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 3주일 복음(루가 1,1-4; 4,14-21)
처음 목에 이상이 있음을 알게 된 것은 우연인지 필연인지 성서를 가르치던
두 곳에서 같은 주일에 동시에 마이크가 고장이 나서 생 목소리로 두 시간씩
강의를 하게 되었다.
평소에 목소리가 작은 나는 정말 힘들게 소리를 지르며 강의를 마쳤는데 그
후로 계속 목이 가라앉지 않는 것이었다.
삼 주가 되도록 부어있는 목을 가리키며 장난으로 암이 아닌가 모르겠다고 했
는데 그 소리를 들은 수강자 한 명이 갑상선 증세와 아주 똑같다고 내과를 가
보라는 조언을 해 주었다.
내과에 가긴 했으나 몇 가지의 검사와 다시 조직검사가 필요하다는 의사의 말
을 듣고도 '갑상선 홀몬 이상' 정도인줄 알았다.
내분비과에 대기하고 있는 많은-정말 놀랐다-사람들이 모두 그런 병이었으니
까.....
검사결과를 듣기 위해 진료실에 들어갔을 때 의사는 촤트만 뒤적이고 있었다.
함께 온 사람 없냐고 물었어도 무심히 지나갈 정도로 생각지도 못한 결과였
다.
암 덩어리가 갑상선에 세 개나 보인단다.
수술을 하면 대개 경과가 좋아지는데 앞으로 5년 이상 살 확률이 90%라고 이
야기했다.
외과의사를 소개받고 날짜를 잡은 후, 인사하는 나에게 "담담하시네요"라고
말하였다.
담담한 게 아니라 멍한 거였다.
돌아오는 택시 속에서 "5년이라면... 우리 아이들이 몇 살일까?" 생각이 들
었다.
다른 곳에 전이(轉移)되지는 않았을까 물었지만 외과에 가서 상의해보라는 이
야기가 더욱 불안하게 했다.
마치 처음 세상에 떨어진 외계인처럼, 지금부터 무엇을 해야할지 아무런 생각
도 나질 않았다.
그 때 머리 속에 떠오르는 성서 구절 "늘 하던 대로".
지난 주에 강의록을 쓰려고 루가복음을 펼쳤을 때 눈에 쏙 들어왔던 말.
지상에서의 마지막 밤, 주님은 "늘 하시던 대로" 겟세마니 동산으로 올라가시
는 것이었다.
죽음을 앞에 두고 그 초조하고 불안한 밤에, 나의 님은 "늘 하시던 대로"의
모습이었던 것이다.
"나라면 어떠했을까." "예수님의 죽음 앞에서의 평상심(平常心)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등등의 묵상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그래, "늘 하던 대로"다.
집에 돌아와 다시 성서를 펴들고 그 말을 찾아보았다.
그런데 루가복음에서, 예수께서 맨 처음 본격적으로 가르치시기 위해 택한 장
소인 나자렛 회당으로 막 들어가시려고 할 때 역시 '늘 하시던 대로'(10절)-
공동번역-이다.
복음사가는 무얼 말하려고 했을까?
복음서에서 보여진 그분의 모습은 시작부터 마지막까지 '늘 하시던 대로' 사
신 예수였다.
생의 급박한 시간이나 평온한 순간이나, 모든 사람들이 알아주고 따라오던 성
공적인 시절이나 모두가 떠나버린 허탈한 시절이나, 언제나 처음 마음먹은
대로 변함 없이 사신 분이셨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것은 아닐지....
오빠가 먼저 세상을 떠나 가슴에 큰 상처를 입고 살아가시는 친정부모님께 또
다시 충격을 드릴 수가 없었다.
경제적으로 오랫동안 힘들었다가 이제 겨우 다시 일어서려고 애를 쓰고 있는
남편을 또다시 실의에 빠지게 할 수는 없었다.
성적이 안 올라 애를 태우는 고 3인 딸에게 엄마 걱정까지 부가시키고 싶지
도 않았다.
철부지 아들에게 그늘을 만들어 주고 싶지도 않았다.
<늘 하던 대로 하셔야 했던, 하실 수밖에 없는> 예수님의 마음이 이해가 되었
다.
그것이 사랑 아니고 다른 무엇이랴?
다른 사람 앞에서는 '늘 하던 대로' 하시면서도 하느님 아버지 앞에 홀로 남
았을 때는 피땀이 흐르도록 번민에 시달리는 예수, 졸고 있는 부실한 제자들
이라도 붙잡아 함께 하시려고 세 번씩이나 왔다갔다하시는 초라하리만큼 초조
한 예수.
나도 식구들 앞에서는 초연하고 태연한 듯 생활을 했지만(나중에 알고 나서
도)
한 밤중에 갑자기 식은땀이 흘러 잠을 깼었으며 (몸은 훨씬 정직했다.-예수님
의 피땀은 정직한 그분의 마음이다.)
모두들 나가고 기도하려고 주님 앞에 앉으면 초조하고 불안한 마음을 숨길
수 없었다.
다행히 주님보다 내가 여건이 좋은 것은 주님은 세 명의 제자들에게서 아무
런 위로도 힘도 받지 못했지만 나에게는 그동안 성서를 통해 친밀하게 된 세
명의 친구들이 늘 함께 해주었다.
이제 의료파업으로 몇 달을 기다려야 했던 지리한(정말 기약없는 그 기다림
의 시간이 더 힘들었다)시간도, 수술도 다 끝이 났다.
아직 남아있는 조각들이 있어 골치를 아프게 하지만
이만큼의 고통과 시련 가운데서도, 이만큼의 평상심을 잃지 않는 것은 역시
주님의 말씀의 힘, 그것이었음을 고백한다.
(평상심을 잃었을 때의 모습을 목격한 친구들이 들으면 웃겠다.)
아참, 유능하다는 외과 의사 선생님을 만났던 첫대면 때.
음식이라거나 특별히 조심해야할 것이 있냐고 물었더니, "늘 하던 대로...평
상시 습관대로...하시면 된다"는 충격적인(?) 말을 하셨다.
이렇게해서 당시의 힘들었던 나를 지탱해주었던 화두에 더욱 힘을 받게 해주
었던 것이다.
오늘 주님은 늘 하시던 대로 나자렛 회당에 들어가시어 성서의 한 대목을 펼
쳐 읽으시더니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 성서의 말씀이 오늘 너희가 들은 이 자리에서 이루어졌다."
그분은 늘 하시던 대로 오늘도 당신의 말씀을 들려주신다.
그런데 늘상 듣는 그 말씀이 그것을 <듣는>-이것이 정말 어려운 일이다-사람
들에게 있어서는 <오늘><이 자리>에서 <그대로 이루어지는> 위력있는 말씀이
되는 것이다.
해방의 소식, 희년(禧年)의 선포는 예수님이 우리 곁에 있음으로해서 어떤 시
련이나 고통에도 불구하고 매순간 살아있는 해방으로, 기쁨으로 우리에게 다
가오는 것이다.
내일이 불확실하기는 모두가 마찬가지다.
처음이나 마지막이나, 초지 일관 주님과 함께 하는 삶은 큰 걱정할 것이 없
는 것이다.
인생의 커다란 시련을 맞이할 때마다, 성서와 함께 한 여정이 얼마나 다행한
일이었는지 그것을 피부로 느끼게 하시는 하느님께 정말 감사하지 않을 수 없
다.
그러나 아무리 그렇더라도 솔직히 나는 두번 다시 그런 체험을 하고 싶지는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