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 1주간 수요일 복음(마르 1, 29-39)
오늘 복음은 예수께서 가파르나움에서 행하신 활동들을 집약해서 모아 놓은
대목들이다.
이 집약문들 속에서 나는 예수님의 이중적인 모습에 주목하고 있다.
예수께서는 고정된 한가지의 방식으로 사람들을 대하시지 않으셨다.
예수께서 사람들의 병을 고쳐 주시는 모습과 사람들을 대하는 방식은 매양 다
르다.
가파르나움 회당에서 더러운 악령을 내 쫓으실 때의 모습은 준엄하고 매서운
모습이었지만 시몬의 장모가 열병으로 누워있다는 사정을 듣고 치유시켜 주시
는 모습은 더없이 자애로운 모습이시다.
"그 부인 곁으로 가서 손을 잡아 일으키시자....."
악령들린 사람을 치유시켜 주실 때 보았듯이 예수의 말씀의 위력은 이미 증명
이 되었다.
한마디 말씀으로도 할 수 있었으나 그렇게 하시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노인과 살아 본 경험이 있는 사람은 알 것이다.
손을 잡아 주는 것, 가까이 다가가는 것이 그들에게는 백약(百藥)보다 효험있
는 치료라는 것을...
부인은 "열이 내리고 그들의 시중을 들었다."
열이 내린 것이 끝이 아니고 그들의 시중을 들었다는 것이 끝이다.
예수께서 먼저 부인의 시중을 들었고 부인도 예수처럼 시중을 들게 되었다는
것이다.
잠시 몸을 움직여 손님 대접을 했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시중을 받던 삶'에서 '시중을 드는 삶'으로의 전환을 말함이다.
'나'중심의 삶에서 '타인'중심의 삶으로 바뀌고 있음을 말함이다.
예수께 치유받은 이의 삶은 봉사의 삶이어야 한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해가 지고 날이 저물도록 예수께서는 병자들과 마귀 들린 사람들을 돌보아 주
셨다고 기록하고 있다.
쉬임없이 사람들을 위해 봉사하시는 예수의 모습은 늘 이처럼 열정적이고 헌
신적이다.
"다음날 새벽 예수께서는 먼동이 트기 전에 일어나 외딴 곳으로 가시어 기도
하고 계셨다."
'외딴 곳으로 가시자 기도하셨다'는 것이 아니라 기도하시기 위하여 일부러
새벽 먼동이 트기도 전에 몸을 일으켜 외딴 곳으로 가신 것이다.
날이 저물도록 일하고도 피곤한 몸을 일으켜 아무도 방해하지 못할 시간과 장
소를 찾아-시몬의 일행이 찾아다닐 만큼- 나서는 예수의 모습은 <기도를 위
한 필사적인 노력>이 아니겠는가?
어제의 복음 묵상에서 이야기했듯이 이미 예수께서는 공생활을 시작하시기 전
에 철저한 준비를 마치고 나오신 분이다.
그래도 하루의 일과를 시작하기 전, 아버지이신 하느님과 하루 계획표를 짜
고 준비하시는 분이시다.
일생을 아버지의 뜻에 맞게 살았다는 것은 어쩌면 매일을 아버지의 뜻을 묻
고 의논하며 살았다는 이야기의 연속일 것이다.
예수의 쉬임없는 활동의 힘은 이렇게 아버지와의 은밀하고도 친밀한 기도에
서 나왔던 것임을 짐작할 수 있겠다.
"모두들 선생님을 찾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열병(熱病)에 들떠 있는 하나의 원인은 '인정받고 싶은 욕구' 때문
이다.
남을 위해서 봉사한다고 하면서도 그 마음 안에는 손톱만큼씩이라도 이런 욕
구가 있음을 내 자신을 들여다보면서 느꼈다.
모두들 좋은 일 한다고 찾고, 능력이 있다고 찾고, 아름답다고 찾고, 따듯하
다고 찾고, 넉넉하다고 찾고, ......그렇게 나를 찾는다면....아! 생각만 해
도 살맛이 나지 않을까?
