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묵상]
기복신앙-유치하지만 가장 진실하고 순수한 기도
복음에서 예수님을 만나 치유된 사람들
점수가 잘 나왔다고 좋아하던 것도 잠시, 하루만에 고득점자가 수 만명이라
는 소식을 듣고 불안해하던 딸애가 특차를 지원해놓고 기다리는 초조한 어느
날이다.
"엄마, 하느님께 대학에 꼭 붙게 해달라고 기도해도 될까?"
문득 초등학교 일학년 때 "달리기에서 일등 하게 해달라고 기도해도 들어 주
실까?"하고 물었던 때의 일이 생각났다.
"만일 네가 일등 하게 해달라고 간절히 기도를 청해서 하느님이 너를 예쁘게
생각해서 들어주신다면......만일 죽어라고 열심히 연습하고 노력해서 일등
하려고 했던 아이가 있다면....어떻겠니?"
딸은 아무 말도 못하고 있었다.
"먼저 열심히 연습하고 노력하고 그러면서 하느님께 자기의 소원을 비는거
야."
달리기는 아무래도 자신 없어하던 딸은 중학교에 가서야 겨우 달리기의 공포
에서 해방되었다.
운동장에서 땀을 흘린 대가였지만, 엄마의 말을 들은 이후부터 줄곧 연습했
던 것은 아니고 8명씩 줄을 세워놓고 꼴찌로 들어오는 아이들의 따귀를 무조
건 때리는 싸이코틱한 체육 선생님을 만난 이후의 성과였다.
이제 엄마보다 커진 딸이 눈물이 글썽해서 또다시 묻는 비슷한 질문이다.
6살 때 영세한 이후로 아침 저녁 열심히 기도하던 딸.
들고 갈 물건이 너무 많아 우산을 받쳐주면서 학교에 데려다 주던 날, 아침기
도를 못했다고 중얼중얼 하면서 길을 걸어가는 딸을 보면서 기도 안하는 나
를 부끄럽게했던 기억이 생생하다.
집안 식구들, 학교 친구들, 뉴스에 나오는 불행한 사람들에게 이르기까지 딸
의 기도 목록에 등장하는 인물은 많고도 다양했었다.
그런데 정작 자신에 관한 개인적인 욕망을 청하기엔 너무 죄송하다는 딸의 이
야기였다.
"다른 애들은 어떻게 하라고.... 만일 내 기도를 들어주신다면 다른 애들은
뭐야?"
옛날 내가 했던 이야기이다.
아니, 딸이 기도하지 못하는 더 큰 이유가 있었다.
어쩌면 자신의 기도를 들어주시지 않으면 하는 걱정이 마음 한구석에 있고,
그로 인해서 마음의 상처를 받고 하느님을 원망하게 되지나 않을까 하는 두려
움 때문이라고 하면서 눈물이 죽~ 흐른다.
전에 내가 했던 고민이었다.
자기 자신만의 원을 청하는 은 얼마나 많이 배격해야할 것으로 들
었는지....
내가 전에 그랬듯이 자신의 일을 결코 청해보지 않았다고 자랑(?)삼아 이야기
하는 고상한 신앙인들을 가끔 만난다.
나는 딸에게 이런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성서에서 예수님께 와서 소원을 성취한 사람들의 다양한 모습들에 대해
서.....
간절한 자신의 염원을 무릎을 꿇고 애원하는 사람들, 예수님의 옷자락만이라
도 만지려고 하는 사람들, 나무 꼭대기 위에서라도 한번 보길 원하는 사람
들, 사람들의 구박을 받으면서도 목 터지게 예수님을 부르는 사람들......
예수님의 입장에서 보면 사람들은 누구나 주님께 간절히 청해야 할 것이 있
는 사람들뿐이다.
그것이 다급한 사람과 다급하지 않은 사람들, 그것을 인식하고 있는 사람과
아직 모르고 사는 사람들로 구별될 뿐이다.
예수님은 다급한 요청이 없어도 청을 들어주시기도 하고, 요청을 해도 '정말
원하고 있느냐'하고 재차 묻기도 하셨다.
요청이 있어도 그냥 지나쳐버리신 일도 허다했다.
