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봄이 왔나봅니다.
건물 4층에서 내다보이는 이른 아침의 대기가 안개에 촉촉히
젖어 있습니다. 가까운 양옥집들 붉은 기와지붕 위에 비둘기들이
돌아다니고 멀리 교회의 첨탑들과 굴뚝들이 안개 속에 아스라합니다.
유난히 눈도 많고 추웠던 겨울도 오는 봄에 자리를 비켜주고 맙니다.
겨울이 가고 봄이 오는 것, 그리고 또 여름이 오는 것.
이렇게 지나가고 다가오는 계절들이 마치 기차길 연변으로 지나가는
작은 역(驛)들을 보는 것 같습니다.
어떤 러시아 소설가가 자기 소설에서 이야기하는 것처럼요.
".... 길가의 조그만 역은 다 읽은 책장을 넘기는 것처럼
천천히 옆으로 미끄러지다가 시야에서 사라졌다.
그 얼굴과 그 일은 잊혀졌고, 영원히 잊혀진 듯 싶었다."
2.
공동체의 한 형제가 아파서 병구완을 하느라
사흘째 병원에서 묵고 있는 중입니다.
약병이며 컵 등속이 놓인 창틀 너머로 도시의 주택가를
내다보며 마치 내가 긴 겨울을 앓고 회복기의 봄에 있는 것
같다는 생각에 사로잡힙니다.
어젯밤엔 바로 이 창으로 어두운 밖을 바라보며 불평을
했었는데.
아이들에게서 보이는 푸르름이 어른이 되면서 사라지는 것은
참 억울하다고, 아름다운 것들은 왜 곧 사라지는가
알 수 없다고, 불평했었는데 그건 긴 겨울에 대한
투정 같은 거였나봅니다.
날이 새면 이렇게 봄기운이 완연할 것을 모르고서는...
턱을 괸 손에 따끔따끔 수염 자국이 느껴집니다.
이렇게 무언가가 항상 자라고 있는 건
안 보인다고 죽어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어딘가에 생명이 숨어 있다는 것을 가르쳐 주는
하느님의 신호일까요?
<2001. 2. 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