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뭐든지 잘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휴가
조원희 쟈카르도 수사
서울역을 다시 찾은 것은 1년 반만이다. 군대에서 첫 휴가를 나온 것 같은 기분이 들기도 한다. 길가에 늘어선 포장 마차며 더덕더덕 붙은 음식점들이 생소한 느낌으로 다가온다. 수도원에 들어 온 지 몇 해가 지나고 이제는 나이로 보나 얼굴로 보나 한창 먹을 나이라는 소리를 들을 때는 지났다고 생각한다. 집으로 향하는 것은 언제나 좋았다. 고등학교를 졸업하면서 집을 떠났지만 돌아갈 곳이 있다는 생각은 언제나 위로가 되어 주었다.
"왜관까지 제일 빠른 시간 걸로 아무거나 주세요."
귀찮다는 빛이 역력한 역무원 아저씨한테서 '서울-왜관' 글씨가 선명하게 찍힌 표를 잔돈과 함께 받아 쥐었다. 그리고 빈 의자가 있는지 주위를 살폈다. 장롱 만한 TV앞에 시선을 고정시킨 사람들 사이로 빈자리가 눈에 띄었다. 아버지 드릴 양주 한 병과 어머니 스웨터가 들은 가방을 한쪽에 내려놓고 금방 산 신문을 펴들었다.
경부선 공사가 한창이던 해, 낙동강의 물줄기가 돌아 흐르고 6, 25 격전이 아직도 생생한 작은 마을에서 원교는 태어났다. 어릴 적에 부모님을 여의고 고아가 된 아버지와 유아세례를 받았지만 신앙의 기억 없이 불교에 심취한 어머니 밑에서 4남매 중 막내로 세상에 났다. 원교는 어린 시절을 별로 기억하고 있지 않다. 놀라서 병원에 자주 갔던 일과 도로가에 작은 점방에 살았다는 것이 고작이다. 그 중에도 잊혀지지 않는 것은 막내 외삼촌이다. 조카들을 공부시키기 위해 엄하게 다루었으므로 어린 원교는 삼촌을 무서워했다. 공부하는 것 보다 노는 것을 더 좋아했으므로 어쩌다 삼촌을 마주치는 날에는 마구 가슴이 뛰었다. 간혹 삼촌은 원교를 외갓집으로 불러서 그때까지 학습상황을 물어보곤 했었다.
"원교야, 오늘 저녁에 받아쓰기 할테니 온 나이!"
"예∼에."
원교는 대답하자마자 엄마한테 달려갔다. 삼촌에게 말을 잘해서 외갓집에 가지 않게 해달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가까이 엄마의 얼굴을 보면 다른 이야기만 중얼거릴 뿐이다. 막내 외삼촌은 어린 원교에게 생각보다 더 무섭게 보였다. 어떤 날에는 형들과 싸우다가 돌을 던져 눈언저리를 찢거나 머리에 구멍을 내기도 했는데 그럴 때면 으레 삼촌한테 불려가서 혼나야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빡빡 깍은 머리에 창 모자를 쓴 삼촌이 집에 와 있는 것이 아닌가. 매형과 누나에게 군대 가기 전 인사를 하러 온 것이다.
"원교야 외삼촌 군대 간다. 그 동안 공부 열심히 하고 잘 있거라이~!"
"예∼에."
외삼촌의 작별인사에 시무룩한 표정을 짓기는 했지만, 원교는 배어 나오는 기쁨을 감추느라 애를 써야 했다.
평일이라 그런지 통일호 기차 좌석에는 드문드문 빈자리가 보였다. 서서히 출발하는 창 밖으로 조금 낯익은 풍경들이 스쳐간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잘 지내고 계실까?' 쓰러지신 지 2년 되신 작은 어머니와 사촌 철희는 잘 있겠지?'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동안 기차는 한강 위를 빠르게 지나가고 있다.
원교 네는 구멍가게를 청산하고 동네 사람들처럼 참외농사를 시작했다. 참외농사는 손이 많이 가는 농사다. 벼 수확이 끝나면 이모작을 위한 준비로 바쁘다. 논을 갈고 외상으로 읍내 농협에서 비닐을 사서 철근을 세워 고정시킨 자리에 비닐을 덮어 하우스를 만들고, 볏짚으로 거적을 만들어 아침저녁 덮고 벗겨야 한다. 놀기 좋아하는 어린 원교에게 겨울은 싫은 계절이었다. 누나와 큰형이 공부하기 위해 대구로 떠나고 작은형과 막내는 아버지를 도와 겨우내 일을 해야 했다.