즉 모든 사람에게 똑같은 방법이 아닌 모두에게 다 다른 방법으로 관계하신다
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과의 관계는 어디에서 본 것같고 들은 것같은, 피상적인 관계
가 아니라 자신과 나누는 관계라는 것이다.
성서에서 만난 하느님은 하느님이다.
어떤 이에게 기적을 베푸신 하느님은 하느님이다.
그분은 어디까지나 그때의, 그들의 하느님이지 하느님이 아니
다.
내가 변화하는 시간들 안에서 구체적으로 마주 대하는 하느님이 '나의 하느
님, 나의 주님'이시다.
내가 만난 하느님도 매일의 모습이 다르고, 시시각각 내게 주시는 깨달음도
다 다르다.
그래서 '살아있는 하느님'이라고 한다.
예수님께 간절한 청이 있으면서도 그분께 무릎을 꿇지 못하는 것은 어쩌면
저 혼자 할 수 있다는 교만일 수도 있다.
성서에서는 힘을 발휘했지만 지금은 아닐 것이라는 '죽은 하느님'을 믿는 것
일지도 모른다.
예수님께 거절당할까봐 상처를 받을까봐 청하지 않는 것은 정말 그분을 주님
으로 믿는 것이 아니다.
그 상처가 제 풀에 생긴 것이라 할지라도 그것마저도 그분이 치유해주신다는
믿음이 없는 것이다.
사람도 정말 깊이 사랑하려면 그의 좋은 것만 보고 멀리서 사랑하는 것이 아
니듯이.....하느님과도 정말 가까워지려면 실망도하고 원망도하고 그러면서
사랑이 깊어가는 것이다.
예수님은 그런 친밀한 관계를 원하신다.
그래서 '인격적인 하느님'이라고 하는 것이다.
용기를 내어 무릎을 꿇고 떼도 써 보라.
때로는 기복 신앙만큼 절실하고 순수한 것도 없다.
내가 해본 기도 중에 그것만큼 간절하고 열심한 기도는 없었다.
그런 기도에 응답해주신 일들은 언제라도 생생한 이었다.
누가 들려주는 신앙의 원칙들은 때로는 너무나 피상적이고 일반적이다.
일반적이고 피상적인 원칙들에 꽁꽁 묶이다보면 나도 모르게 '바리사이'가 되
어버린다.
딸은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라파엘의 집에서 봉사해 본 이후로 그런 사람들을 치료해주며 도움을 주고
살아가는 것이 뜻깊은 인생이 될 거라고 생각되어 의사가 되고 싶다.'고....
그래, 하느님은 그런 청이라면 들어주실 지도 모른다.
그러나 전혀 다른 몫의 인생을 열어 가시기를 원할 지도 모른다.
딸은 특차에 떨어지고 다시 정시에서도 의과대학을 지망했다.
발표 날을 기다리는 딸은 벌써 마음이 편해진 것같다.
두려움 없이 간절히 기도하고 나면 모든 것은 주님의 뜻대로 맡겨지는 것이
다.
나도 병을 이겨내게 해달라고 기도한다.
아주 찐하게 '살려달라'고 떼를 쓸 때도 있다.
병 자체보다 암(癌)이라는 이름이 가지고 있는 마력(魔力-때때로 하느님의 사
랑을 의심케하는, 절망의 늪에 빠뜨리는 악마적인 힘)에서 해방되게 해달라
고 수시로 간청한다.
어떤 사람은 미리 기도의 타당성을 논하고 하느님의 뜻을 살펴야 한다고 말할
지 모른다.
딸에게도 하느님의 입장을 설명하고, 기도의 타당성을 조사하며 미리 실망하
지 않는 법을 가르치지 않았듯이.....(그것은 하느님이 가르치신다.)
나는 자신에게도 신앙을 변호할 변론을 미리 준비하지 않는다.
하느님이 원하신다면 .....들어주실 수도, 안 들어주실 수도 있다.
그것으로 족하다.
그래도 간절히 청하는 것이다.
그분은 내 하느님이니까.......그분이 나를 보고 자녀라고 했으니까.....
2001.01.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