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한 아기가 태어났습니다.
마굿간의 구유 위에 눕혀졌습니다.
하느님의 아들. 세상을 위해 가장 낮은 자리에 오신 분은
빵이 되어 모든 이들에게 먹혀질 것입니다.
생명을 위한 양식입니다.
그래서 정말 그 분은 말먹이통인 구유 위에 계신 걸까요?
2.
성탄 전 전날은 가족 모임이 있는 날이었습니다.
어렵게 시간을 내어 갔더니 조카가 딸애를 데리고 왔더군요.
세살 박이 꼬마 녀석은 내게 와서 "할아버지, 뽀뽀!" 하고선
볼에 입맞춤을 해주었습니다. 갓난 애기 때 보고 처음 보는 건데
낯가림도 하지 않는 이 손주 녀석(?)은 나중에 아장아장 다가오더니
작은 파운드 케이크 한 조각을 내밀었습니다.
아마 제 몫을 주는 모양입니다.
예쁜 아이들. 기쁨과 평화를 건네 주는 생명인 아이들.
아이들을 볼 때마다 나는 속으로 아이를 축복하는 기도를
바치곤 합니다. 그 마음은 복음서에 나오는 사람들의 생각과
하나도 다르지 않을 것 같습니다.
"이 아이가 장차 어떤 사람이 될까?"(루가 1,66)
3.
우리 수사님 가운데 한 분이 24일 날 아버지 상을 당해서
오늘은 장례식에 다녀왔습니다.
형제들과 함께 미사를 드리고 장지에도 다녀왔습니다.
언 땅을 파고 하관을 준비하는 동안 우리는 묵주 기도를 바쳤습니다.
고운 흙이 수고로운 일생을 마치고 잠든 그 분의 관 위에
덮일 때 "너는 흙에서 왔으니 흙으로 돌아가리라" 하는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재의 수요일 전례 때 듣는 말씀입니다.
평생 봉쇄 구역 안에서 살면서 기도와 침묵과 노동으로 살아가는
트라피스트 수도자들은 늘 묘지에 다음 사람을 위한 빈 무덤을
파놓고 죽음을 묵상한다고 합니다.
실상 누군가가 죽지 않으면 어느 것도 태어날 수 없는 법입니다.
성탄절에 예수님의 탄생과 수사님 아버지의 죽음을 생각합니다.
끝없이 비우고 떠나는 것은 한없이 채우고 돌아오기 위함입니다.
어쩌면 우리 삶은 그러한 끝없는 사랑의 여정이 아닐까요?
성탄을 맞아 이 글을 읽는 모든 분들 마음 속에
아기 예수님을 모시기를 빕니다.
세상에 오신 우리 주님의 평화가 모든 분들과 함께!
<2000. 12. 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