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오복음 18장 21절-19장 1절
입회전 회사에 다닐때 일입니다.
아주 절친한 친구가 있었는데 어누날 '급한 일이 있어서 그러니 돈 좀 빌려달
라'고 찾아 왔었습니다.
비교적 많은 돈이었지만 선듯 빌려주었죠.
절친한 사이에 당연하다고 생각했죠.
하지마 제가 입회하기 전, 그러니까 그 때가 돈을 빌려주고 1년이 좀 넘었을
때였죠.
그때까지 아무 연락이 없었습니다.
연락이 아주 끊겼었죠.
다른 친구를 통해 전해들은 내용은 신용카드 결재 때문에 돈을 빌려가서 그
냥 사라져버렸다고 하더군요.
어이가 없었어요.
화가 난다기보다는 실망이 컸습니다.
10여년정도를 사귄 좋은 친구였다고 생각했는데...
돈 때문이 아니라 인간적인 문제로 화가 나기 시작했습니다.
친구를 찾아다녔죠.
우리 사이에 왜그랬냐고 묻고싶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지금까지 그 찬구와는 연락이 되질 않고 있습니다.
...
지금 그 친구에 대한 감정은 없습니다.
그 친구를 찾아다니면서 또 화도내면서 한편으로는 그 친구의 입장에서 생각
하게되었습니다.
무척 난처했을 기분하고 미안함... 이런 것들이 느껴지더군요.
저도 나름대로 오해를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서 '용서'라는 단어를
떠올리게 되었습니다.
어쩌면 돈을 마련하기 위해서 늦었을지도 모르고 제가 입회 후 돈을 갚기위
해 연락을 했을지도 모르지요.
그렇게 된다면 굳이 용서를 들먹일 필요도 없을 것입니다.
아무튼 그 친구가 악의를 가지고 저의 돈을 가지고 갔어도 지금의 기분에서
는 용서할 수 있습니다. 아니 입장을 바꾸어 생각한다는데 생각이 머물렀다
면 그 때도 용서를 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늘 오늘 복음을 접할 때 그 친구 생각을 합니다.
뭐, 돈때문에 용서가 어떻고, 저떻고 이야기한다고 쫀쫀한 녀석이라고 생각하
시는 분도 계시겠지만 저는 상대방의 입장이 되어본다는 것이 진정한 용서의
의미가 아닌가를 말하고 싶었습니다.
요즘에는 용서라는 말을 듣기가 힘든것 같아요.
이해하고 용서할 만한 것도 그냥 처벌하기에 급급합니다.
그만큼 세상이 이기주의로 만연해있다는 말이겠지요.
가끔 tv나 신문을 통해 용서가 가져다주는 포근함을 맛볼 때가 있습니다.
정말 기분이 좋습니다.
용서한다는 것.
사실은 무척 어렵습니다. 말처럼 그렇게 쉽게용서가 된다면 아직까지도 용서
는 여기저기에서 튀어나올 것입니다.
어려우니까 또 좋은 덕목으로 분류가 되는거라 생각합니다.
앞에서도 잠시 말했지만 입장을 바꾸어본다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에 관심을 가지고 지켜보면 용서하기가 조금은 쉬워지지 않을까요?
입장을 바뀐다는 것을 다르게 말하면 자신을 용서할 줄 알아야한다는 것입니
다.
자신이 죄인이 되었을 때 자신이 먼저 용서하지 않는다면 누가 용서를 해주겠
습니까?
자신을 사랑할 줄 알아야 이웃도 사랑할 수 있다고 말씀하신 예수님의 말씀
이 그렇듯이 용서도 같은 맥락에서 해석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의 수도생활에서도 용서는 그렇게 쉽게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저도 제 자신을 용서할 줄 모르는가봅니다.
하지만 이제부터라도 제 자신을 용서하는 습관을 들여야하겠습니다.
그래야 우리 공동체의 형제들을 용서할 수 있을테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