생들은 나에게 많이 맞으며 무시당했다. 생각하면 왜 그런 행동을 했을까 하고 후회하게 된다. 수도생활을 하며 자신을 바라볼 때마다 그런 모순된 삶이 동생들에게 무수한 상처들을 입혔다고 생각된다. 아마 지금도 나에게 입은 상처를 깊이 간직하고 있는 동생도 있을 것이다. 그래서 가끔 기도 중에 그런 기억이 떠오르면 용서를 청해야 한다고 다짐했었다. 지금도 변함없이 언젠가 자리가 만들어지면 부모님과 동생들에게 용서를 구할 생각이다.
초등학교 2학년인가 3학년인가 잘 기억이 나질 않지만 우리 집으로 세 들어오는 가정이 있었는데 같은 또래의 여자아이가 있었다. 고등학교 3학년 이후로 만나지는 못했지만 처음으로 생긴 이성 친구였고 굉장히 친하게 지냈다. 공부를 잘해서 항상 나와 비교가 되는 대상이기도 했다. 헌데 어딜 갈 때마다 그 애는 멋모르고 순진한 내 손을 잡고 다녔다. 3학년 때의 일이었다. 반 친구가 여자와 손잡고 다닌다고 놀렸다. 그저 놀림을 받았다는 것에 화가 난 나는 그 친구를 머리로 받아버렸다. 코피가 터진 친구는 울기 시작했다. 선생님이 왜 싸웠느냐고 물었을 땐 당당하게 말했다. "쟤가 나한테 여자랑 손잡고 다닌다고 놀렸어라우!" 그러자 선생님은 "우성이는 벌써 여자친구가 있나 보네?" 하면서 다시 하시는 말씀이 "너는 우째 니 아버지하고 하는 짓이 똑같냐?" 그러시는 거다. 알고 보니 선생님은 아버지와 학교 동창이셨다. 그때부터 나는 스스로 아버지와 비교하게 되었다. 자식은 부모를 닮게 마련이며 생김새, 성격, 행동양식까지 물려받는다. 이것이 나에게 하나의 신비로 여겨졌다. 왜 그래야 하는가? 왜 다른 사람이 아니고 '나'인가? 하는 풀리지 않는 문제가 성장기에 계속되는 질문되었다.
* 사춘기 + 소년 시절
집에서는 말이 없고 밖에 나가서는 까불이, 개구장이라고 소문났지만 난 자신을 소심하고 내성적인 아이라고 여겼다. 속담에 '하던 짓도 멍석 깔아 주면 못한다'는 말이 있다. 남들 앞에 나서게 되면 다른 사람을 항상 의식하며 살아온 생활이 몸에 배어있어서 뭘 했는지 모르고 돌아가 자리에 앉는 자신이 미웠다. 할 수 없는 게 아니라 할 줄 몰랐다고 말해야 하나? 언제나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며 살았다. 나에게 영향을 주는 사람이 보고 있느냐 아니냐에 따라 행동의 방향은 결정지어졌다. 그리곤 마음 편한 자리에서는 마음껏 까불고 장난치는 개구쟁이였다. 학교 친구들은 나한테 커서 코미디언이 될 것이라 예견했다. 사실 그 당시에 나는 코미디언이었다. 이런 생각 없고 이중적인 구조의 생활은 사춘기의 나를 방만한 낙천주의자로 만들어 버렸다. 스스로 원만한 사람이라 생각했고, 생기는 걱정 근심은 무의식 속에서 없애버렸다. 미래가 없고 오직 현실의 즐거움만 있었다.
어렸을 때 가끔 말도 없이 집을 나가 친척집에서 며칠씩 자고 들어오는 버릇이 있었다. 그 버릇은 중학교 때도 여전했다. 그 시절 집안은 아버지의 직장 문제로 서울에서 잠깐 살다 다시 광주로 내려온 적이 있었다. 서울에서 살았던 동안에 어머니는 옷보따리를 만들어 광주와 서울을 오고가는 보따리 장수를 했었고, 아버지는 공장에서 일하고 계셨다. 영등포구 양평동에서 살았었는데 오랜 기억에 아주 열악한 상황이었다. 지금의 산동네 철거민들이 사는 모습을 생각하면 될 것 같다. 그때 나는 빈민들의 모습을 체험할 수 있었고, 현재 서울에 그런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생각해 볼 수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한 기업이 부도가 났는데 그 여파로 공장은 문을 닫게 되고 아버지는 실직하게 되었다. 그래서 식구들은 다시 고향으로 내려왔다. 광주 토박이의 잠깐 동안 서울 구경이었다. 그 뒤로 광주를 떠나본 적이 없다. 광주에 내려 온 얼마 뒤 전남대학교 앞쪽으로 이사했다. 집 2층 옥상에서 실공장을 했는데 잘 안 되었는지 아버지는 욱하는 성격을 참지 못하셨다. 꽤 오랜 시간 동안 우리 집은 어둠의 시기를 보냈다.
