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1주간 화요일
"안식일에 예수께서는 회당에 들어가 가르치셨는데 사람들은
그 가르침을 듣고 놀랐다. 그 가르치시는 것이 율법학자들
과는 달리 권위가 있었기 때문이다." (마르1,21~22)
말,말이 너무 많은 시대다. 하루도 빠짐없이 날아드는 각종
인쇄물!
각종 단체의 회보와 월보,온갖 종류의 신문과 잡지... 어떤
것은 펴볼 짬도 없이 스레기통으로 직행이다. 정신이 하나도
없다. 그런 식으로 버리는 쓰레기가 하도 아까워 뒷면이나마
메모지나 연습지로 활용해 보려 했으나 그것도 넘쳐난다. 무
슨 말들이 그리도 많은지, 실은 지금 이런 글을 쓰고 있는
나 역시 썩 달갑지 않은 모습니다. '왜 그때 안 된다고 끊어
버리지 못했을까?'하는 후회를 해봐도 소용이 없다. 이처럼
말은 많은데 왜 효과는 없을까? 우리 신부들이 강론을 못한
다고는 하지만 옛날에 비하면 백배 천배 나아졌다. 그태여
신부의 강론이 아니라도 각종 테이프. 비디오.슬라이드.영화
등 얼마든지 원하는 얘기를 원하는 시간에 들을 수 있다. 그
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별반 나아진 것이 없다. 그까닭은
말도 많고 가르침도 많아졌지만 권위 있는 가르침이 없기 때
문이 아닐까?그러면 그 권위는 어디서 나오는가?
한때는 상대방의 지위와 명성이 그만한 권위를 부여하기도
했다. 어떤 글이나 가르침의 근원이 교황이나 추기경,이름
있는 학자나 명성 있는 성직자일 경우, 일단 그 권위가 살아
있었다. 그러나 근래에 와서는 꼭 그렇지만도 않다. 나는 어
떤 조직이나 제도가 부여한 권위엔 별 관심이 없다. 요즈음
엔 오직 상대방의 삶의 역사만이 권위를 부여해 줄 뿐이다.
그 말을 한 그 사람이 누구이며 어떻게 살았고 어떻게 살고
있는 사람인가에 따라 권위를 인정한다.
이제 더이상 사람을 꾸미는 껍데기에 속지 않기로 했다. 이
제 내가 인정 하는 권위는 오직 하나 그가 얼마나 예수님을
따라 예수님처럼 살아왔고 또 살고 있는가? 그리고 얼마나
저히 회개한 삶을 사는 사람인가? 하는 것이다. 하느님 아
버지께 철저히 사로잡힌 삶,예수의 권위는 오직 여기에서 나
왔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