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뭐든지 잘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길 2
● 신작로
유아기 때 나는 무척 허약했다. 입에 약이 들어가지 않는 날이 없었다. 이 허약함은 나를 생각하기를 좋아하는 아이, 상상하기 좋아하는 아이, 혼자서도 잘 노는 아이로 만들어갔다. 이 허약함을 제외하고는 평화로운 시기였다. 할아버지와 서커스 구경가던 일, 모기차를 따라다니던 일, 세 발 자전거를 타고 동네를 활보하던 일, 시골에서 형들을 따라 산과 들로 뛰어다니며 놀던 일, 소꿉 친구와 함께 지내던 일 등 어느 것 하나 부러운 것이 없던 시절이었다. 이런 평화는 오래 가지 않았다. 드디어 나도 학교를 다녀야 할 때가 온 것이었다.
● 굽이길
대구에 있는 학교에 가기 위해 나는 부모님과 떨어져 외할머니와 함께 하게 되었다. 학교에 다니는 일, 주거환경, 친구들 그리고 부모님과 한동안 떨어져 혼자 보낸 시간들, 이 모든 것이 첫 경험이었다. 이러한 변화는 나에게 커다란 도전이었고 위협이었다. 이 모든 변화를 감당하기에 너무 어린 나이였다. 또한 건강도 좋지 않았다. 두드러기라는 피부병으로 엄청 고생하고 있던 시기였다. 정서적으로 불안하고 위축되었던 시기였다. 나의 생각과 감정을 표현하기가 두렵고 힘든 시기였다. 따라서 세상으로부터 사랑을 받기 위해 말 잘 듣는 아이가 되었다. 이때부터 나는 침묵이라는 친구를 사귀게 되었다. 한 학기가 끝나고 부모님과 함께 하게 되어 차츰 안정을 찾아갔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다시 이사를 했다. 이는 너무나 빠르게 찾아온 변화였다. 나는 다시 새로운 환경에 적응해야만 했다. 이때도 침묵이라는 방법을 적극 활용했다. 일단은 성공적인 것으로 보였다. 새로운 친구들은 아파트에서 컬러 텔레비전을 보고 KBS2를 시청하는 친구들이었다. 이 외에도 나와는 많은 점들이 달랐다. 그로 인해 소외감을 느꼈다. 또한 부족하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게 되었다. 그러다 보니 한 동안은 친구들과 그렇게 잘 어울리지 못하였다. 녹내장으로 인해 병원을 다니기 시작하던 시기였다. 잘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 나를 현실로부터 멀어지게 하였다. 이 모든 것이 나의 작은 노력으로 극복하기가 힘든 일들이었다. 물질적 정신적 신체적으로 빈곤하게 만드는 모든 것을 무가치한 것으로 간주하게 되었다. 현실에 대한 무가치화의 방법은 현실보다 초월적인 것, 관념적인 것으로 나의 관심을 집중하게 만들었다.
● 표지판
굽이길을 걷다가 하나의 표지판을 보았다. 초등하교 5학년이었다. 윤임규 부님을 만났다. 신부님의 모습은 이러하다. 키는 굉장히 컸다. 굉장히 말랐다. 그리고 옷은 남루하였다. 성당을 짓는 일에 자신의 용돈마저 다 투자하신 것이었다. 신부님 축일과 사제 서품일에 선물로 옷감만 들어왔다는 이야기가 나올 정도였다. 현금은 성당 건축비로 유용(?)되었기에 옷감을 선물했던 것이었다. 언젠가 우리 집에 오셨다. 어머니께서 신앙적으로 외기러기였기 때문이다. 그때 아버지께서 "참 어렵네요."라는 말씀을 건네자, 신부님은 "어렵지요."라는 말씀으로 대답하시고 그렇게 한 동안 계시다가 다른 집으로 가셨다. 그 한 말씀이 아버지의 가슴에 남아 나중에 세례를 받는 힘이 되었다. 이런 신부님의 모습이 지금까지도 남아 있다.
● 갈림길
이런저런 길들을 지나 갈림길에 서게 되었다. 고등학교 3학년이 되었다. 그때 본당 부제님이 우리들을 부르시고 신학교에 갈 사람이 있냐고 질문을 던졌다. 그때 나는 '저요'라고 손을 들고 싶었지만 우선 '부모님의 재가를 받아야지.'라는 생각으로 손을 들지 않았다. 집에 돌아와 부모님께 말씀을 올리니 아버지께서 대뜸 "내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에 불가"라는 말씀을 하셨다. 나의 뜻이 쉽게 이루어지리라고 생각했던 나는 당혹스러웠다. 그때까지 아버지는 아직 세례를 받지 않은 상태였다. 차마 나는 아버지의 뜻을 따르지 않기에는 용기가 없었다. 그 순간은 삶의 목적과 방향을 상실한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