사회적으로도 어둠의 시기였다. 중학교 2학년, 신앙을 찾아 성당에 나가 미사를 보던 때였고,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이 있었던 1980년이었다. 사람들이 죽어 가는 걸 보았다. 집이 시내에서는 떨어진 변두리였지만 대학교에서는 치열한 대치상태가 벌어지기도 하였다. 그때 총소리를 처음 들었다. 학교는 임시방학이었다. 한 번은 사람들에게 밀리고 군인들에게 쫓겨 차를 얻어 타고 도청 앞까지 나가게 되었다. 거리는 전쟁터였다. 돌과 차가 뒹구는 사이로 총소리에 쓰러진 사람을 업고 오는 사람들을 보았다. 죽음은 그 거리에서 활보하고 있었다. 정의란 무엇인가? 투쟁은 무엇을 위한 것인가? 죽음은 또다시 나를 휘감았다. 시민군 트럭을 얻어 타고 집 가까운 곳에서 내려 걸어 들어왔더니 어머닌 내가 죽은 줄 알고 계셨던가 보다. 그리고 시간은 흘렀지만 그 사건은 내 안에 커다란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버렸다. 실공장을 그만 두고 다시 지금 사는 집으로 이사해서 만화가게를 잠깐 했었지만 얼마 안 가서 어머니는 돈벌이를 10년을 넘게 나가셔야 했다. 하루 벌어 하루를 사는 나날이었다. 다음날 사야할 것이 있으면 그날 저녁에 어머니가 들어오셔야 살 수 있는지 없는지 알 수 있었다.
쌀이 떨어지면 밀가루도 무척 많이 먹었다. '언제 굶을지 모르니 지금 먹어두자.' 이 시기에 생긴 생활지침이다. 중학교 3학년 때, 암으로 고생하시던 할머니께서 돌아가셨다. 또다시 나는 죽음을 바라보았다. 할머니가 돌아가신 그 방은 내 방이 되었고 한동안 무서움에 떨며 잠을 잤다. 죽음에 대한 공포를 빨리 잊고 싶었다. 그전까지 어머닌 일이 끝나 돌아오시면 꼼짝 못하시는 할머니의 병 수발을 하셨다. 이때 어머닌 신앙생활을 다시 하셨고 동생들도 성당에 다니기 시작했다. 어머닌 항상 식구들의 건강을 기도하셨는데 하느님은 분명하게 이 기도를 들어주셨다. 누구도 아픈 사람이 없었다. 정작 기도하시는 어머니는 마음 고생에다 힘든 노동으로 항상 지친 모습이셨다.
학교에서 돌아오면 집은 언제나 썰렁했다.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이 썰렁한 집에 일찍 들어가기가 정말 싫었다. 그래서 학교에서 공부한다는 핑계로 친구들과 놀고 어머니가 일 끝내고 들어오시는 시간에 맞춰 갔다. 주로 학교와 성당에서 시간을 보냈고 집에선 잠만 잤다. 하루하루 살아가는 것이 무관심이었다. 그냥 시간이 되면 움직이는 삶이었다. 그런 나에게 위안을 주는 곳은 성당이었으며 그곳은 안식처였다. 해야 할 일이 있고 소속감을 느낄 수 있는 공간이었다. 신앙생활보다는 성당에 가면 누군가와 함께 있다는 것만으로 좋았다. 활동은 누구보다 열심했다. 워낙 노는 데는 열심이었으니까…. 친구들이 있고 따뜻한 마음들이 있었다.