원교의 아버지는 집에 늦게 들어올 때가 자주 있었다. 어느 겨울, 모처럼 사촌들까지 모인 연말에 형제들은 재미있는 영화를 밤늦도록 함께 보고 있었다. 졸린 눈을 비비며 즐거운 시간을 조금이라도 더 지키려 애쓰는 가운데 밤은 꽤 깊어갔다. 오줌을 누러 나갔던 작은형이 갑자기 소리 쳤다.
"와, 눈 엄청 왔다!"
눈은 비닐 하우스를 무너뜨리는 주범이다. 모처럼 모인 형제들과 사촌들은 발목까지 차오는 눈길을 걸어 비닐하우스가 있는 논으로 갔다. 눈이 쌓인 하우스는 쓰러질 듯 무게에 짓눌려 팽팽해져 있었다. 형제들은 눈 속에 묻혀 있는 버팀목을 꺼내서 비닐하우스 캄캄한 속을 한 밤에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곳곳에 버팀목을 세웠다. 일을 다 끝내고 시린 손을 비비며 길가로 다시 나왔을 때 동네 사람들이 지나간 길에는 이미 사람들이 지나간 자국들이 어지럽게 패어져 있었다. 온통 하얀 세상, 가슴이 확 열리는 느낌이지만 아버지 얼굴이 스치자 원교는 목덜미로 들어가는 눈송이에도 차가움을 느끼지 못했다.
큰소리에 움찔하며 눈을 떴다. 대전역이라는 안내방송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떨어뜨린 신문을 주우며 잠시 창 밖을 바라봤다. 하늘은 잔뜩 찌푸려 있고 비가 올 것 같다. 승객들이 거의 다 바뀌고 이내 기차는 길을 재촉한다. 잠시 뒤에 얼굴이 새카맣게 그을린 작은 소녀가 내 옆을 지나갔다. 네 번째쯤 의자 앞에서 그 아이는 걸음을 멈추고 수줍은 듯 몸을 비비꼬고 손가락을 입에 갖다 대기도 하며 주위를 살피기 시작했다. 옆에는 흑인 남자와 백인 남자 한 사람이 앉아 있었다. 아이가 외국인에게 호기심이 생겨서 저러나보다 생각하니 웃음이 나왔다. 소녀와 나는 눈이 마주쳤다. 마음을 들킬까봐 먼저 고개를 돌렸다. 올망졸망 이어진 산이며 논밭이 모두 녹색이다.
원교가 초등학교 6학년이던 해였다. 큰형이 대구에서 여름방학이라 잠시 들른 날 저녁, 원교의 엄마는 서서히 마비되어 가는 왼손을 다른 손으로 움켜쥐시며 쓰러지셨다. 어린 막내에게 미안해서인지 작별인사도 없이 사흘 후에 먼길을 떠나고 말았다. 흰줄이 온통 감긴 엄마의 시신이 땅에 묻힐 때 원교는 눈물을 보이지 않았다. 울지 않겠다고 엄마에게 약속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엄마를 데려가신 누군가에게 이렇게 속으로 말했다.
"착한 우리 엄마를 데려가신 분, 저는 이렇게 슬픔을 주는 것은 더 좋은 행복을 주기 위한 것이라는 것을 믿습니다."
원교는 눈에 힘을 주며 입을 꽉 다물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원교 아버지의 방황은 더 심해졌다. 6. 25전쟁 때 혼자된 원교의 큰어머니가 집안 일을 도우려고 내려와 있기는 했지만, 집안은 늘 정적이 감돌고 큰 일이 생길 것 같았다. 원교는 밖으로 나 다니는 것을 좋아하고 논길 들길을 혼자 생각하며 걷는 것을 좋아하게 되었다. 원교는 하느님을 전혀 알지 못했다. 어느 여름 날 한밤중에 원교는 덩그라니 큰방에서 혼자 자고 있었다. 누군가 모기장을 거칠게 걷어 부치고 쓰러지듯 옆에 눕는 것을 느꼈다. 아버지라고 생각하고 다시 잠을 청하는데 신음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조금 있으면 그치려니 생각했지만 오래 계속되었다. 원교의 정신은 점점 수정처럼 되어갔지만 몸을 움직이지 않았다. 그런데 갑자기 원교의 아버지가 일어나서, "원교야, 아버지 죽겠다. 사람들 깨워라!" 라고 소리쳤다.
