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 2주간 화요일 복음(마르 2,23-28)
열심한 개신교 신자인 아들 친구의 어머니가 상담을 요청하였다.
아들이 주일날 교회에 나오지 않는다는 고민이었다.
이런 이야기는 교사였던 나에게 우리 성당의 어머니들이 가끔씩 쏟아놓는 고
민이기도하다.
언젠가 열심한 딸애도 "꼭 주일날 성당에 가야만 하는 것인가"하고 질문한 적
이 있다.
그러면서 "내가 이 다음에 다른 종교를 믿는다면 엄마는 어떻게 생각하
냐?"고 했다.
중학교에 들어가 세계사 시간에 서양사를 공부하면서 선생님이 그리스도교에
대해서 부정적인 이야기들을 해줄 때면 꼭 집에 와서 엄마의 생각을 묻던 아
이였다.
그럴 때마다 될 수 있는 한 중간적인 입장에서 늘 이야기를 해주었고 일반적
인 역사학자의 관점과 신앙인의 관점을 모두 이해할 수 있도록 설명해 주었
던 것이 엄마의 말을 더욱 신뢰하게 만들었던 것같다.
아무튼 신앙에 대해서도 편견이 없는 엄마라고 여겼는지 교리 시간에 배운 이
해 안되는 소리에 대해서도 마음 터놓고 의문을 묻곤 하였다.
학년이 올라갈수록 다른 종교에 대한 책들도 읽어가며 차차로 다른 성인들에
게도 호감을 가지게 되었기에 종교를 바꾸어볼까도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그럴 수 있고 그래도 된다"는 것이 나의 답변이었다.
놀란 눈으로 바라보는 딸에게 덧붙여 이야기하기를....
예수님 외에도 너무나 훌륭한 분들이 이 세상에 많이 살았었다는 것이 참으
로 다행스러운 일이다.
그분들의 가르침은 너무나 좋아서 어느 하나라도 진정으로 잘 따라 살수만 있
다면 세상이 얼마나 더 좋아지겠느냐?
나도 그분들을 좋아하고 그분들의 가르침에 감탄을 한 적이 한 두번이 아니지
만 그러나 나는 예수님을 만난 것이 먼저이고 그분이 너무 좋아서 아주 오래
된 친구를 버릴 수가 없다.
내가 힘들고 아플 때마다 그분은 내 곁에서 힘을 주셨고 좋은 일이 생길 때마
다 같이 기뻐하셨던 분이고 무슨 일을 하려 할 때마다 바른 길을 가르쳐 주셨
던 분인데......
나는 그분에게서 부족함을 느껴보지 못했는데 뭐하러 다른 친구를 얻으려고
하겠느냐?
처음으로 사랑을 가르쳐주셨고 사랑을 쏟아 부어주신 분을 배반하는 것은 사
람의 도리가 아니라고 생각한다는 대충 이런 내용이었다.
이야기를 듣고 있던 딸은 눈물을 글썽이며 자신의 과거를 회상했다.
초등부 반주를 맡고 있을 때, 반주가 틀리기만 하면 노려보던 신부님이 있었
다.
어린이 미사였지만 떠드는 아이들, 동전 소리를 내는 아이들, 전례 예절을 틀
리는 복사들, 해설자들에겐 살얼음같은 공포의 한 시간이었다.
소심한 딸애는 반주가 행여나 틀릴까봐 얼마나 연습을 해갔는지 모른다.
그런데도 덜덜 떨려서 언제나 미사 전에 묵주기도를 한 꾸미씩 하면서 성모님
께 빌었다고 한다.
성모님은 늘 넓은 치마자락으로 자신을 감싸주시는 것같았다는 이야기, 그래
서 한번도 틀리지 않고 반주를 해 냈을 때의 안도와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
었다는 이야기였다.
그밖의 자기 나름의 하느님 체험을 이야기했고 그 기쁨의 기억들을 회상해내
는 딸의 눈이 글썽글썽했다.
결론은 "나도 예수님만큼 좋은 분이 없어. 종교를 바꾸는 일은 없을거야."
어른들에게는 어른만큼의 체험이 있고, 아이에게는 아이만큼의 체험이 있는가
보다.
