ㅇ수녀님께,
아주 오랜만에 편지를 쓰는 것 같아요.
저는 편지를 자주 쓰는 편이었고 또 편지 쓰는 것을 좋아하는
축에 속했지만 이상하게도 근래에는 편지를 잘 안쓰게
되었답니다.
그나마 오는 편지에도 답장을 안 쓰게 되었는데
수도자는 인간적이어서는 안된다는 수련장 신부님 말씀을
조금은 이해하게 된 때문인지 모르겠어요. 작년에 그 말씀을
들을 때는 정말 이해하기가 어려웠었답니다.
중학생 때 신라시대의 스님 의상대사의 전기를 읽었었는데
거기서 출가를 한 의상 스님이 어머니의 산소에 가서
슬픈 마음이 들었음에도 눈물을 흘리지 않았다는 대목을
인상 깊게 대했던 기억이 납니다.
그 이유를 지은이는 "스님은 눈물을 흘려서는 안되기 때문이다..."
라고 적고 있었어요.
이제금 생각하는 것은 의상 스님이 울지 않은 것이
어머니를 사랑하지 않아서가 아니라는 것.
어쩌면 불가의 가르침은 '부모 형제보다 나를 더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나의 제자가 될 수 없다'는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닮아 있는 듯합니다.
그것은 떠남으로써 돌아오고, 버림으로써 얻는 과정인 것처럼
생각돼요.
부모형제에 대한 애착을 버림으로써, 사랑하는 모든 이를
마음에서 놓아보냄으로써 그는 그들을 더 크고 넓게
사랑하는 길에 들어섭니다.
인간적이지 않음으로써 더 인간적이게 된다고나 할까요.
바람에 흔들리는 풀잎 하나에도 움직이는 것이 사람의 마음이고
인정이지만 그렇기 때문에 거기에서 벗어나 넓고 큰 자유와 사랑의 바다에
들어가려는 이들 앞에 놓인 벽은 높고도 높은 것 같습니다.
오랜만에 쓰는 편지가 무슨 설교처럼 되어버렸네요.
그것은 어쩌면 늘 마음이 약해 쉽게 인정에 젖어들곤 하는
자신에 대한 경계가 이 편지에 배어 있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모든 편지는 다른 누구에게 보내지는 것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어느 정도는 자신에게 향하는 것이기도 한 거니까요.
다음 편지에는 재미 있는 얘기 써보낼게요.
날씨가 더워졌습니다.
건강 조심하시고 늘 자신을 잘 돌보세요.
그럼 이만.
<2000. 6. 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