원교는 어쩔 줄을 모르고 아버지를 쳐다볼 뿐이었다. 그때 건너방에서 자고 있던 큰어머니가 와서 상황을 보고는 가게에 가서 이런 약을 사 오라고 했다. 가게문은 이미 닫혀있을 시간이었다. 캄캄한 밤거리를 걸어가야 할 것을 생각하니 오금이 저려왔지만 용기를 내었다. 원교는 밤길을 가면서 울음 섞인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하느님, 예수님 우리 아버지를 낫게 해주시면 당신을 믿겠습니다!"
"부처님, 우리 아버지 꼭 낫게 해 주세요"
어린아이의 다급함을 안 가게 주인은 불평 없이 약을 꺼내 주었고 약을 먹은 원교의 아버지의 숨소리는 점점 낮아졌다. 그리고 이내 규칙적인 소리가 되었다. 그날 밤 원교는 누군가에게 무척 감사를 드렸다.
마을은 많이 변했다. 봉계동에는 골프장이 들어서서 황폐한 모습을 드러냈고 겨울이면 아이들의 운동장이 되곤 했던 논들은 메워져 새 건물들이 즐비하게 들어서 있다. 길에서는 낯선 사람들이 더 많았으며 동네 가운데는 놀이터가 생겼다. 식당에서 일하시는 어머니께 먼저 인사를 드리고 열쇠를 받아서 집으로 향했다. 문을 열고 들어서니 향냄새가 코에 확 들어왔다. 어머니는 여전히 불공을 드리시느라 열성이신가 보다. 곧장 건너 방으로 들어와 누웠다. 내 방이지만 이사를 몇 번 다니는 바람에 별로 기억에 남는 것은 없다. 책상 서랍을 열어보니 군대가기 전에 찍은 몇 장의 사진이 있고 헌혈 증서가 여러 장 보였다. 그리고 한 쪽에 흰 종이 뭉치가 있어서 펼쳐보니 예전에 아버지께 드린 편지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었다. 아마 아버지는 읽지도 않으시고 여기에 그냥 넣어 두셨나 보다.
"존경하는 아버지, 지금부터 제가 말씀드리고자 하는 것은……."
원교는 중학교에 들어갔다. 이 학교는 베네딕도 수도원에서 운영하는 곳으로 지역에서 유명한 사립학교였다. 입학식 날 학교 운동장에서는 미사가 열렸다. 처음 보는 의식이라 신기하고 미사 중에 귀에 익은 음악이 있어서 집에 갈 때에도 흥얼거리곤 했다. 학교 생활은 재미있었다. 원교는 미술선생님을 짝사랑했는데 선생님은 성당에 다니고 있었다. 2학년 때 정호라는 친구를 사귀었다. 그 친구도 성당에 다니고 있었다. 원교는 성당이 무척 좋게 느껴졌다. 중학교 3학년이 되자 원교는 동네 친구인 Y와 함께 용기를 내어 성당에 갔다. 고등학생으로 보이는 사람 몇 명과 중학생으로 보이는 여학생들이 있고 제일 앞자리에 수녀님이 있었다. 원교의 얼굴이 조금 상기되었다. 친구 Y는 중도에서 예비자 교리를 그만 두었고 원교는 고등학교 1학년 때, 부활전야 미사 중에 세례를 받았다. 원교는 미사 도중에 엄마를 잠시 떠올렸다.
"하느님은 엄마를 데려가시고 우리에게 당신 을 알려주셨구나!" 원교의 눈에는 물이 몇 번 맺혔다.
행복한 날들은 오래가지 않았다. 원교의 작은형이 교통사고를 당하는 등 집안을 감싸고 있는 듯한 우환은 좀처럼 가시지 않았다. 어느 날 집에서는 큰 굿판이 벌어지고 무당의 판결은 집안의 우환이 바로 막내의 신앙과 집안의 神이 다르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그날 이후로 원교는 성당에 다시 갈 수 없었다. 원교는 모든 것에 흥미를 잃기 시작했다. 공부도, 친구도, 취미도……. 그리고 얼마되지 않아 정호도 교통사고를 당하여 하늘나라로 가고 말았다. 원교는 하느님을 원망할 수 없었다. 이유는 잘모르지만, 하느님을 원망하지 말아야한다는 강한 생각이 가슴을 떠나지 않았다.
조금 늦은 밤에 들어오신 아버지의 모습은 무척 수척해 보였다. 유난히 친구 분들을 좋아하시고, 강한 모습만 보이시려고 방황하다 오히려 더 큰 짐을 져야 했던 아버지. 나는 아버지를 미워할 수 없다. 아버지의 혈관을 따라 알콜의 일부가 흐를 때면 여지없이 세상에서 가장 초라한 모습으로 변하곤 했다. 여전히 아버지는 강한 모습만을 보이려 애쓰시지만 내게만은 숨길 수 없다.