당신을 찾아 헤매는 사람들에게 당신의 모든 것을 나누어줌이 마땅할 터인데
도 예수께서는 그들을 그대로 놓아 둔 채로 발길을 돌리신다.
이해할 수 없는 예수의 단호함과 냉정함은 무엇 때문일까?
"이 근방 다음 동네에도 가자. 거기에서도 전도해야 한다. 나는 이 일을 하
러 왔다."
당신을 찾고 의지하고 옹립하려는(그들에게만 가둬두려는) 기대를 묵살하시
는 이유를 그분의 사명에서 찾을 수 있다.
그분의 사명은 당신을 위한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나라를 이 세상에 두루 널
리 구현시키는 것에 있었기 때문이다.
당신을 세상에 파견하신 하느님의 목적에 위배되는 어떠한 것도 단호히 배격
하시는 그분의 엄격함이 드러나는 말씀이다.
이처럼 '무엇 때문에 살고 있는가'를 명확하게 정립하고 인식하는 사람이 있
다면 그의 삶은 얼마나 명명백백하고 자신에 차 있고 힘이 넘치겠는가?
사람들의 요구에 좌지우지되고 떠밀리는 삶이 아닌 자신의 중심을 확고히 잡
고 있는 사람의 시간은 한치의 허술함도 없다.
예수께서는 "이렇게 갈릴래아 지방을 두루 찾아 여러 회당에서 전도하시며 마
귀를 쫓아 내셨다."
오늘 복음은 예수의 자신을 불사르는 역동적인 활동과, 정적과 고독 안에서
기도하시는 고요한 모습이 생생하게 집약되어 있다.
또한 자신에게는 엄격하시면서도 병마에 시달리는 사람들에게는 혼신을 다해
도와주시는 한없이 자애로우신 모습이 드러난다.
성서에서, 각양 각색의 사람을 대하는 태도에서 보여지는 예수의 이중적인 아
니 다중적인 모습은 한마디로 자신의 방식이 아닌 상대의 방식에 맞추어 주
는 참다운 봉사의 정신-'섬기는'-에서 비롯된다.
그분은 한가지의 품성으로 고착되어 있지 않다.
루가복음에서 주로 만나게 되는 자애로운 모성(母性)과 마태오 복음에서 발견
되는 지엄하신 부성(父性)이 혼재되어 있는 것이다.
이중적인 인격이라 함은 부정적인 의미로 씌어지지만 애초에 사람은 누구나
그 마음 안에 온갖 성품이 다 공존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
약함과 강함, 느림과 빠름, 부드러움과 강인함, .....그런 것들의 복합체가
사람이 아니든가?
예로부터 우리 조상들은 정절(貞節)의 대명사인 춘향이나 효심(孝心)의 본보
기인 심청을 이상(理想)으로 삼고있었지만 그네들의 숨은 단면을 보면 서릿발
같은 무정함이 내재되어 있다.
변학도에게 모진 매를 맞으면서도 일일이 앙칼지게 대드는 춘향이의 모습은
이도령 앞에서 보여지던 부드럽고 사랑스러운 여인의 모습은 아니다.
눈이 안 보여도 좋다고 흐느껴 우는 아버지를 매섭게 뿌리치고 자신의 몸을
산 제물로 바치는 심청이의 투사적인 면모도 아버지의 불행을 아파하는 연약
한 소녀의 정감 어린 심성은 아닌 것이다.
어찌 춘향과 심청뿐이랴.
나이를 먹어감에 따라 생의 다양한 변화를 거치며 여러가지 색깔의 나를 발견
해나가는 중이다.
다만 그 다양한 색깔의 품성들이 적재적소에 알맞게 드러날 때 아름다운 사람
이 되는 것이리라.
예수님처럼 분명한 자신의 신조를 가지면서도 모든이에게 모든 것이 되어 주
는 사랑이 풍성한 참 자유인이 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