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뭐든지 잘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 어찌 저를 이렇게 사랑하시나요.
하느님 어찌 저를 이렇게 사랑하시나요.
한창현 모세 수사
나는 어렸을 때부터 그야말로 순진무구하고 착한 아이의 전형이었다. 보통 70년대 영화에서 자주 나오는 아역 배우들의 모습은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꿋꿋하게 동생들을 돌보며 공부 잘하고, 어른 말씀 잘 듣고 절대 한눈 팔지 않는 모습이었다. 그게 바로 나의 모습이었다. 나는 세례를 받을 때부터 늘 성당에 가야 하는 줄 알았다. 다른 아이들은 텔레비젼 보느라고 성당에 안 나올 때 (아마 은하철도 999가 가장 인기 프로였던 것 같다) 나는 한마디 불평도 없이 성당에 다녔다. 어릴때부터 나는 착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나를 억압했던 것 같다. 그리고 첫영성체를 마치고 바로 복사활동을 시작했다. 첫영성체 마친 사람은 오후에 나오라는 말 한마디에 나는 한마디 대꾸도 없이 나갔다. 그리고 시작된 복사활동을 이사갈 때까지 내 생활의 일부였다. 오전, 오후로 수업을 나누어서 할 때는 오후에 수업이 시작되면 일주일 내내 오전 미사 복사를 섰다. 매일매일 버스로 성당에 가면 아주머니들이 착하다고 버스비를 내주셨던 기억이 난다. 그때 나는 정말로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평일 미사 복사가 필요하다는 이야기를 들었고, 나는 너무나도 당연하게 “내가 복사를 서야겠구나”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순진했던 것인지 조금 모자라서 그랬는지 모르겠다. 나의 어린 시절은 다른 아이들과 어울려 논 기억보다는 늘 성당에서 복사를 섰던 기억이 난다. 다른 아이들과 어울리지 못하는 내성적 성격이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초등학교 때 친구들을 만나면 내가 공부에 굉장히 집착했다고 한다. 공부에 대한 억압이 강했던 것은 공부를 잘해서 아버지에 기대에 부응해야 한다는 것이 너무나도 강했던 것 같다. 그러다보니 초등학생다운 순진한 모습보다는 애늙은이 같다는 놀림을 많이 받았다. 항상 착하고 모범적인 모습으로 남에게 비쳐졌다. 초등학교때 시험때면 속이 쓰려서 식사도 못할 만큼 신경을 썼다고 한다. 그런데 도저히 나는 생각이 나지 않는다. 마치 억지로 기억을 지워 버린 듯한 느낌이다.
그러다가 중.고등학교 시절에는 사춘기라는 걸 겪으면서 세상의 모든 고민은 다짊어진 듯이 살아갔다. 내 성격상 부모님을 실망시키는 것은 생각도 할 수 없었다. 나는 스스로 ‘나는 착한 자식이자, 학생이며 친구로 살아가야 한다’고 최면을 걸었던 것 같다. 부모님은 나를 어떻게 생각할 것이라는 기준을 머리 속에 미리 고정시키고 내 스스로 거기에 도달하지도 못하면서 걱정만 하고 살았던 것 같다. 늘 친구들과 어울려서 놀고 싶고 조금은 부모님께서 걱정하실 만한 일을 좀 해도 괜찮았을 텐데.. 지금도 어머니는 내가 당신의 속을 한번도 썩인 적이 없다고 하신다. 좋은 것만 기억하시는 나의 어머니.. 나는 스스로 만든 울타리에서 뛰쳐나가려고 기회만 노리는 황소였던 같다. 겉으로는 시키는 일만 하고 아무 느낌도 없어 보이지만 늘 마음은 울타리를 부수고 싶었던 것이다. 중고등학교 시절 나는 주일 미사를 빠진다는 것은 생각도 해본 적이 없었다. 아마도 부모님의 강요가 아니라 성격상 나에게 주어진 일이라면 일체의 이유를 달지 않고 했던 것이 몸에 밴 탓일 것이다. 그런 분위기 속에서 막연하게나마 나는 신학교에 가고 하느님의 일을 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학창시절 내내 나는 내 인생은 신학교를 가느냐 마느냐로 인생이 완전히 결정될 것 같은 기분이었다. 다른 사람도 마찬가지일 테지만 세상의 모든 고민은 내가 다 짊어진 것 같았다. 그러다 보니 친구들과 어울려서 술도 마시러 다니게 되고 여학생도 좋다고 쫓아다니게 되었다. 그러면서도 신학교를 가게 되면 사회생활을 경험할 기회가 없다는 그럴듯한 핑계를 대었다. 그것도 결국 착해야만 하는 내가 그렇지 못한 생활을 하면서 스스로 위안을 삼으려고 핑계거리로 삼았던 것 같다. 물론 부모님에게는 착한 아들로 보였을 것이다. 그리고 진짜로 결정을 해야 하는 고 3이 되어서는 결국 그런 고민에서 도망을 쳤다. 부모님께 말씀드릴 용기도 없고 신학교에 가고 싶다는 마음도 어느새 정말로 하느님께서 나를 원하신다면 기회를 주시리라는 교만으로 나를 유혹하고 있었다. 결국 나는 나를 억압하는 것들로부터 회피라는 수단을 선택했고 일반 대학을 목표로 공부를 시작했다. 그러고 나서 공부를 시작하려고 하니 사회생활을 경험한답시고 놀다 보니 공부가 될 리가 없었다. 그나마 성적 유지한것도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게다가 첫사랑에 빠져서 자나깨나 좋아하던 여학생 얼굴만 떠오르니 환장할 노릇이었다. 물론 나는 그때도 누구에게도 내가 여학생을 좋아한다고 이야기를 하지 못했다. 나는 어쩔 수 없다고 스스로 나를 억압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는데 내가 청했던 데로 ‘당신이 정녕 나를 필요로 하신다면 당신의 뜻을 보여 주소서’라고 했던 것이 실제로 이루어진 것이다.