"아버지, 저 휴가 나왔습니다."
"그래, 왔나,"
"언제 가노?"
"한 일 주일 있을 겁니다."
"오냐, 일찍 자거라"
"예, 마실 한 번 갔다와서 자겠습니다.
"그래라."
아버지의 초라하신 모습을 뒤로하고 나는 밖으로 나왔다. 밤공기는 그래도 시원하다. 덤프트럭들이 쉴새없이 먼지를 일으켜서 캐캐한 냄새가 섞여 있었지만, 서울 공기보다 좋다는 생각이 들었다. 2년 전 어머니와 같은 증상을 보이며 쓰러지신 작은 어머니는 예전의 모습이 다 사라졌다. 새하얗게 변해버린 머리카락과 이빨도 거의 다 빠지셨고 스스로 몸을 일으키지 못하는 상태까지 이르셨다. 너무 마음이 아팠다. 많은 고생을 하시며 하나뿐인 철희를 키우시려 오랫동안 일하셨는데, 내가 도와드릴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잠시 기도를 드렸다. 철희는 곧 돌아왔다. 동갑인 철희와 어릴 적에는 자주 싸웠는데 유일하게 내가 입교시킨 교우가 되었다. 둘이 가까운 치킨 집에 가서 오랜만에 술을 한 잔 하며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직장을 다니며 어머니 간병을 하고 어머니를 위하여 정성을 다하는 모습을 보며 가슴이 뭉클해졌다. 이제 우리도 어른이구나 하는 느낌이 전해졌다.
대학입시에 실패하고, 특별히 마음을 끄는 일을 찾지 못했던 원교는 지금까지 하느님께 잘 해드리지 못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원교는 열심히 성당에 다니고 싶었다. 원교의 아버지는 더 이상 원교가 성당에 다니는 것을 말릴 수 없다는 것을 알자, 단 어머니에게 들키지 말라고 당부하고 허락해 주었다. 물론 원교의 어머니도 사실을 알게 되었지만 드러내고 말리지는 않았다. 원교는 매일 참례하는 미사를 무척 좋아했다. 항상 제일 앞자리에 앉아 신부님을 바라보며 미사를 드렸다. 어떤 날에는 매일 보는 한 청년이 대견해서 인지 신부님은 직접 강복하신 성체를 나누어주기도 했다. 시간이 흐를수록 더 흥미를 느끼게 된 미사를 보다 잘 준비하기 위해 원교는 누나에게 미사 때 보는 책을 붙여달라고 전화했다.
며칠 뒤 도착한 소포에는 매일미사 책과 더불어 '새시대의 예언자 알베리오네 신부'라는 책이 함께 들어있었다. 원교는 기대보다 무거운 소포를 받은 것이 기분 좋았다.
원교는 의외로 도착한 책에 관심이 쏠렸다. 책은 새로 산 것이 아니었다. 곳곳에 밑줄이 그어져 있고 손 때가 적당히 묻혀져 있었다. 원교는 책을 읽으면서 가슴이 평소와 달리 크게 뛰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마지막 책장을 덮으며 원교는 생각했다.
"나도 이런 사람이 될 수 있을까?"
전에는 시골 국도로만 여겼는데 도로를 건너려면 어느 정도 기다려야 할 정도로 차가 많아졌다. 동네 앞에 자동차 면허 시험장이 새로 생겨서 그런지 여러 사람이 버스에서 내렸다. 짧은 휴가 기간이지만 어머니 산소에 꼭 들려야겠기에 무작정 버스에 올랐다. 창가로 지나치는 풍경은 눈에 익은 것이다. 정호가 사고를 당한 가로수, 짝사랑하던 성당 누나를 쫓아 자전거를 타고 달리던 거리, 몇 년 전 교통사고로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같은 반 친구 K의 집……. 심장 한 구석에 고여있던 기억들이 비를 만나서 다시 흐르기 시작했다.
H 공원 묘지에 내렸다. 그 동안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곳으로 실려왔을까? 크게 변한 모습을 찾을 수 없었다. 오래 전 기억을 되살려 산길을 천천히 걸어 올라갔다. 무덤 주위 풀숲에서는 꼭 뱀이 나올 것 같다. 제법 많은 무덤이 새로 생겼지만 어렵지 않게 어머니의 산소를 찾았다. 그 옆에는 아버지가 미리 사두셨던 2평의 땅이 그대로 있었다. 주위에는 아무도 없었다. 쉬지 않고 걸어서 그런지 땀이 계속 흘렀다.
