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오로인은 성바오로의 표양대로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살아갑니다.
(창립자 G.알베리오네)
(창립자 G.알베리오네)
<출발,월요일>
사회적 원죄?
아담과 에와는 최초의 인간이고 이들이 지은 죄는 최초이기 때문에 원죄라고 한다.
그러나 죄를 지어서 받는 벌은 아담과 에와에서 끝나지 않고,
후손에게까지 대대로 전달된다.
그래서 우리는 태어날 때 원죄를 안고서 죄인으로 태어난다.
그런데 사람은 죽지않고 에덴동산에서 복을 누리며 영원토록 살아갈 수 있었다.
그러나 원죄 탓으로 에덴동산에서 쫒겨나 사람은 죽어야 하고,
피땀을 흘리고 수고를 해야 먹고 살아갈 수 있게 되었다.
이것은 자신이 아무 것도 하지 않았는데도 그냥 물려받는 업보이다.
이것을 원죄의 원조라고 말할 수 있다.
우리가 살아가는 한국사회에 이와 비슷한 원죄의 형태들이 있다.
분명 내가 지은 죄가 아닌데,
그 결과가 나에게, 우리에게 나쁘게 전달되고 연결되는 원죄와 유사한 것으로
사회적 원죄라고 말할 수 있다.
첫번째는 지역감정이다.
전라도 사람은 경상도 사람을 싫어하고 증오하며 악담을 퍼부으며,
마찬가지로 경상도 사람은 전라도 사람을 싫어하고 증오하며 손가락질한다.
그러면서 서로 영문도 모른채 무작정 죽음의 파국으로 치닫는다.
우리 마음에 널리 자리잡은 막연한 증오심이 바로 사회적 원죄이다.
두번째는 북한감정이다.
북한에 대한 우리의 감정은 무조건 부정적이어야 한다.
북한은 무조건 나쁘고 우리에게 해악를 끼친다고 생각해야 한다.
그래서 상대방이 우리와 의견과 생각을 다르게 고집하고 말하면
상대방을 빨갱이(또는 종북)로 몰아부친다.
그리고 분위기를 경직시키고,
사람의 자유를 빼앗을려고 덤벼들고, 일상생활을 감시하려고 하며,
사람들이 다른 생각을 못하도록 만들어, 사람들을 단순한 노예로 만들어버린다.
세번째는 일본감정이다.
이것은 상기한 두가지 감정과는 사뭇 다르다.
일본과 일본사람에 대한 나쁜 감정이 아니라,
과거 일제시대에 일본권력에 빌붙어서 자신의 안위만을 취하고
그리고 민족을 팔아먹고 백성을 착취했던
친일 부역자들(정치인, 언론인, 사회지도자, 종교지도자)을 청산하지 못해
지금까지 나라가 혼란스럽고 한국사회 분열의 원흉이 되기 때문에 생겨나는 감정이다.
이와 같은 일본감정의 폐해는 우리가 여전히 겪고있는 사회적 원죄이다.
그러면 원죄의 결과는 무엇일까?
첫째, 유전무죄 무전유죄의 사회가 대대로 이어지고 있다.
황금만능사상으로 가득 차 있어서 돈이면 최고이고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최근 가습기살균제의 가해자에 대한 솜방망이 처벌로써 유명해진
사법부의 부패가 이것을 전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그런데 진짜 문제는 유전무죄의 악습이 여전히 대대로 이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나와는 상관없이. 호심탐탐 우리를 잡아먹을 때만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한국사회가 자살공화국으로 알려진 것도 결코 우연이 아니다.
둘째, 국민을 개돼지로 보고, 계몽의 대상으로 보며, 레벨이 낮은 대상으로 보고,
지배대상으로 생각하는 갑질 의식은 무섭도록 널리 퍼져있다.
그런데 이러한 갑질 의식은 1%의 계층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나에게도 무의식적으로 존재한다는 것이다.
아마도 내게 기회가 닿기만 하면 갑질을 무차별적으로 행할지도 모를 일이다.