어떤 수녀님이 날 찾아오셨다. 아가다 수녀님이셨다. 그 수녀님이 날 찾아오셨을 때 솔직히 어리둥절했다. 그 수녀님에 대한 기억은 별로 없었다. 내가 수원으로 이사 오고 나서 바로 백령도로 소임지를 옮기셨다. 그 마지막 날 신자들과 일일이 악수를 하시면서 나에게 반드시 신학교에 갈 것이라고 하신 것이 내가 가진 수녀님의 유일한 기억이었다. 나는 그저 그러려니 하고 별 생각이 없었다. 그런데 5년 후에 갑자기 우리 집에 찾아오신 것이다. 그러고는 나를 한참 붙잡고서 무슨 이야기를 하신 것 같다. 무슨 말인지 내용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다만 나는 꼭 신학교에 가야 하며 그렇지 않고 싫다면 수도원이라는 곳에 한번 가 보자고 하셨다. 나는 수도원이라는 곳에 대해 생전 처음 들어 보았고, 그때 나는 막상 일반 대학을 가고 싶은데 성적이 생각만큼 나오지 않아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는 상태에서 밑져야 본전이라는 생각으로 하느님의 뜻이라고 스스로 위안을 삼으면서 수도원이라는 곳에 가보겠다고 말씀을 드렸다. 그게 나에게 직접적인 성소의 시작이었다. 그리고 며칠 후 아가다 수녀님은 여주에서 일주일에 한번 쉬시는 월요일에 직접 차를 몰고 오셨다. 그리고 나를 성바오로 수도원에 데려다 주셨던 것이다. 그리고 나는 야고보 신부님을 만나 뵈었는데 그때 무슨 말을 했는지 전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수도원이 뭐하는 곳인지조차 전혀 몰랐다. 아마 그때 내가 수도원을 소개받았다면 나는 분명 그 수도원에 갔을 것이다. 그러고 나서 며칠 후 나는 ‘수도원에 가야 하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늘 대학의 선택이 인생을 결정한다고 생각했던 나는 대학원서를 써야 하는 날이 다가옴에 따라 더 이상 머물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는 8월과 11월에 두 번 수능 시험을 쳐서 더 나은 점수로 지원했는데 나는 8월에 본 시험으로 충분히 신학교는 갈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결국 부모님께 말씀을 드리고 말았다.
내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아버지께 처음으로 내가 스스로 결정한 사항을 말씀드린 것 같다. 말씀드리고 나서 얼마나 힘들었는지 모른다. 특히 아버지가 실망하신 것 같다는 생각을 하지 가슴이 찢어질 것 같았다. 어떻게 말씀을 드려야 할지 몰라서 망설이고 있었는데 얼떨결에 나도 모르게 말씀을 드렸다. 그때는 분명히 전혀 말할 분위기가 아니었다. 내가 수도원에 간다는 것이 못내 아쉬우셨던지 부보님은 한참 동안이나 말씀이 없으셨다. 지금은 자식이라고는 아들 둘밖에 없는데 모두 신학교와 수도원에 보내고 나서 두 분 모두 기쁘게 사시지만 그때는 정말로 불효를 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고 나서 나는 수도원이라는 곳에 본격적으로 마음을 두기 시작했다. 이왕 부모님께 말씀을 드린 이상 다른 선택은 생각할 수 없었다. 그 당시 성소담당이셨던 백 신부님은 그때나 지금이나 말씀이 별로 없으셨다. 성소자 모임 두 번인가 나오고 생활체험 이삼 일 하고 나니 당장 신학교를 준비하라는 것이었다. 막상 준비를 하려고하지 ‘이제 진짜로 가는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게다가 2월에 고등학교를 졸업하는데 1월 초에 들어오라는 것이다. 세상에 졸업도 하지 않고 입회하라니 기가 막혔다. 그래도 용기를 내서 부모님도 서운해하시는데 졸업은 해야 하지 않겠느냐고 했던 졸업식 마치고 그 다음 주에 입회하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나의 사회 생활은 고등학교 졸업후 5일이 전부였다.