엄마 산소에는 먼지가 수북히 쌓인 시든 꽃이 꽂혀있었고 덤숭덤숭 새치 같은 긴 잡초가 자라있었다. 묵주를 꺼내들고 기도를 했다. 햇살이 몹시 강해서 조금 신경 쓰였다. 기도가 끝나고 나서 어머니 손이 있을 법한 자리를 파고 묵주를 묻었다. 기도하시는 방법이야 물론 모르시겠지만 지금이라도 기도하실 수만 있다면 하는 바램에서 그냥 그렇게 했다. 소나무 그늘로 올라갔다. 멀리 보이는 대구의 풍경이 부옇게 보이고 낮게 이어진 산들도 싱싱하게 보였다. 구름 한 점 없는 여름 열기가 코끝으로 들어왔다.
원교의 아버지는 원교가 공부를 포기하고 기술을 배워 빨리 사회에 적응하기를 바랬다. 원교는 재미를 한참 느끼는 미사 참례를 더 이상 계속 할 수 없음을 알았다. 집을 떠나야 할 때가 된 것도 알았다. 아버지에게는 작은형한테 가서 일하며 기술을 배우겠다고 거짓말을 했다. 재수를 해서 대학을 가고 싶었던 것이다. 마산 변두리 작은 면 지역에 살고 있는 형의 집은 작은 산 언덕배기 밑에 있는 폐가 같은 집이었다. 마을 사람들은 원교가 낯선 사람이라는 것을 금방 알아보는 눈치였다. 산중턱을 내려와 좁은 도로가에 이르면 조금 떨어진 곳에 성당이 있었다. 원교는 감사드렸다. 고향에서처럼 거의 매일 미사에 참례했다. 공부는 그 다음이었다.
본당의 신부님, 신자들과 친교를 나누기 전에 또 그곳을 떠나야했다. 대구에 사는 누나에게 전화를 했더니 같이 있자는 것이었다. 원교는 형과 있는 것보다 누나와 같이 있는 것이 더 좋다고 생각했다. 엄마처럼 따르던 누나와 함께 사는 것은 행복 자체일 것 같았다.
이층집 조그만 구석방에서 전세로 누나와 큰형은 살고 있었다. 셋이 살기에는 비좁고 불편한 곳이었다. 하지만 원교는 불편하다고 느끼지 않았다. 대구의 여름 날씨는 싫었다. 씻는 것이 싫고 끈적한 느낌도 싫었다. 차비와 밥값을 가지고 갈 수 있는 곳은 시립 도서관뿐이다. 한증막 같은 도서관에서 아랑곳하지 않고 공부하는 학생들이 많았다. 원교는 그들이 부러웠다. 원교는 공부하는데 집중할 수 없었다. 점심을 먹고 쉴 곳을 찾다가 머리에 스치는 생각 한 줄을 잡았다. 돈 안 들이고 시원하게 쉴 수 있는 곳을 알아냈던 것이다.
성바오로 서원에 들어갔다. 주머니에 책을 살 돈이 없었으나 걱정하지 않았다. 수녀님들은 착하니까 뭐라고 혼내지는 않을 것이다. 몹시 답답한 마음에 몇 시간 동안 책을 보기도 했다. 원교는 거의 매일 서원에 갔다. 수녀님들이 자기를 알아보지 않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저녁에 원교가 누나와 얘기를 나누면서 성바오로 서원 이야기를 했더니 누나는 자기가 아는 한 수녀님을 설명해 주며 다음에 가면 인사를 꼭 해보라는 것이었다. 다음 날 원교는 평소와 다른 마음으로 서원을 찾았다. 설명을 들은 수녀님이 확실하다고 생각되는 분에게 가서 한참을 뜸들이다가 말을 건넸다. 원교는 서원문을 나설 때 평소와 다른 자신을 발견했다. 원교와 I수녀님이 가장 절친한 친구가 되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이때부터 원교는 미사를 할 때마다 수녀님을 위하여 기도하는 버릇이 생겼다.
오랜만에 대구에 와서 서원엘 들렀다. 대부분의 수녀님들이 바뀌었다. 2층에 계시는 예노파 자매님은 여전히 자리를 지키고 계셨다. 신학교 시험을 준비할 때 여러 가지로 마음 써주신 K수녀님이 반갑게 맞아 주었다. 몇 해 전 갈등과 방황을 가득히 안고 창가에서 책을 응시하던 한 청년을 떠올려 보았다. 그리고 여기 다시 서있는 한 사람을 생각한다. 그리고 아름다운 기억들도…….
