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묵상]
나~하고 놀~~자!
연중 제7주간 토요일 복음(마르 10,13-16)
매일 동화책을 읽어달라고 졸라 집에 있는 꽤 많은 동화책도 모두 바닥이 나
서 계속해서 같은 이야기를 반복해서 들려주어야 했었다.
'미운 아기 오리'가 친 엄마를 찾는 마지막 부분에 가서 아이들은 늘 눈물을
훔쳐냈다.
신데렐라가 마침내 왕비가 되는 대목에서는 신바람이 나서 좋아라 박수를 쳐
댔다.
끝을 뻔히 알면서도 언제나 같은 감동을 느끼는 아이들이 신기해서 나도 덩달
아 신이나 좀더 실감나게 읽으려고 성우 흉내를 내던 시절이 생각난다.
이제 훌쩍 커버린 아들 녀석이 하루는 TV에서 호화스러운 집을 보면서 하는
말이다.
"엄마, 나는 저런 집에서 살고 싶지 않다."
의아해하는 나에게 "나는 단칸방이면 돼. 누울 곳이 있고 쉴 곳이 있으면
더 이상 필요없어."
단칸방이라니.....앞길이 창창한 녀석이 이 무슨 헛소리를 하고 있나?
"색시가 생기고 아이들이 생기면 어떻게 하려구?"
"그럼 방 두 개 있는 곳으로 이사가면 되지."
"능력이 없다고 색시가 안 생기면?"
"그런 여자는 나하고 맞지가 않으니 색시 될 리도 없겠지."
초등학교 때 순위를 다투던 친구가 중학교에 가서도 계속 잘하고 있는데, 아
들은 계속 쳐졌기에 속이 타서 내가 물었다.
"네 친구는 전교 일 이등을 하고 있는데....너는 속상하지 않니?"
"내 친구가 잘하고 있는데... 좋지... 왜 속상해?"
"......"
이 아이하고 이야기하고 있으면 너무나 천진하게 이런 類의 대답을 하고 있어
서 내가 오히려 바보 같아지곤 한다.
어릴 때 마당에서 관찰 일기를 써야한다고 달팽이 두 마리를 잡아 키웠는데
갖은 정성을 기울였는데도 한 마리가 죽고 말았다.
마당에 나가기만 하면 흔하디 흔한 달팽이의 죽음을 어찌나 마음 아파했는
지, 남은 한 마리를 놓아주면서 훌쩍훌쩍 울며 그 곳을 떠나지 못하던 녀석이
었다.
고등학생이 된 지금도 집안에서 키우는 개가 자기 침대 가운데서 떡 버티고
자고 있으면 깨우지 않게 조심해서 그 옆에 쪼그리고 자는 놈이다.
라파엘의 집에서 봉사하던 날, 중복 장애자 아이들이 먹던 카레를 한 그릇에
서 같이 퍼먹던 녀석의 이야기를 교사로부터 듣고...
더구나 그날 便을 치우고 하필 카레를 먹어야 했던 봉사자들이 놀라고 대견했
었나보다.
장하고 기특해서 물었다.
"그게 뭐가 이상해?"
녀석은 엄마가 이상하고 나는 녀석이 이상하다.
그래, 내가 이상한 건지도 모른다.
이런 아들만 생각하면 마음이 놓이지 않고 괜시리 불안하다.
방학 동안에 머리 염색을 하고 싶다고 해서 이유가 뭔지를 물었다.
다른 아이들보다 튀고 싶다는 것이다.
하필 왜 머리나 옷차림으로 튀고 싶은가 물었다. (공부로 튀지...)
"내가 공부로 튈 수 있나? 다른 특기나 재주가 있어서 튈 수가 있나? 그것
밖에 없다."고 말하는 아들의 답변에 가슴이 찌릿했다.
언제나 자신이 멋진 놈이고 쓸만한 놈이라고 말하는 녀석에게 "네 위에 몇 명
이 있는지 아느냐?"고 현실을 인정해야 분발할 수 있다고 누누이 몰아치던 나
의 전략이 이제야 성공을 하기는 했는데...
녀석의 이유도 나름대로 논리가 있다고 생각하여 머리 염색을 허락하면서도
한마디 덧붙이기를 잊지 않았다.
"머리나 옷차림이 결코 너를 영원히 튀게 하지는 않는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아들이 좋아하면서도 타이르는 듯한 말투로 대답했다.
"엄마, 하지만 엄마도 옷차림이나 머리 색깔로 사람을 평가하지 말아요."
주님의 가르침대로 욕심을 버리고, 만인을 평등하게 보고 선입관 없이 사랑하
려고, 경쟁하지 않고 이웃의 기쁨을 자기의 기쁨으로 여기는 그 순수하고 아
름다운 마음을 가지려고 그처럼 노력했는데.....
작은 생명하나도 소중히 여기라고 그렇게 떠들었어도 나 자신의 그리고 내 자
식의 결함(?)마저도 미워한 적은 얼마나 많았던가.
복음의 말씀에 의지하여 무진 애를 써도 매번 실패를 했던 경지에 이미 아들
은 도달해있었다.
그런데도 기쁘지 않고 왜 걱정스럽고 불안한가?
하느님이 인간을 창조하셨을 때는 모든 능력과 선한 마음이 충만하도록 만드
셨는데 성장하는 동안에 점차로 잃어버리게 된다는, 두 살 때쯤 되면 이미 가
진 것의 90%를 잃어버린다는 놀라운 이야기를 들었다.
그리고 부모에 의해서... 사회의 제도와 법칙에 의해서 점점 손실되어간다는
과학적인 통계의 결과를 들었다.
오늘 독서(집회 17,1-13)의 말씀처럼 주님이 주신 권능과 힘과 지혜를 손상시
키고 주님의 위대한 업적을 보여주시기 위해서 을 가리
우고, 가로막는 행위를 소위 어른이라는 사람들이 교육이라는 미명 아래 솔선
해서 하고 있는 것이다.
어떤 슬픔과 기쁨에도 놀라지 않고 감동하지 않으며 자기 식으로 왜곡하고 판
단하며 작고 보잘것없는 것을 업신여기며 동료 인간들과 사랑을 나누기는커
녕 화합을 깨는 무한 경쟁의 행태를 반복하는 한, 하느님 나라는 구경도 못
할 것이라고 나무라시는 예수님.
동심의 맑은 기운으로 목욕을 하고 천진스런 웃음으로 회복되어야 한다는 오
늘의 말씀이다.
어제 내린 비로 놀이터에는 아이들이 없다.
아니, 언제나 아이들이 없는 놀이터의 그네 줄은 녹이 시뻘겋게 슬었다.
오늘은 학원으로, 공부방으로 쫓겨난 아이들 대신 정채봉의 동시 한편을 들
고 빈 놀이터를 지켜야할까보다.
청냉한 봄바람으로 마음에 있는 속눈을 맑게 씻어야 할까보다.
000 야! 나~하고 놀~자!
2001.02.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