아버진 성당에 가면 돈이 나오냐? 밥이 나오냐? 하셨지만 듣지 않았다. 아니 무시했다는 표현이 맞을 것이다. 언제부터인가 누가 훈계조로 말을 하면 무시하는 버릇이 생겼다. 오직 하루하루 즐겁게 사는 게 전부였다. 이러한 이기적인 방종의 생활을 바르게 이끌어 준 곳은 조금씩 신앙의 맛을 들이던 성당이었다. 성당은 삶의 방법을 배우는 학교였다. 고등학교를 다니던 시기에 나는 얼마든지 타락할 수 있는 여건에 있었다. 학교에서 소문난 춤꾼이고 공부는 항상 꼴찌에서 맴돌았으며 사귀는 친구들도 놀기 좋아하는 애들이었다. 싸움꾼도 모범생도 아닌 그러면서 마음 착한 아이들이었지만 혼자 신앙을 가진 난 거리감을 느꼈다. 학교를 졸업하고는 만나지 않았다. 성당 친구들은 여전히 계속 우정을 쌓고 있었다. 좋아하는 여자아이도 생겼다. 그런데 나만 좋아했다. 그 아인 다른 친구를 좋아했고 이 관계는 내가 입회할 때까지 계속되었다.
* 청년 시절
대입시험을 치루고 성탄판공을 보는데 본당 보좌 신부님이 "비오야! 신학교 갈 생각없냐?" 하고 진지하게 물어오셨다. 나의 신앙의 씨앗을 좋게 보셨던가 보다. 이렇게 하느님은 처음으로 나를 부르셨다. 하지만 간단히 거부했다. 그리고 미래에 대한 꿈도 없이 전문대 전산학과에 진학했다. 부모님도 원하셨고, 집안 사정은 재수할 형편이 못되었다. 대학 시절은 성당 생활을 마음껏 할 수 있어서 좋았다. 이 때 학교에서 새로 사귄 친구들도 나의 신앙만은 이렇다 저렇다 말을 못했다. 그 애들은 종교에 미친 아이로 보았던 것이다. 이때부터 성당은 제2의 집이었다. 집에 없으면 성당에 있었다. 성가대, 초등부 주일학교 교사, 청년회, 레지오 등등 여기저기서 활동하고, 어떤 행사가 있으면 꼭 얼굴을 디밀어대는 열심한 청년으로 사람들은 인식했다. 하지만 이런 모든 행동들은 하느님을 위한 신앙의 바탕에서 우러나오는 것이 아니라 나만을 위한 것이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나는 죽은 것이었으니 살기 위해서라도 움직이고 활동하며 사람들과 함께 있었다. 그 외에 어떠한 것도 나에게는 우선되지 않았다.
그리고 내 머리에는 항상 사람들이 날 어떻게 평가하고 있는가? 하는 질문이 떠나질 않았다. 그때까지도 나는 나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요구에 기꺼이 응답하며 살아왔었다. 그래서 착한 아이라는 말을 듣고 살았을 것이다. 물론 나라는 자신은 어디에도 찾아볼 수 없었다. 그런데 철이 들기 시작했는지 나에 대해 생각이 많아졌다. 왜 이렇게 살아야 하지? 지금 뭐 하고 있는 것인가? 현재 어디에 서 있는가? 끊임없는 질문이 내 가슴속에서 샘솟았다. 그리고 신앙은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조금씩 보여 주고 있었다. 은총이었다. 삶의 가장 큰 은총이고 신비는 내 가슴에서 신앙의 씨앗이 자리잡고 자라나고 잎이 피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삶의 질문들을 신앙에 비춰보았다. 그러면 답이 있었다. 새로운 기쁨이고 에너지였다. 갈등을 회피하며 살았던 나를 똑바로 보기 시작했고 미래를 걱정하는 모습으로 변화되어 갔다.