여느 때처럼 원교는 서원에 들렀고 I수녀님도 마치 원교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반갑게 맞아 주었다. 한 번도 싫은 표정을 짓지 않고 가장 중요한 사람으로 대해 주었다. 토요일 오후라서 사람들이 제법 있었다. 시간이 흐른 뒤 I수녀님은 내일 오후 2시쯤에 한 번 와 보라고 했다. 주일날에 서원문을 열지 않는 것을 알았지만 수녀님은 와 보면 알 거라고 웃으면서 이야기했다.
원교는 다음 날 오후 2시가 되기 훨씬 전에 서원 앞을 두리번거리기 시작했다. 서원의 셔터는 굳게 닫혀 있었고 불도 꺼져 있어서 안이 잘 보이지 않았다. 원교는 건너편 빵집 앞에 쭈그리고 앉아 무슨 일이 생길까 지켜보고 있었다. 얼마 뒤에 한 사람이 서원 옆의 대문의 초인종을 누르는 것을 보았다. 곧 안경을 낀 남자가 나와서 반갑게 그 사람을 안으로 안내했다. 더 기다려봐도 다른 기미가 보이지 않아서 원교는 용기를 냈다. 초인종을 누르자 조금 전에 보았던 남자가 나왔다. 안으로 들어가니 이미 3명 정도의 사람이 와 있었다. 이 자리는 성소자들의 모임이라고 했다. 각자가 자신을 간단히 소개하고 정해진 기도를 다 함께 바친 뒤에 친교의 시간을 가졌다. 원교는 몇 달 전에 읽은 책이 생각났다. '새시대의 예언자 알베리오네 신부'. 자기는 하느님이 부르셔서 이 모임에 참석한 것이 아니라 수녀님이 한 번 가보라고 해서 온 것이라 생각했지만 원교는 별로 개의치 않았다. 내일 다시 와서 수녀님과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건수가 생긴 것이 오히려 좋았던 것이다.
그러나 이런 행복한 순간도 오래가지 않았다. I수녀님이 갑자기 서울로 발령을 받아 떠나게 된 것이다. 원교는 수녀님이 떠나는 날 서원에 가지 않으려 했다. 왠지 두려운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누나가 수녀님께 인사하라고 했기에 마지못해 서원에 들렀다. 무슨 말을 해야 좋을지 몰랐다. I수녀님을 여러 사람들과 인사를 나누고 있었다. 원교는 멀리 창가에 서서 창 밖을 쳐다보고 있었다. 잠시 뒤에 수녀님이 다가와서 악수를 청하며 건강하게 잘 있으라고 했다. 원교는 가만히 있었다. I수녀님은 대구역 쪽을 향하여 조금씩 사라져갔다. 원교는 이런 사실이 실감나지 않았다. 다음 날까지 멍하니 있던 원교는 밤중에 몰래 울었다. 원교는 서원에서 곧 새로운 친구를 사귀었다. 원교는 앞으로 받게 될 많은 은총들을 전혀 알 수 없었다.
짧은 휴가가 다 끝나가고 있다. 언제나 집에 올 때는 많은 기대를 하곤 했다. 그러나 집을 떠날 때는 늘 좋지 않은 기분이었다. 이번에도 예외는 아닐 듯 싶다. 친구들의 길, 부모님의 길, 가깝게 지내던 이들의 길, 그리고 나의 길, 모두가 나와 상관없이 자신이 바라는 곳을 향하여 부지런히 걸어가고 있는 것이다. 갑자기 허전해 진다. 담배 한 대 생각이 머리로 돌진했다.
내게는 불도 담배도 없다. 아버지의 잠바 주머니를 떠올렸지만 그렇게까지 해서 결심을 깨뜨리고 싶지 않았다. 대문 밖으로 나왔다. 덤프 트럭이 지나간 자리에 먼지 바람이 일고 처음 보는 사람들이 지나가고 있다. 예전에 산책을 하던 길을 걷기로 했다. 길은 차들을 위해서 많이 변했다. 그들에게 방해되지 않도록 최대한 길가를 따라 걸었다. 그때 나는 무슨 생각을 하며 이 길을 걸었을까? 묵주를 돌리며 걸었으나, 생각은 바람 빠지는 풍선 같다.
