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 2주간 월요일 복음(마르 2,18-22)
하루종일 요를 깔고 뭉개고 싶은 날이 있다.
지난 토요일도 그랬다.
반모임이 있다는 연락을 받고 망설이다가 말을 듣지 않는 몸을 간신히 일으
켜 샤워를 하고 정신을 차려 시간에 막 도착했다.
신년 첫모임이라 그런지 사람들이 많아서 우선 기분이 새로웠다.
성가를 부르고 기도도 하고 '가나의 혼인잔치'가 나오는 주일복음을 가지
고 '복음나누기'를 하였다.
세 번씩 돌아가며 읽고, 그 중에서 마음에 와 닿는 구절을 골라서 한사람씩
발표를 하였다.
이제 잠시 하느님이 각자의 마음 안에 어떤 말씀을 담아 주시는지 묵상할 차
례가 되었다.
조용히 묵상해야 할 1-2분간의 정적을 못 참고, 한 분이 복음을 해설해 주셨
다.
"해설서를 보니까, 이 복음의 내용은 이런 것이다........이 복음의 핵심은
바로 이런 말이다."
해설서를 정확히 인용하시는 분은 평생 독신으로 사시는 일명 동정녀 할머니
였다.
늘 먼저 해설해 주시는 것을 낙으로 모임에 참석하시는 분이시란다.
그래서 그분은 반모임에 나오기 이전에 늘 해설서를 꼼꼼히 읽고 나오시는 분
이다.
다시 한 사람씩 돌아가며 각자의 마음 안에 담아두었던 말씀들을 나누는 시
간.
몇 사람의 이야기가 채 끝나기도 전에 다시 그분의 성급한 주석이 이어진다.
어떤 분은 대놓고 그분에게 이해되지 않는 구절을 물어보고.....
정확한 대답도 있지만(해설서에 의한) 잘 모르는 부분인지 엉뚱한(?) 대답도
해 주셨다.
이 시간, 오직 당신 차례를 기다리며 이제나 저제나 우리 주위를 맴돌고 계
실 하느님의 코믹한 모습을 생각하니 웃음이 나왔다.
<말씀>이신 주님이시니 얼마나 말씀을 하시고 싶을까?
"하느님이 각자의 마음에 넣어주신 말씀을 나누어보자"고 하더니 하느님이 말
씀할 시간도 주지않고 귀도 기울이지 않고 저희들끼리 떠들고 있다고 하시지
나 않을까?
내 차례가 되었다.
빈 항아리를 최상의 것으로 채워주시는 하느님.
그러나 언제나 항아리가 가득차, 꼭 나에게 필요한 것인데도 채워주실 수가
없는 나의 상태에 대해 말씀드렸다.
덧붙여 하느님이 그 시간 각자에게 생생하게 채워 주시고자하는 살아있는 말
씀을 거부하고 언제나 책이나 누구에게서 들은 이야기들로 가득 차있는 어리
석음에 대해서도, 나의 이야기인 듯 말했다.
아니 실제로 그것은 나의 모습이었다.
성서를 공부하면서 알지 못하던 것을 하나씩 알아나가는 과정이 얼마나 재미
있었는지 모른다.
그러나 몇 년이 지나면서 나는 회의가 들기 시작했다.
아무 것도 모르던 옛날만큼 감동이 느껴지지 않았고 성서를 읽고 들을 때마
다 머리 속에서는 이런 저런 분석을 하고 어줍잖은 해석을 해댔던 것이다.
당연히 강론을 들으면서도 이런 저런 품평을 해대고, 맞냐 틀리냐를 따지다
보니 감동이 올 리가 없었다.
성서공부고 봉사자고 다 때려치우려고 갈등하고 있을 때,
'성서 사도직 세미나'에 참석하게 되었고 그곳에서 "렉시오 디비나"라는 일종
의 <영적 독서>를 하게 되었다.
깊이 있는 영적 묵상에 반드시 성서지식이 필수적이라는 것은 아니지만, 그
지식을 간수만 잘 한다면 좀 더 풍성한 묵상을 할 수 있다는 것을 체험하게
되면서 다시 생각이 바뀌었다.
나에게는 성서가 여러 권이 있는데 성서해설이 잔뜩 씌어있는 것과 아무 것
도 써있지 않은 깨끗한 것, 또 최근에 번역된 것과 낱권으로 분해해서 가지
고 다니기 쉽게 되어 있는 것들이 있다.
용도는 모두 다르다.
맨 처음 읽고 묵상할 때는 늘 아무것도 써 있지 않은 깨끗한 것을 사용한다.
아무런 선입관도 갖고 싶지 않아서이다.
그래도 머리 속에 떠오르는 것들이 너무 많아서 그것을 일부러 무시하려고 애
를 써본다.
이유는 한가지다.
<오늘, 나에게> 들려주시는 주님의 <새로운> 말씀을 듣고 싶어서다.
주님이 채워주시는 최상의 '새 포도주를 새 부대에 담기' 위한 나의 안간힘이
다.
어느 때, 나에게만 들려주시는 주님의 새로운 말씀은 얼마나 나를 신선하게
감동시키시는지 모른다.
그러나 거의 낡은(?) 말씀만 되풀이 될 때가 많은 것이 대부분이라 슬프다.
그렇게나 생각들을 비우려해도 안되는 것은 내가 온전한 <새 부대>가 아니기
때문이리라.
채워주셔도 채워주셔도 밑둥이 새는 <낡은 항아리>이기 때문이리라.
아! 몸도 금이 가고 영혼도 금이 간 나의 <그릇>은 무슨 수로 그분의 포도주
를 한 순간인들 온전히 담아낼 수 있을까.
언제 가득 채워 잔치상에 내어놓을 수 있을까.
내일은 금이 간 몸둥아리를 고쳐보겠다고 병원에 가는 날이다.
이참에 아주 금이 간 영혼까지 땜질해 주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