집을 허물고 새로 지었다. 어머니께서 푼푼이 모으셨던 돈이 어느 정도 되었던가 보다. 융자를 받아 지은 집은 새로운 예고였다. 집 앞으로 흐르던 하천은 복개되어 넓은 도로가 되었다. 아버진 새로 지은 집에 가게를 넓히고 용접으로 여러 가지를 수리하고 만드는 일을 본격적으로 하셨다. 그전까지는 제대로 된 일할 만한 공간이 없어 아쉬워 하셨는데 그런 일하시는 아버지를 보면서 나는 정말 좋았다. 하느님은 우리 집을 다시 시작하게 만드셨고 나를 부르시기 위한 기반을 만들어 가셨다. 하지만 삶은 쉽게 변화되지 않고 더뎠다. 방학이 되면 용돈은 벌려고 일을 했는데 주로 일당 8천 원 하는 막노동이었다. 또 졸업 후에는 군대가기 전까지 있어보려고 한 달 월급이 12만 원 하는 공장에도 취직했다. 아침 8시까지 출근, 저녁 7시 넘어 퇴근, 일이 많으면 공장에서 자기도 했다. 2달 반 다니다 그만 뒀다. 큰 건물의 보일러 청소하는 일도 했었다. 노동과 돈의 가치를 알기 위해 한 일이었는데, 남의 돈을 내 것으로 만들어 쓰는 일은 너무 힘들었다. 공장을 다니던 때 이런 일이 있었다. 성가대가 한참 부활절 준비로 연습을 하고 있었는데 평일에도 연습을 하던 날이었다. 일을 마치고 성가 연습을 하는 유치원으로 곧장 갔다. 그날 하루종일 비가 내려 발은 흠뻑 젖어 있었지만 생각 없이 평소처럼 테너 파트 자리에 앉았다. 그러자 사람들 분위기가 이상했다. 한참 지나자 친한 형이 나를 불러냈다. "우성아, 잠깐 나가자." 밖으로 나가자 형은 말했다. "우성아, 미안하당. 코피 터져불라고 한다. 발 씻고 와라." 화장실에 가서 발을 깨끗이 씻고 다시 유치원으로 갔다. 헌데 사람들은 아직도 나를 이상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그건 내 노동의 냄새였다. 나는 중독이 되어 냄새를 맡지 못하니 이상할 수밖에 없었다. 연습이 끝나자 형들은 "수고했다. 빨리 집에 가서 쉬어라." 그 뒤로 다시는 일 끝나고 곧장 연습하러 가지 않았다.
* 군대 시절
1987년 10월 30일 영장이 나왔다. 논산 훈련소 성당에서 천주교 환자(훈련소에서 이렇게 불렀다)들이 모여 미사를 하는데 영성체 후 성가는 날 울렸다. 뜨거운 기운이 가슴속에서 소용돌이쳤고, 눈물이 끊임없이 나왔다. 은총의 체험이었다. 그러나 자대 배치를 받았던 부대는 천주교 환자들이 많지 않아서인지, 아니면 부대장이 불교 신자라 그런지 성당을 못 가게 했다. 본의 아니게 약 1년간 냉담하게 되었다. 이 기간은 내 신앙을 더 굳세게 만들었다. 식사 때는 빠트리지 않고 성호를 긋고 먹었다. 누구도 뭐라 말을 하지 않았다. 아마 광신자로 보였던가 보다. 대신 맛있는 반찬이 나오면 기도 중에 집어가 버렸다. 속상했다. 그후 부대장이 바뀌었는데 다행히 가톨릭 신자였다. 천주교 환자들도 몇 명 모여 읍내 군인성당으로 주일미사를 보러 갈 수 있게 되었다.
이때 성소에 대한 생각이 자발적으로 일어나면서 제대하면 신학교에 갈까? 하고 고민했다. 고해 성사를 보면서 군종신부님께 말씀드렸더니 아직은 때가 아니라 기다려보라는 말씀을 하셨다. 말씀대로 기다려 보기로 했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고참이 되어 가던 나는 내무반에서 환자들을 더 만들어 성당으로 인도했다. 많을 때는 15명까지도 되었는데 그 중 세례 준비를 하는 졸병도 생겼다.