수도원에 입회할 때 나는 성바오로 수도원이 무슨 일을 하는지도 몰랐다. 다만 ‘내가 가야할 곳이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었다. 그리고 실제로 내가 가야할 곳이었다. 너무나도 자유로우신 하느님께서는 모두 각기 다른 모습으로 우리를 부르시는 것 같다. 그 중에 하느님께서 나에게 쓰신 방법은 ‘번갯불에 콩볶아 먹기’ 였던 것 같다. 8월에 수도원을 알게 되었고 두 달후에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네 달 후에 입회한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나를 하루라도 빨리 당신 곁에 두고 싶으셨던 것 같다(성격도 급하시지).
그 후 수도원 생활은 그야말로 천국과도 같았다. 아무 생각없이 뭔가 해나갔던 것 같으면서도 지금 생각해 보면 정말 철없이 살았던 것 같다. 나이 스물에 알아봤자 뭘 안다고 인생을 논하고 삶의 비젼을 이야기했는지 모르겠다. 지금 생각해 보면 하느님께서 도대체 정신을 차릴 기미가 보이지 않으셨는지 정신 차리게 해주어야겠다고 생각하신 것 같다. 결국 청원기 시작하고 얼마되지 않아서 다리를 다쳐서 깁스를 하게 되었는데 무작정 집에서 쉬다가 군대를 가겠다고 때를 쓴 것이다. 나는 내일 집에 간다고 부모님께 전화를 드렸는데, 부모님, 아가다 수녀님 모두 당장에 달려오셨다. 그러나 나는 그때 눈에 뭐가 씌었는지 (지금 생각해 보면 그것도 하느님이 씌어 주신 것 같다) 막무가내로 군대 갈 때까지 집에 가겠다고 한 것이다. 얼마나 철없는 행동이었는지 군대 가서야 하느님께서 알려 주셨다. 결국 집에서 5개월을 쉬다가 군대를 갔고 우여 곡절 끝에 내게 필요한 만큼만 고생을 하고 제대했다. 그리고 제대 3일 만에 수도원에 다시 돌아왔다. 다시 안 받아주시면 어쩌나 해서 휴가 3일 준 것만도 감사하다고 말씀드리고 뒤도 안 돌아보고 들어왔다. 지금 생각해 보면 아찔하면서도 웃음밖에 나오지 않는다. 하느님이 보시고서 얼마나 배꼽을 잡고 웃으셨을지...
결국 나는 돌아왔고 너무나도 은혜로운 수련기를 보내고 있다. 그 중에서도 가장 감사한 것은 내 자신의 모습을 객관적으로 볼 수 있게 된 것이다. 내가 마치 모든 것을 결정할 것처럼 덤비전 시절에도 결국 내가 한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고3 올라가면서 내 자신의 확신과 실력이 부족하여 신학교를 포기하면서 교구 신부님들의 못사는 모습을 보고 나고 드렇게 살기 싫다고 말했지만 주님께서는 나의 이런 약점을 오히려 이용하셔서 수도원에 보내 주신 것 같다. 마치 내가 큰 뜻을 위해 수도원에 가는 것처럼 생각했지만 그것도 결국은 하느님께서 나의 교만마저도 당신의 도구로 쓰시는데 사용하신 것 같다. 도대체 하느님은 얼마나 나를 사랑하시기에 나의 너무나도 못난 부분까지 이용해 나를 부르시는지 모르겠다.
‘돌아보면 발자국마다 은총이었네’라는 책제목이 생각난다. 그 저자에 비해 나는 인생 경륜이 너무나도 짧다. 아직 20대 초반(?)이다. 그런데도 나는 감히 내 인생의 모든 발자취의 하느님의 섭리가 함께 하셨다고 말하고 싶다. 내가 견딜 수 있을 만큼의 고통을 주시는 하느님께서는 나를 당신의 뜻에 맞도록 만들어 주시는 것 같다. 앞으로 나에게 고통이 주어지더라도 하느님께서 당신의 도구로 쓰시기 위해 단련시키시는 것임을 잊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리고 내가 주님으로부터 멀어지지 않도록 기도로 함께 해주신 아버지, 어머니, 아가다 수녀님께 너무나도 감사드린다. 나의 인생이 모두 주님의 손에 달렸고 주님의 역사하심 안에서 모든 것이 이루어지지만, 그 중에서 가장 감사한 것은 나에게 나의 아버지와 어머니를 주신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