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4주간 화요일 복음(마르 5,21-43)
때때로 성서 속에서 복음사가의 문학적 재치에 감탄을 하는 경우가 있다.
그것은 성서를 읽다 발견하게 되는 또 하나의 부수적인 기쁨이다.
오늘 복음도 그런 경우이다.
하혈병 여자와 야이로 회당장의 이야기가 나오는 대목.
복음사가가 두 가지의 전승을 따로 따로 전할 수도 있었는데 굳이 한 대목으
로 연결해서 들려주는 이유는 무엇일까?
참고로 마르꼬 복음사가는 이처럼 한 가지의 사건 안에 다른 이야기를 끼어
넣는 샌드위치式 문학기법을 잘 쓰시는 분이다.
예를 들어,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신 이야기'의 중간 부분에도 '성전을 정
화'하신 이야기를 끼어 넣었다.
그렇다면 이렇게 구성한 이유가 분명 있을 터이다.
만일 두 가지의 이야기가 각각 분리되어 이어졌다면 어떤 차이가 있을까?
또한 병행하는 마태오 복음(9,18-26)에서는 애초에 회당장의 딸은 죽었고 처
음부터 <치유>가 아닌 <소생>을 부탁하고 있다.
그러니 가는 도중에 누가 끼어 들어도 회당장에게 별 피해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마르꼬는 다르다.
회당장의 딸이 위급한 지경인데 엉뚱한 다른 여자가 끼어 들어와 시간을 뺏
는 바람에 결국 죽고 말았다.
정말 마르꼬 복음은 마태오 복음보다 엄청나게 시간을 질질 끌고 있다.
어떤 차이가 있는가?
긴장감, 박진감이 더 있지 않는가.
복음사가의 의도가 그것 뿐일까?
사람들의 반응이 재빨리 달라진다.
"따님이 죽었습니다. 그러니 저 선생님께 더 폐를 끼쳐 드릴 필요가 있겠습니
까?"
정중하게 체념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말 속에서 은근한 원망이 내비치는 듯
하다.
독자들도 이제까지 마르꼬 복음을 읽는 동안 치유의 기적은 많이 보았지만 죽
은 사람을 살려냈다는 기록은 한번도 본 적이 없다.
처음 이 책을 읽는 독자들은 당연히 "가능할까?" 의심을 품을 만한 일로 변
해 버린 것이다.
"걱정하지 말고 믿기만 하여라." 하고 말씀하시는 예수.
예수께서 이미 곡(哭)을 하는 초상집에 들어가셔서 죽은 아이의 손을 잡
고 "탈리다 쿰(일어나라)!" 하시자 소녀는 일어나서 걸어다녔다는 놀라운 이
야기이다.
걸어 다니는 소녀가 유령이 아님을 증명하기 위해서 예수께서는 먹을 것을 주
라고 하셨다.
예수는 죽은 이도 살려낼 수 있는 분이심을 복음사가는 증거하고 있는 것이
다.
죽은 이를 살려낼 수 있는 능력, 그것은 하느님의 능력이 아니고 무엇이랴?
회당을 맡고있는 위치에 있는 사람이 엎드려 청을 할 때에야 예수께 대한 믿
음이 없고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알지도 못하는 여자 때문에 그의 청이 수포로 돌아갔을 때, 회당장은 더 큰
신앙의 위기에 봉착한 것이 된다.
집안 사람들의 권유대로 포기하고 돌아가던지 걱정 말라는 예수의 말을 들을
것인지의 기로에 서있던 회당장.
처음 예수를 만날 때보다 <더 큰 믿음>이 필요하게 된 것이다.
아니, 이게 진짜 믿음일지도 모른다.
아까는 용한 의사로서의 예수의 인간적인 능력을 믿었을는지도 모르지만 지금
은 하느님 아니면 안 되는, <하느님 예수>를 믿어야 하는 판이니 말이다.
우리는 늘 다급해서 주님께 청을 드리게 되지만 어쩐 일인지 주님은 즉각 우
리의 일을 해결해 주시지 않는 때가 너무나 많다.
급행 열차를 타고 오시길 바라는 나.
그러나 주님은 특급열차가 아닌 완행 열차, 그것도 낡고 냄새나는 비좁은 곳
에서 주님을 애타게 만져 보려는 애처로운 백성들에 둘러싸여 오시는지도 모
른다.
다 틀렸다고 포기해 버릴까 아니면 <더 큰 믿음>을 가지고 기다려야 할까?
초고속 ADSL을 깔아놓고도 답답해하는 조급한 우리 세대에게는 무지하게 힘겨
운 시험이 아닐 수 없다.
그쵸?
그러니 회당장보다 <더 더 큰 믿음>이 필요할텐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