진짜 문제는 바로 여기에 있다. 너나 할 것없이 갑질 의식을 잠재적으로 가지고 있다는 말이다.
세째, 한국사회는 빈부격차의 사회로 치닫고 있다.
가난이 대물림하고 있고, 신분상승이 불가능하다는 말은 이미 오래전부터 들려왔다.
이것은 사람들의 마음에 있는 희망을 갉아먹는 말이고, 절망감을 안겨주는 말이다.
사람들이 왜 결혼을 회피하고, 자녀출산을 회피하겠는가?
왜 이혼과 이민이 즐비하고 조국을 떠나고 싶다는 말을 하겠는가?
왜 이게 나라인가라고 말하고, 헬조선이라고 말하겠는가?
한국사회에 절망감이 가득차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러한 사회적 원죄를 눈을 부릅뜨고 직시해야 한다.
네째, 한국은 민주공화국이고 삼성공화국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삼성이 망하면 나라가 망한다고 흔히들 말한다. 이 말은 어제 오늘의 말이 아니다.
삼성이 전세계 악질기업 2위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만 알고 있다.
모든 것을 정상적으로 행하지 않고,
편법과 탈세 그리고 생명경시의 어두운 수법으로
한국사회경제를 주도해 나가고 있었으니,
한국사회에 끼친 악영향은 이루 헤아릴 길 없다.
결국 사회와 사람을 죽음으로 내모는 첨병역할을 해 온 것이다.
우리들 중 대부분이 이 사실을 모르고 서서히 죽음의 길을 걸어가고 있을 뿐이다.
이처럼 원죄의 결과는 전체적이다.
다섯째, 우리 한국사회에서 빨갱이라는 말은 거의 요술방망이와 같다.
요즈음 정치권에서 논란이 되고 있는 기본소득제를 실행하면
나라가 망하고, 공산국가(빨갱이 나라)가 된다고 말한다.
한국에서 제대로 복지정책을 실현하면 곧장 종북이 되고 빨갱이가 된다.
빨갱이가 한 짓이다라고 말하기만 하면
그것이 무엇이든 부조리, 비리, 불법행위가 면제되고,
사람들의 생각은 멈추고 순식간에 마비되어 버린다.
자신의 자유를 반납하고, 스스로 노예생활을 자청한다.
그런데 역사가 보여주는 것처럼 노예는 곧 죽음의 삶이다.
여섯째, 원죄의 결과는 민영화의 얼굴을 하고 나타난다.
상수도, 전기, 의료는 사람이 살아가는데 가장 기본적인 것들이다.
이것이 부족하거나 결핍되면 무슨 일이 발생하는가?
사람은 오로지 이것에만 정신을 쏟게된다.
겉으로는 노예가 아니면서 내가 거기에 매달릴 수 밖에 없으니
실질적으로는 노예가 되어버리고 만다.
기본생활이 보장 안 되면 돈 몇푼에 자신의 영혼을 팔아버릴 수도 있다.
민영화는 자본(돈)에만 관심을 가질 뿐, 사람에게는 원초적으로 관심이 없다.
일곱째, 사람의 생명을 경시하고, 돈을 벌고 권력을 유지하는데 사람을 수단으로만 생각하는
죽음의 문화가 한국사회에 흘러넘치는 것이 원죄의 가장 큰 피해이고, 가장 큰 문제이다.
아직도 한국의 하늘에는 살려달라고 울부짖는 수많은 혼들이 떠다니고 있고,
슬픔이 가슴에 멍들어 땅을 치며 통곡하는 사람들이 있다.
더욱 가슴아픈 것은 사람들의 마음에 연민의 정이 단 하나라도 없을 때이다.
생명을 경시하는 죽음의 문화, 사람을 돈과 권력의 수단으로 생각하는 무섭고 사악한 문화가
우리 사회의 진짜 문제이고, 사회적 원죄의 가장 큰 피해이다.
"인간이 무엇이기에 이토록 기억해 주십니까? 사람이 무엇이기에 이토록 돌보아 주십니까?"(시편8,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