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 강의가 끝나면 책을 보다가 학교 뒷산 산 그림자가 길게 꼬리를
늘일 무렵 주섬주섬 가방을 챙겨 집으로 돌아온다. 아무래도 등교길보다는
하교길이 여유로운데 그래서 그런지 아침보다 오후에 집에 오는 시간이
더 걸리는 것 같다.
교문을 나서면 은행나무 가로수가 멋있는 학교 진입로가 일 킬로미터는
좋이 직선으로 뻗어있다. 이제 보름쯤 지나면 이 길이 노랗게 물들어
예전에 잘 걸어다녔던 덕수궁 뒤편 돌담길처럼 변하겠지.
나는 그 길로 걷지 않고 학교의 축대 아래 길로 접어든다.
아파트가 몇 채 들어서 있는 이 길에는 꼬마애들이 가끔 나와 논다.
오늘도 이 길에서 앙징맞은 꼬마 수첩을 주웠다. 돌려줄 길이 막연한
이 수첩에는 전화번호들이 적혀있다. 00이, *0이.... 수첩 주인은 이
곰돌이 푸우 수첩을 잃어버린 것을 알고나 있을까.
그 길 끝에서 굴다리를 지나 논두렁길을 걷다보면 전형적인 시골 농가들이
옹기종기 모여있다. 한 집 뒤꼍에는 토끼가 두 마리 사는 토끼장이
있는데 지나갈 때마다 아카시아 잎을 넣어주었더니 이제는 먼 발치서
나를 보기만 해도 벌름대는 코를 창틀에 들이밀곤 한다.
살아있는 것들은 좋게든 나쁘게든 길들여서는 안 되는 것인데...잘
모르겠다.
그 다음 집에는 작은 상자 속에 강아지가 두 마리 산다.
요 녀석들은 내가 지나가면 쇠창살에 앞발을 걸치고 나란히 서서
깽깽 짖으면서 꼬리를 흔들어댄다.
마치 사람인 양 둘이 나란히 서서 꼬리를 흔들고 있는 녀석들의
표정은 얼마나 재미있는지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싶을 정도.
거기를 나오면 고속 철도가 지나가는 다리 밑으로 구불거리는 길이
아주 길게 뻗어있다. 이때 쯤이면 조금 지쳐있어서 길이 더 멀게
보이는지도 모르겠다. 이 구불구불한 길 중간참에 참 버드나무가
있는데 봄부터 누군가가 자꾸 밑둥의 껍질을 벗겨 나무를 죽이려
하고 있다. 나무는 껍질을 벗겨도 자꾸 푸른 새 잎을 내더니
이제는 가지 끝에 푸른 잎을 몇 개 매달고 있을 뿐 기진맥진해서
곧 죽을 것 같다.
밤을 물고 길을 건너다가 차에 치어 죽은 청설모를 본 것도 이
길에서였다. 가끔씩 몸의 가운데를 차 바퀴에 눌려 어이 없는
모양으로 고통스러워 하는 뱀을 보는 곳도 여기다.
살아있는 것들에 대해 너무 예의를 차리지 않는 세상이다.
그러면서 사람들은 대접을 받고 싶어하는 걸까?
가을걷이가 한창인 논을 바라보면서 돼지들과 오리가
사는 농장을 지나고 커다란 미루나무가 선 고개 아래를
지나면 우리 집이다.
매일 다니지만 언제나 새로운 길.
이 길 가운데에서 나도 어느 덧 무르익은 새 가을을 만나고 있다.
<2000. 10. 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