* 직장 시절
제대 후 성소에 대한 생각은 기다리다 잊어버렸다. 잠깐동안의 열병이었을까? 직장이 생겼다. 금호타이어 전산실에서 용역사원으로 일하게 된 것이다. 이 시기에 나에게는 획기적인 큰 만남이 이루어진다. 성당 옆 건물에 성바오로 딸 수녀님들이 서원을 내고 상주하게 되는 사건이었다. 서원을 수시로 드나들며 힘든 일을 도와주는 나를 수녀님들은 천사라 불렀다. 이 얼마나 달콤한 주님의 유혹인가? 타이어 공장은 24시간 가동되었다. 그 때문에 생산직 사원들은 3교대 근무를 했었다. 전산실도 마찬가지로 24시간 3교대 근무였다. 5일 근무, 2일 쉬는 건데 7일 단위로 변하기에 근무표를 보지 않고는 헷갈렸다. 그래서 남들보다 낮에 시간이 있는 날이 많아서 서원을 자주 찾았다. 수녀님들은 따뜻했고 그게 너무 좋았다. 나를 반겨 주는 수녀님이 있다는 사실이 커다란 은총이었다. 그리고 한 수녀님의 권유로 '천국의 열쇠'라는 책을 읽게 되었다. 너무 재미있었다. 주인공 치셤 신부님의 생애로부터 받은 깊은 감명이 나도 그렇게 살고 싶다는 생각을 갖게 만들었다. 또 수녀님들은 내게 가끔 바오로 수도원이 있다는 말씀을 하셨다. 하지만 직장 다니는 장남은 결혼을 생각해야 했고, 너무 많은 일을 하고 있어서 깊이 생각할 시간이 없었다. 청년회, 주일학교 교사, 레지오, 성가대, 사물놀이, 맹인선교회, 창악 연구회 등 항상 바빠서 뛰어다녔다. 머리 속에는 일들로 가득 차 있었다. 그러한 가운데 그 상황에서도 좋아하던 여자친구는 언제나 다른 친구를 바라보고 있었다. 친하게 지내던 여자들이 있었지만 그저 친분을 나누는 것으로 모든 것이 그렇게 물 흐르듯이 흘러갔다. 청년회 활동을 하면서 주로 예수 고난회 명상의 집으로 피정을 많이 갔는데 그 후로 내가 수도회를 가면 예수 고난회로 가겠다고 한 적이 있기도 했지만, 아주 마음에 든다고 공공연하게 말을 하면서 실상은 별 생각이 없었다. 나중에 직장을 바꿨다. 학습지를 만들어 판매하는 회사였는데 전산직 모집 공고를 보고 임금도 많이 주길래 문을 두드렸더니 쉽게 합격했다. 그러나 그리 쉬운 게 아니었다. 곧바로 전산실이 아닌 지역관리부라는 수금 파트로 발령을 내면서 회사를 알기 위해서는 잠깐동안 이 일을 해봐야 한단다. 한마디로 속았다. 이 부서는 여러 팀들이 있고 팀의 인원은 보통 4-5명이다. 6인승 트럭이 한 대, 각 개인에게 125cc 오토바이 한 대가 주어진다. 당장 오토바이 면허부터 따야 했다. 본사는 광주지만 사업은 전국 규모였다. 영업사원들이 전국으로 봉고를 타고 나가 영업을 해 오면 학습지를 우편으로 보내 주고 온라인 지로용지를 통해 돈을 받았다. 그렇지만 서민들은 매월 돈을 부치질 못해 항상 누적되는 경우가 많아 회사는 이 지역관리부가 필요했다. 문제가 많은 부서이기도 했다. 돈을 가서 받아와야 하는데 쉽겠는가? 트럭에 오토바이 3대를 싣고 각 팀들이 맡은 지역으로 월요일 아침 출발해서 토요일에 돌아오는 일이다. 대구, 원주, 김포, 강화도, 파주, 광명, 고양, 화성, 안양, 송탄, 평택, 온양, 홍성, 횡성, 인제, 군산, 옥구, 구례, 광양, 순천, 군위, 청도, 성주, 달성, 상주 등이 수금 지역이었다. 장부를 받으면 먼저 전화부터 집집마다 한다. 밀린 대금은 준다고 하면 바로 오토바이를 타고 집을 찾아가 받았다. 당연히 처음 찾아가는 집이 많으니까 집을 찾는다는 것은 그날의 실적하고 비례했다. 그러면서도 찾아야 할 집들은 항상 가난하게 사는 서민들이었다. 또 그들은 찾아 가 봐야 나올 돈도 없는 그런 하루 벌어 하루 먹는 사람들이 많았고, 쉽게 돈이 나오질 않으니 난 그 사람들과 싸워야 했다. 어떤 땐 속이기도 하고, 협박도 하고, 말다툼을 크게 해야 했다. 또 저녁 늦게까지 버티기도 했다. 그리고 수금 사원이 찾아가야 할 정도면 이미 이자까지 붙어 목돈이 되어 있었기 때문에 쉽지 않은 건 당연했다. 몇 십만 원씩 한꺼번에 집에 두고 사는 서민이 어디 있겠는가? 한마디로 나는 빚쟁이의 해결사였다. 내 인상이 험하게 생겨서 이런 일을 시키는가 보다 하며 그만둘까 고민하기도. 하지만 정작 나를 괴롭히는 문제는 내가 하느님을 믿는 신자라는 현실이었다. 한순간 부정하고 싶었다. 직장과 신앙의 계속되는 대립관계로 마찰이 일어나고 그걸 모르는 척하며 살아야 한다는 현실은 견디기 힘들었다. 그동안 내 힘으로 벌어 쓰는데 재미도 있었지만 사회 속에서 자꾸만 희생되고 마모되어 가는 나의 신앙과 인간성이 확연히 드러나 보이는 것을 외면하지 못했다. 그러던 어느날 사고가 발생했다.