해가 바뀌고 얼마 있다가 원교는 성바오로 수도원을 찾았다. 성소자 대피정에 참석하기 위해서였다. 이미 군에 지원해 놓은 형편이고 대학교에 갈 수 있는 상태도 아니었다. 수련장 신부님은 당장 입회해도 좋다고 했지만 원교는 그럴 수 없었다. 수도원의 사람들은 수도복을 입지 않고 사는 것이 이상하게 보였다. 성무일도 할 때 목소리가 너무 끌려가는듯 했다. 식사시간이 제일 좋았다. 무척 정성스럽고 맛있는 음식이었다. 세수하는 곳이 방안에 있고 따뜻한 물이 하루종일 나왔다. 조금 추운 것 외에는 다 괜찮았다.
입대하는 날짜는 빠르게 다가왔다. 군 생활을 수도생활이라 생각하며 어려운 날들을 지냈다. 원교는 성소를 계속 마음에 품었다. 수도자의 길인가, 교구 사제의 길인가 확신을 하기보다 여유를 두고 기다렸다. 첫 휴가를 나가서 수도원에 들렀고 두 번째 휴가를 나가서도 수도원에 들렀다.
그러나 수도원은 계속 낯설게 여겨졌다. 언제나 처음 보는 사람으로 보는 듯 했고 생기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원교는 수도원을 찾은 것이 몹시 후회되었다. 마지막 휴가를 나왔을 때는 교구청에 들렀다. 교구 사제가 되겠다는 마음을 굳혔다. 마음은 홀가분했다. 남은 복무기간 동안에 꾸준히 시험준비를 했다. 그리고 제대했다.
원교의 부모님은 제대한 아들이 빨리 돈 벌 생각은 안 하고 그냥 있는 모양이 불안했다. 어느 날 대구에서 내려온 원교를 불러놓고 아버지가 진지하게 물었지만 원교는 공부하는 것은 인정했으나, 신학교라는 말은 입에 올리지 못했다. 아버지는 답답한 가슴을 쓸어내리며 자식의 의사를 존중했다. 입시 날짜가 가까웠을 때 더 이상 비밀을 숨길 수 없었다. 성소 담당 신부님과 수녀님이 집을 방문한다고 했기 때문이다. 원교는 아버지의 얼굴을 보며 말씀 드릴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래서 긴 편지를 썼다.
"존경하는 아버지……, 저는 이 길을 확신하고 있습니다……지금은 가슴 아프시더라도 가장 훌륭한 선택이라는 것을 아시게 될 겁니다……."
아버지와 마주 앉은 자리에서 원교는 아버지께 이 편지를 내보였으나, 아버지는 야단을 쳤다. 사내자식이 말로 못하고 이게 무슨 짓이냐는 것이다. 원교는 결심을 하고 차분하게 이야기했다. 아버지는 아들의 이야기를 끝까지 아무 동요 없이 듣고 있었다. 원교가 말을 그치고 땅바닥을 주시하자 아버지는 입을 열었다.
"내가 니 인생을 책임질 수 없는 기다. 니도 이제 다 컸고 내가 말린다고 해서 될 일도 아이고, 니 생각이 정 그렇다면 말리지는 않겠다. 그 길도 무척 힘들다 카던데, 끝까지 포기하지 말고 살거라!"
원교의 가슴은 마구 뛰었다. 뜻밖의 말씀에 몸둘 바를 몰랐다. 아버지의 마음이 고스란히 온 몸을 감쌌다. 담배를 연신 피우던 원교의 아버지는 아들이 떠난 뒤에 소주 집을 향하여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아침 일찍 짐을 꾸리기 시작했다. 아버지는 몇 해 전부터 농사를 그만두고 막노동 일을 시작하셨다. 어머니 몰래 부르셔서 만 원짜리 몇 장을 주시며 서울 갈 때 차비에 보태 쓰라고 하셨다. 그리고 곧 자전거를 타고 나가셨다. 아버지 뒷모습이 너무 무거워 보였다.
아버지는 한 번도 마음놓고 삶을 맞서지 못한 분이다. 그래서 오히려 훨씬 더한 짐을 져야 했고 가족들도 고통을 겪었던 것이다. 어머니께 인사드리고 왜관역으로 향했다. 차를 타기보다 걷는 것이 편하다. 시간은 넉넉하고 묵주를 돌리며 걸었다. 부모님 생각을 했다. 그리고 누나, 형들, 작은 어머니, 철희와 친구들 그리고 남겨질 사람들 …….
