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으로부터 십 년도 더 전 고등학교를 졸업할 무렵
나를 예뻐해주시던 선생님이 계셨다.
지금이야 어떤지 모르지만 그 때 선생님들은 우리에게
'세계로 열린 창'이었다. 이제 막 세상으로 나가려 하는
나이였지만 세상은 알 수 없는 두려움의 대상이었고
그래서 우리 마음은 늘 두려움과 설레임이 반반이었다.
학력고사도 끝나 여유가 생긴 우리는 썰렁한 학교 교지 편집실에
모여 교지 레이아웃을 들여다보며 석유난로 위에 생라면을
구워 먹었었다. 교지 편집부와 문예부를 지도해주시던 선생님은
휴일이면 나를 댁에 데리고 가서 여러 책을 소개해주시기도 했고
술 마시는 법을 가르쳐 주시기도 했다.
광주항쟁이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은 그때 광주고속 터미널 근처
선생님 댁에서 이중서가 안쪽에 있는 금서들을 보던 일이며
선생님의 형이 감옥에서 보냈다는 봉함엽서 속의 깨알 같은
글씨들을 보던 일은 정말로 가슴 떨리던 기억이었다.
선생님의 형은 당시 시국 사건에 연루되어 여러 해째
투옥되어 있었는데 봉함엽서 하나에 무슨 책을 한 권
번역해서 정말로 깨알 같이 써서 보냈다고 한다.
아직 어린 나의 가슴 속에 있는 꿈과 슬픔들을 들어주시고
앞날을 함께 염려해주시던 분.
생각해보면 나는 선생님으로부터 참 많은 것을 배웠던 것 같다.
그 때 선생님이 가르쳐주신 노래를 나는 지금도 좋아한다.
이연실이 부르는 '소낙비'의 3절.
무엇을 들었니, 내 아들아.
무엇을 들었니, 내 딸들아.
나는 세상을 삼킬듯한 파도소릴 들었소.
성모 앞에 속죄하는 기도소릴 들었소.
물에 빠진 시인의 노래도 들었소.
소낙비, 소낙비, 소낙비.
끝없이 비가 내리네.
끝없이 비가 내리네.
이제 내 나이가 노래를 가르쳐주시던 선생님보다 더 많아졌고
그동안 참 많은 것을 보고 들었지만 그 모든 것 아래쪽에
선생님의 잔잔한 음성이 흐르고 있었음을 느낀다.
"가난한 사람의 벗이 되고 슬퍼하는 사람의 참소망이 되어라."
살면서 우리는 얼마나 많은 사랑을 받고 사는가.
자기 연민에 빠져 우울할 때나 괜스레 무기력해질 때
우리를 사랑해준 이들, 지금도 나도 모르게 나를 사랑해주는 이들이
있음을 생각하면 가슴 한켠에 절로 등불 하나 밝혀지는 것 같다.
<2000. 6.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