강화도에 2번째 들어갔을 때다. 강화도는 꽤 큰 섬이다. 숙소를 강화읍에 있는 여관으로 정하고 섬을 누비고 다녔다. 그리고 금요일쯤 되면 항상 마음이 바쁘다. 토요일에는 일찍 떠나야 집에 빨리 도착하기 때문이다. 그날도 섬 맞은 편에 있는 마을에 마무리 정리를 하러 나갔다. 해가 저물어 마지막 집에서 빨리 수금을 하려고 서두르다 보니 그 집주인 아저씨와 의견이 안 맞았다. 자꾸만 깍아 달라는 것이다. 티격태격, 어느새 10시가 되어 버렸다. 결국 나머지 잔돈을 서류 보고에서 처리하기로 했지만 상당히 늦어 있었다. 숙소에서 직원들이 기다리겠다는 생각에 조바심이 탔다. 그런데 내가 타던 오토바이는 거의 폐기 직전이어서 브레이크가 잘 듣지 않았다. 밤중에 한적한 시골 국도는 달리기 딱 좋다. 마침 트럭 한 대가 앞서 가고 있어서 그 차만 쫓아가면 구불구불한 시골 국도는 적당한 속도를 낼 수 있었다. 빨리 가고 싶었다. 어느새 기어는 5단에 놓여 있었고 밤바람을 얼굴에 스치면서 낚시터 저수지를 하나 지날쯤이었다. 트럭은 앞서 언덕을 넘고 있었다. 여기서 속도를 줄여야 했다. 아마 80가까이 되었을 것이다. 언덕을 간단히 넘자 약간 붕 뜨면서 착지를 하는데 헤드라이트에 비치는 길이 보이지 않는 것이다. 순간 '길이 없다.'라는 생각이 번뜩였다. 브레이크를 밟았지만 속도를 이기지 못하고미끄러지는데 길은 언덕을 바로 지나 오른쪽으로 나있었다. 바로 눈앞에 전봇대가 보였다. 그건 피하고 싶었다. 핸들이 마음대로 되질 않았다. 라이트 불빛을 받은 전봇대가 마구 다가오는데 아무 생각도 나질 않았다. 그냥 덤덤했다. 전봇대 앞에서 오토바이는 길 밖으로 튕겨나갔다. 우당탕 쿵탕! 얼굴에 뭐가 부딪쳤다. 얼마나 정적이 흘렀을까? 기절했다가 정신이 든 곳은 길 옆 논바닥 한가운데였다. 모내기를 막 끝낸 논은 물이 고여 있었고 나는 헬멧이 반쯤 벗겨진 채로 머리를 처박고 엎어져 있었다. "끙, 아이고!" 겨우 일어나 눈을 들고 주변을 둘러보는데 꿈인지 생신지 판단이 흐렸다. 정신을 차리니 아무래도 살은 것 같았다. 도로로 기어 나와 서는데 몰골은 완전히 진흙을 뒤집어 쓴 괴물이었다. 한참 지나서 자가용 1대가 지나가고 또 한참 지나서 1대가 왔는데 나를 보자 도망가 가버렸다. 도움을 청할 곳이 없었다. 적막강산의 깜깜한 시골길에서 가로등 아래 그냥 서 있는데 몸은 제대로 움직이질 않았고 전화할 만한 곳도 보이질 않으니 막막했다. 일단 오토바이를 찾아보니 논 가운데 누워 쉬고 있었다. 길에서 약 10미터쯤 되는 거리였다. 어떻게든 돌아가야 했기에 끄집어 내 보려고 했다. 역부족이었다. 논바닥에서 어떡하나 하며 망연히 서 있는데 가까운 곳에 마을이 보였고, 그 중 한 집에 불이 켜져 있었다. 무작정 찾아갔다. 대문을 들어서 불 켜진 곳으로 가 들여다보니 거기에 한 아주머니가 설거지를 하고 있었다. 부엌이었다. 문을 두드리자 아주머니는 유리창 밖에 서 있는 나를 보고 질겁을 하시며 주인 아저씨를 불렀다. 얼마나 놀랬을까? 뛰어나온 아저씨는 나를 보자 무슨 일인지 금방 아셨다. 나중에 말씀하시길 자주 그 논에 차가 빠졌는데 오토바이는 처음이란다. 그분은 나를 부엌으로 불러 들여 옷을 다 벗기고 따뜻한 물에 씻긴 다음 당신 옷을 꺼내 입혀 주셨다. 그분의 고마움은 지금도 잊을 수 없다. 착한 사마리아 사람이었다.
