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방이나 표정을 지니고 있다.
방 주인이 어떤 사람인지 보여주는 각양각색의 표정들.
방학이 시작되어 분원공동체를 떠나 본원에 머무르면서 내가 거처로
삼고 있는 방에 들어서면 그 '방의 표정'에 대해 더 생각하게 된다.
내가 지금 묵고 있는 방은 해외에 나가 있는 어떤 수사님의 방인데
작은 옷장 하나와 침대, 책상이 있는 이 길쭉한 방은 원주인의
아주 질박한 성품을 잘 드러내는 표정을 하고 있다.
한쪽 벽에는 십자고상이 걸려 있고 그 아래에는 '침묵'이라는
글씨가 붙어 있다.
늘 웃는 표정인 그 수사님은 아마 침묵에 대해 어떤 지향을 갖고
있나보다. 그 마음 속은 알 수가 없지만 그냥 한지에 쓰인
침묵이라는 붓글씨는 마음으로 스며오는 힘을 지녔다.
왼쪽 부분이 조금씩 아래로 내려간 독특한 글씨체다.
'묵'자의 'ㅜ'부분은 그냥 점으로 되어 있어 얼굴의 인중 같고
받침의 기역은 꼭 다문 입을 보는 것 같다.
형제들과 있을 때 즐겁게 웃고 이야기를 나누던 그 수사님이
이 작은 방에 들어와 침묵하며 지내는 모습을 생각해본다.
책을 읽거나 생각에 잠기거나 하는 모습.
그는 존재감이 별로 느껴지지 않는, 이를테면 책상 머리의 화분과
같은 모습으로 여기 있지 않았었을까.
침묵은 단지 소리를 내지 않는 것이 아니다.
사람은 몸짓으로도 눈빛으로도 말을 하는 존재니까.
침묵의 최고 형태는 자신의 존재가 드러나지 않는 상태에
있는 것이다.
어디에 있더라도 드러나지 않는, 그러면서 있을 곳에서
제 몫을 다하는 침묵.
방학 동안 임시거처로 삼은 방에 앉아
침묵에 대해 생각한다. 원주인처럼 조용한
이 방의 표정 앞에 앉아 생각해본다.
분원의 내 방은 어떤 표정으로 나를 기다리고 있을까.
<2001. 1. 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