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한 소녀가 노르망디 해변에 서서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북해를 바라보며 소녀는 지나간 인류의 모든 문명과 삶을
노래했는데 그 노래는 "오, 하느님, 무언가 남아 있게 하소서"
하는 후렴으로 끝나는 것이었다.
그 소녀의 뒤에 아일랜드 시인 예이츠가 서 있었다고,
그래서 그는 이 아름다운 이미지로 가득한 이야기를 글로
남겨 놓았다.
검푸른 북해, 작은 소녀의 흰 발, 끝없이 이어지는 높고
여린 노래 가락....
2.
내가 학교 다니는 길에 아주 늙은 할머니가 사시는 집이
있었는데 그 분이 돌아가셨는지 집 앞에 솥단지가 걸리고
음식들이 차려지고 사람들이 북적거리더니 그 다음날인가
학교에서 돌아오는 길에 보니까 할머니 사시던 집이 통채로
없어지고 빈 터에 집을 부수고 남은 목재가 쌓여 있었다.
집이 있던 자리는 그렇게 보니까 한 줌도 안 되는
땅처럼 보였다. 한 영혼이 거처하던 자리가
저렇게 맥없이 없어지는구나....
3.
젊어서 세상을 떠난 고정희 시인은
"모든 사라지는 것들은 뒤에 여백을 남긴다"
라고 썼었다. 자연은 진공을 싫어한다고 하지만
영혼의 빈 자리는 자연이 허락하는 가장 큰 여백이 아닌가 싶다.
늦가을 공연히 쓸쓸해지는 마음.
예전에 부르던 노래로 마음을 위로해볼까,
북해를 바라보며 선 소녀라도 된 듯이.
모두가 사라진 숲속에는
나무들만 남아있네.
때가 되면 이들도 사라져
음음 고요만이 남겠네.
바람아, 너는 알고 있니.
비야, 네가 알고 있니.
무엇이 이 숲속에서
음음 이들을 데려갈까.
-아름다운 것들 3절 -
<2000. 11. 25>
# 1의 내용은 존 s. 던의 [시간과 신화](가톨릭 출판사) 제 1장에서
따온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