그 다음 숙소에 전화를 했다. 직원들은 내가 죽은 줄 알았단다. 그때가 12시쯤 되었으니 걱정도 되었겠지. 그날 저녁 약간 불편한 몸이었지만 광주로 바로 출발했다. 다음날 회사에 도착해 보니 초상집이었다. 전날 제주도에서 한 직원이 트럭 밑으로 들어가 버렸다는 것이다. 거기에 비하면 나는 살아있으니 아무 것도 아니었다. 병원에 가서 엑스레이를 17군데 찍었다. 아무 이상이 없었다. 다행이다. 그리고 생각했다. 이제 더 이상 고물 오토바이는 타지 않겠지. 그 뒤로 며칠 쉬고 다시 일을 시작하면서 몇 번의 고비가 있기는 했지만 하느님은 내가 필요하셨는지 죽음은 가까우면서도 거리가 있었다. 그리고 이 직업은 세리였다.
* 성소의 갈등
고민은 서서히 일어나서 아주 조금씩 무게를 더하며 자리를 넓혀 갔다. 그리고 마침내 선택의 기로에 섰다. 신앙인가? 재물인가? 재물의 삶을 택한다면 그냥 살아도 된다. 하지만 신앙의 삶을 택한다면 여러 문제들이 기다리고 있다. 결혼도 해야하고 신앙생활도 해야되고 직장도 계속 다녀야 하는지 등등. 이때부터 나는 일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 회사에서는 무슨 고민이 있느냐고 묻기 시작했고 다른 부서를 알아봐 주겠다고도 했다. 이때 그 해 최우수 사원으로 뽑혔다. 곧 승진이 있을 것이란다. 수금 실적이 아닌 회원 관리에서 간부들의 눈에 들었나 보다. 그러나 나는 이미 곧 제출해야 될 숙제를 하는 어린 학생이 되어 있었다. 중요한 문제에 해답을 찾지 못해 골머리를 앓고 있는 이 학생은 어떻게 하면 인생에 있어 가장 좋은 해결 방향을 잡아야 하는지 다각적으로 생각했다. 신앙을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그건 지금까지 살아온 삶의 기둥을 빼버리는 일이었다. 결국 재물의 삶을 포기하기로 했다. 다시 문제는 두 가지로 좁혀졌다. 결혼성소와 수도성소. 교구 사제에 대한 생각은 아예 하지 않았다. 결혼성소를 택한다면 직장을 다시 알아보면 되니까 별문제는 없었다. 그렇지만 살아온 나의 성장기와 사회 생활을 하면서 보아온 여러 가정의 모습들을 생각할 때 나의 자식과 배우자에게 그런 삶을 요구하고 싶지 않았다. 그건 죽기보다 싫었다. 또 나 자신을 바라볼 때 그렇게 살 것만 같았다. 생각은 자꾸 결혼에 대한 부정적인 부분을 일으키며 한 쪽으로 기울어졌다. 결론을 내려야 했다.
