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7주간 화요일 복음(마르 9,30-37)
죽음을 예감하거나 죽음의 문턱에 가까이 다가서 본 사람이라면 삶이 전과는
사뭇 달라져보일 것이다.
예전엔 미처 깨닫지 못하던 하찮은 일들마저 아주 소중하고 가치있는 일이었
음을 새삼 느끼기 때문이다.
아침마다 늦게 일어나도 아무도 투정부리는 사람이 없다.
반찬이 맘에 안 들어도 얼굴 찡그리는 사람도 없다.
구겨진 셔츠가 다림질을 기다리며 몇 일째 한구석에 접혀있어도 아무도 탓하
는 사람이 없다.
설거지통에 그릇이 다 나와있어도 아무도 신경질부리는 사람도 없다.
수술 후의 촬영 결과를 가족들에게 알리지 못하고 몇 달이나 끙끙댄 이유가
바로 이런 것들이 싫어서였다.
아이들은 부부는 아니 가족들은 서로에게 불편을 호소하고 욕구를 충족시키려
고 서로 다투고 소리치고 신경질부리고 살아도 <되는> 사람들이다.
그렇게 살아간다는 것은 아직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서로 건강하다는 이야기
이기도 하다.
예수께서 당신의 죽음과 부활에 관한 두 번째의 수난예고를 하신 후에도 제자
들은 자신들의 지위에만 신경을 쓰며 다투었다고 한다.
예수께서 열 두 제자를 곁으로 가까이 부르셨다.
그들은 수난의, 죽음의, 어두운 그림자도 아직 눈치채지 못하고 있는 철부지
어린아이와 같았다.
아니, 묻기조차 두려워함은 어둠을 애써 모른 척 회피하고 싶었는지도 모른
다.
첫 번째 수난예고에 이어 두 번째의 수난예고 사이에 변모의 모습을 보여주시
는 이유는 묻기조차 두려워하는 그들의 불안을 잠재워 줄, 미래의 영광의 모
습을 꼭 기억해야 할 필요성이 있기 때문이다.
오늘 독서(집회 2,1-13)의 말씀처럼 <주님을 섬기는> 사람에게는 시련도 시련
으로만 끝나는 것이 아니라 참고 이겨낸다면 끝내는 영광의 길이 마련되어 있
다는 것을 알려주시려는 시청각적인 교육의 한 例示였었다.
현재 그들이 주님의 수난과 죽음을 인정하든 인정하지 않든, 곧 그들은 주님
의 예고대로 주님을 잃고 방황할 것이다.
주님이 없는-눈으로 안보이는- 자리에서 <주님을 섬기는>것은 어떤 것인가?
"첫째가 되고자 하는 사람은 꼴찌가 되어 <모든 사람을> 섬기는 사람이 되어
야 한다."는 것이라고 예수께서는 가르쳐주신다.
<모든 사람>의 범주에는 가장 미소하고 보잘것없는 어린아이 하나까지 포함
이 된다는 것을 알려주시려고 어린아이 하나를 데려다가 그들 앞에 세우시고
그를 안으시며 말씀하신다.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이 하나를 받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받아들이
는 것이고, 또 나를 받아들이는 사람은 나만을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곧 나
를 보내신 이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모든 사람을 섬기는 일은 그 모든 사람들이 나의 상황을 위험하게 하지 않을
때는 쉽다.
귀찮게 하고 역겹게 하고 상처를 줄 때 힘든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끼리라면 그가 비록 나에게 불편을 끼치고 도움을 주지 못하는
사람이라해도 감싸안을 수 있는 것이 아닐까.
혼신의 힘을 다하여 그를 위해 어려움을 감수할 수 있는 것도 사랑이 있어야
가능한 이야기이다.
결국 주님의 말씀은 '사랑하라'는 이야기이다.
자신을 희생하는 사랑, 되돌려 받을 것을 기대하지 않는 사랑 말이다.
몸이 아파 자신들에게 짐을 지워주고 있는 상황에서도, 불평하지 않고 오히
려 나를 걱정해주는 남편과 어린것들의 마음이 고마운 날이다.
이런 사랑을 모든 이에게 베풀라는 예수님의 말씀인가보다.
모든 사람들을 사랑함으로 인해 생기는 역경과 시련은 우리를 튼튼하게 단련
시키고 마침내 영광의 날을 마련해 주신다는 가르침이신가보다.
수난예고에는 반드시 부활에 대한 예고도 있었지만 두려움과 불안 때문에 다
음 귀절까지는 귀에 담을 수가 없었다.
"그분의 사랑을 신뢰하고.... 행복과 영원한 기쁨과 자비에 희망을 두고....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역경을 이겨낸다면.....고난을 당할 때에 반드
시 구해 주신다."(독서에서 편집)
죽음에 이르는 병은 불안이 아니고.....사랑이 없음에서....그리고 부활에 대
한 희망이 없음에서 더욱 깊어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