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비가 옵니다.
비가 오면 좋아지는 기분 때문에 유치원생인 양 연두색 비옷을 입고
집을 나섰습니다. 텃밭에 가서 빗방울을 맞고 있는 열무 싹과 검정
콩의 떡잎을 들여다보고 빗방울에 흔들리는 어린 잎들이 참 신기하다
생각합니다. 작은 생명들은 우리가 모르는 새에 땅 밖으로 나와 이렇게
비가 오면 감쪽같이 한 오센티미터씩 자라는 것 같습니다.
붉은 철쭉, 수국의 흰 꽃, 원추리의 푸른 잎, 후박 나무의 너른 잎새...
세상 모든 것이 하느님의 세례를 받습니다.
그 틈에 끼어 연두색 비옷을 입은 나도 길을 갑니다.
내가 아주 좋아하는 시를 하나 선사해드립니다. 현대 중국의 시인
류푸가 쓴 '비'라는 시입니다. 비를 바라보는 어린 아이의 귀여운
마음이 이 글을 읽는 사람들에게도 잔잔한 웃음을 선사해주기를 바라면서...
비
류 푸
(이것은 다만 샤오후이의 말을 대신 속기한 것뿐이다. 1920. 8. 6.
런던에서)
엄마! 오늘은 잘래요. 엄마 무릎을 베고 일찍 잘래요.
저기 잔디 위에도 아무런 소리 없네요.
내 꼬마 친구들도 그들 엄마 무릎에 엎드려 잠들었나 보아요.
저기 잔디 위에도 아무런 소리 없네요.
먹같은 어둠뿐, 다만 먹같은 어둠뿐이네요.
들개나 들고양이가 무섭네요. 오지 말게 해요.
그런데 주룩주룩 어쩌자고 비는 아직 내리는지요?
엄마! 나 잘래요. 들개도 들고양이도 아랑곳 없는
비만 아직도 까만 잔디를 톰방톰방 내리치고 있네요.
그 녀석은 집도 없나봐? 그 녀석은 엄마의 무릎도 없나봐?
그 녀석은 잠도 없나봐?
엄마! 왜 웃어요? 저 녀석 집이 정말 없나봐?
어젠 비도 내리지 않은 날. 잔디엔 온통 달빛이었는데
그 때 그녀석은 어디로 갔었대?
엄마도 없다는데 --- 아니 그저께 엄마가 저 하늘 먹구름이
바로 그 녀석 엄마라 했지?
엄마! 나 잘래요.
제발 문좀 닫아요. 그 녀석이 들어와 내 꼬까를 적시면 어떡해?
엄마! 차라리 내 비옷을 비에게 빌려 주어요.
그 녀석 비의 옷자락을 적시지 않게요.
<2000. 5. 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