어느 정도 생각이 정리된 다음 서원으로 전화해서 송 수산나 수녀님께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고 여쭈었다. 곧 바로 수녀님은 분도 수사님을 이야기했다. 분도 수사님은 광주 성소자 담당이셨다. 회사에 휴가를 내고 서울로 올라와 수사님을 찾았다. 한참 면담을 하고 수사님은 생활체험을 해 보라고 권하셨다. 다시 광주로 내려가는 차 안에서 회사에 사표를 내야 한다고 생각했다. 부모님께는 직장을 더 좋은 곳으로 알아 봐야겠다며 거짓말을 하고 사표를 던졌다. 집에서는 위험한 직장을 그만 둔다니 좋아하셨고, 회사에서는 잘 다니던 사원이 그만 둔다고 하니 난색을 지었다. 다시 수도원을 찾아와서 2박 3일간 생활체험을 하면서 내친구들 부서에서 엽서정리를 했다. 생활체험은 피정이 아니었지만 마냥 좋았다. 떠날 때쯤 암브로시오 신부님과 면담을 하고 집에 가 있으면 입회원서를 보내 줄 테니 기다리라는 말씀을 들었다. 집에 돌아와 한 달을 기다렸다. 물론 놀면서 기다렸고, 주로 성당에서 청년회장으로서 맡은 바 임무를 충실히 수행하고 있었다. 바쁜 성탄절을 보낸 어느 날 성당에서 점심 먹으러 집에 와 보니 어머니는 원망어린 눈으로 나를 쳐다보며 울먹이셨다. 입회원서가 온 것이다. 장남이라고 믿고 있었는데 아무 말도 없었으니 배신감을 느끼셨던가 보다. 어머닌 대답을 회피하시면서 알아서 하라고 하셨지만 문제는 아버지였다. 원서를 보시고 밖에 나가셨단다. 우울해졌다. 올 것이 왔건만 하나도 안 반가웠다. 어차피 넘어야 할 산이었지만 길이 멀었다. 집에 있기 싫어서 성당으로 갔는데 어찌된 영문인지 만나는 사람마다 수도원 가느냐고 묻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받고 싶지 않은 축하까지 해 줬다. 알고 보니 어머니께서 레지오 주회를 오셔서는 나와 친하게 지내던 보좌 신부님께 찾아가 우성이가 수도원에 가지 않도록 해 달라고 울며 사정하셨단다. 소문이 그 짧은 시간에 퍼진 것이다.
신부님은 나를 불러 그 이야기를 해 주셨다. 그런 당신도 수도회에 계시다 교구로 옮긴 사람이라며 수도회는 멋있는 곳이라고 말씀하셨다. 추천서는 그날 저녁 주임 신부님과 이야기를 하시고 당신이 직접 써 주시며 잘 살아보라고 격려해 주셨다. 난 다시 힘을 얻었다. 서원의 수녀님들은 너무너무 좋아하셨다. 아무래도 수녀님들의 낚시밥을 잘 받아먹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집에 돌아와 가장 커다란 문제에 봉착했다. 아버지와 대면이었다. 아버진 설득하시려 했지만 나는 막무가내였고 팽팽한 긴장이 흘렀다. 마침내 아버진 물러나 앉으시며 정 그렇게 하고 싶으면 호적에서 이름을 빼라고 하셨다. 그걸로 이야기가 끝이 났다. 난 방으로 들어가 누워서 밤새워 울었다. 잠이 오질 않았지만 울다 지쳐서 잠들었다. 그 일이 있은 뒤 아버지와 나는 서로를 피했다. 내가 피했다는 말이 맞을 것이다. 얼굴을 마주쳐도 말을 하지 않았다. 이러기를 한 달이 지나고, 그 동안 입회준비를 했다. 설날이 지난 1월 28일, 마침내 새벽 차를 타기 위해 짐을 들고 집을 떠나는 나를 아버진 멍하니 쳐다보시며 눈물을 흘리셨다. 아버지의 그런 눈물은 태어나 처음이었다. 무릎 꿇고 아버지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잘 살겠습니다." 몇 년 후 아버지는 '스테파노'라는 영세명으로 세례를 받으셨다. 이처럼 하느님은 모든 것을 준비하고 이끌어 주셨다. 그 당시는 몰랐지만 지나보면 그 모든 것이 섭리의 은총이었다. 지금까지 수도생활을 하면서도 그분은 나를 버리지 않으셨다. 내가 그분을 떠나 있어도 하느님은 한결 같은 사랑으로 나를 돌보셨다. 앞으로도- 그러실 것이고 그러한 은총에 보답하는 길은 꾸준히 이 길을 걸어가는 것이리라 여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