그런 후로 여전히 열심히 성당에 다니고 있고 어쩌다 주일에 빠지게 되는 날
이 있으면 마음이 괴로운 것같았다.
주일 날 빠지느냐 아니냐의 문제는 본질적인 문제가 아니다.
주일, 하느님과 만나는 그 시간이 얼마나 나의 기억에 아름답고 즐거운 시간
의 체험들이었느냐가 문제이다.
즐거운 곳, 언제나 안식을 주는 곳, 진한 감동을 맛보았던 곳, 평화를 느꼈
던 곳, 위안을 주는 곳, 사랑이 가득한 그 곳은 그 장소가 어디이든 내가 어
떤 상태이든 찾아 나서게 되는 것이다.
그것들은 누가 만들어주기를 바라서는 절대로 느낄 수 없다.
마음을 열고 온갖 편견을 버리고 자신이 적극적으로 만들어가야만 열리는 세
계이다.
분위기를 살얼음장으로 만드시는 신부님이 있다고 해서 못 만나는 기쁨이 아
니다.
사목회 임원들이 설쳐대서 못 느낄 평화가 아니다.
참견장이 수녀님이 있다고 해서 못 가질 안식이 아니다.
그 누구가 뺏어가지 못할 온갖 보물들을 마련해 놓고 주님은 부르시는 것이
다.
결석을 하거나 미사 시간에 떠들고 장난만치는 주일학교 친구들을 미사가 끝
난 후 제단 앞으로 불러내어 계단에 모두 무릎을 꿇린 다음 손을 합장하게 하
고 십자가를 쳐다보게 하면서 나는 이런 기도를 했었다.
"주님, 주님이 오늘 저희에게 주시려던 선물들을 제대로 받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선물의 목록을 매번 바꾸어 이야기하면서 "다음 주일에는 주님이 저에
게 주시려고 애써서 마련한 선물들을 꼭 받을 수 있도록 도와주셔요."라고 기
도하고 돌려보낸다.
그들이 알아들을 지는 모르지만 그 얘기를 매번 반복하는 것은 미사란, 주일
이란 주님의 선물을 받는 기쁜 날임을 인식시키려는 나의 안간힘이다.
혼날 줄 알고 남았다가 기도를 하자고 하는 말에 안심하던 녀석들.
기도하고 난 후에는 시키지도 않은 인사를 꾸벅하며 의젓하게 돌아가던 녀석
들의 모습이 생각나 갑자기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안식일은 본래 하느님이 엿새의 창조 후에 이레째 되던 날 쉬셨기에 인간도
마땅히 <쉬어야 한다>는 것에서 출발하여 나중에는 출애굽에서 해방시키신 <
해방의 의미>를 기억하라는 하느님의 명령이면서 동시에 인간에게 주신 선물
이다.
<하느님 앞에서의 거룩한 쉼>이라고 출애굽기는 정의한다.(출애 20, 8-11)
그러므로 엿새간의 잡다한 이기적인 욕망에서 <해방>되고, 우리 손으로 이루
겠다는 그릇된 생각을 <종식>시키며, 우리의 정신과 영혼을 하느님 앞에서 맑
게 정화시키는 날이다.
과도하게 유출되는 아드레날린을 억제시키고 엔돌핀을 뿜어내게 하는 기분좋
은 하루를 만들기를 원하시는 것이다.
그래서 신앙인의 안식은 이불 속에서 그저 뭉그적거리는 것이 아닌, 하루를
아무 뜻없이 무위도식하는 것이 아닌 <적극적인 하느님과의 만남>인 것이다.
하느님 안에서만이 진정한 안식이 있기 때문이다.
하느님 안에서만이 진정한 해방이 있기 때문이다.
예수께서는 당신이 안식일의 주인이심을 밝히시면서 안식일은 사람을 위하여
있는 날이라고 하신다.
주님께서 나를 위해 마련하신 날, 그 안식일은 계명이라는 속박 때문에 지켜
야할 날이 아니라 해방의 기쁨을 만끽하는, 나 스스로가 주체가 되는 '나의
날'이어야한다.
안식일을 지키라는 계명에 질질 끌려다녀서는 재미가 없다.
안식일의 주인은 주님과 내가 되어야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