'왜관-서울' 글씨가 찍힌 기차표를 역무원에게 보이고 승강장으로 갔다. 조금 있으면 육중한 열차가 저쪽에서 달려올 것이다. 하느님을 생각했다. 뒤로 남겨질 모든 것들은 내가 그들 곁에 있음과는 상관없이 계속될 것이다. 굽은 길을 돌아서 열차는 삼킬 듯 달려왔다.
원교는 그해 신학교 시험에서 떨어졌다. 마음이 많이 아팠지만 받아들여야 한다는 생각은 본능을 거슬러 그를 지배했다. 그러나 때로는 현실에 도전하는 것이 신앙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얼마 뒤에 서울로 올라갔다. 원교는 사람들이 참으로 기뻐하는 모습을 보고 싶었다. 스스로 참된 기쁨을 아직 모른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성바오로 수도원과 붙어있는 성바오로 딸 수도원에서 서원식이 있는 날이었다. I수녀님께 전화를 걸어서 말씀드렸더니 와도 좋다고 했다. 원교는 가족들의 축복 속에서 하느님 앞에서 서원하는 수도자라면 그런 기쁨을 보여줄 수 있을 거라 믿었다.
하느님이 왜 자신에게는 이런 기회를 앗아갔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새로 서원하는 수녀님들은 모두 행복하게 보였다. 성당을 가득 메운 가족들과 동료 수도자들은 모든 식이 끝나고 즐겁게 축하 인사를 나누었다. 모두 흩어져서 돌아가고 있을 때, 원교는 뜻하지 않게도 성바오로 수도회의 수사님을 만나게 되었다. 한 수녀님이 원교의 상황을 수사님에게 이야기했던 것이다. 원교의 상황을 들은 수사님은 원교에게 성소 담당 신부님을 잠시 만나볼 것을 권했다. 원교는 이를 거절할 준비가 되지 않았고 그럴 힘도 없었다. 다시는 오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던 곳에 간다는 것이 조금 걸렸다. 그러나 어느 곳에선가 자신을 꼭 받아주었으면 하는 바램이 마음 한 구석에 있었다. 그 날뿐만 아니라 이틀을 더 묵어가게 되었다. 사람이 많이 바뀌었다는 것을 쉽게 알아보았다. 기도 시간에 여전히 수도복을 입지 않았지만 성무일도를 바치는 소리는 예전처럼 늘어지지 않았다. 청원기도 시간에는 다른 형제가 원교를 위해서 기도하는 소리도 성당에 울렸다. 식사는 여전히 좋았다. 성소 담당 신부님과 이야기하면서 원교는 지난 일들을 다 털어놓았다. 이런 마음을 가지고 있는 자신을 수도회에서 그냥 얼마동안이라도 살게 해 주었으면 좋겠다고 했다.
원교는 확신할 수 없었다.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지 그리고 자신이 진정으로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 스스로에게 빨리 무엇을 하도록 요구하고 싶지도 않았다. 겨울이 끝나가고 있을 무렵 원교는 수도회의 지원자 형제들과 입회 예정자 한 명과 함께 대피정을 했다. 모든 것을 한꺼번에 정리하려는 욕심을 버리고 편안하게 일 주일을 지냈다. 피정이 끝날무렵 단 한 가지의 생각이 뇌리에 남았다.
"이제 나의 모든 것을 이 수도회에 걸어도 되겠다……."
차를 타기만 하면 잠이 드는 버릇이 생겼다. 일정하게 흔들리는 기차는 가장 편한 잠자리다. 몇 시간이 지났을까? 눈을 감은 채 정신은 계속 맑아지고 있다. 책을 하나 꺼냈다. '새시대의 예언자 알베리오네 신부' 표지의 신부님 얼굴은 한 곳을 응시하고 있다. 나는 신부님을 바라보고 있다. 가장 약한 자이기에 하느님께서 자신을 택하셨다고 고백하신 신부님을 그려본다. '최대의 부는 가난이요, 최대의 사랑은 정결이요, 최대의 자유는 순명이다' 라는 구절은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지금 내 나이쯤이면 신부님은 사제서품을 받고 하느님과 사람들을 위해 여러 가지 일을 시작하셨을 것이다. 하느님과 이 시대의 사람들을 위하여 무엇을 할 것인가? 진심으로 고뇌하던 한 젊은 사제를 떠올린다. 그리고 나에게 질문을 해 본다. 나는 하느님과 이 시대 사람들을 위하여 무엇을 할 것인가?
뜨거운 태양아래서 열차는 부지런히 서울을 향하여 달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