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래에 내가 참 단순해졌다는 것을 느낀다.
아침에 미사를 드릴 때 성가집을 척 폈는데 부를 성가가 바로
나왔다든가 맨처음 편 성무일도서 쪽수가 23으로 끝나는 데라든가
하면 속으로 매우 기뻐한다(23은 내가 좋아하는 숫자). '야, 이건
무슨 의미가 있는 것임에 틀림없어!' 그러면서...
경당에서 양반다리로 앉아 묵상을 할 때 어쩌다 양말에 구멍이
난 걸 발견하면 '엉? 이거 재미있구나'하면서 그걸 곰곰이
들여다보고 있다. '내 발가락이지만 오랜만에 보는구나.
잘 있었나, 엄지야?'그러고.
프란치스코 성인은 새들, 늑대들과 대화를 하셨다지만
자기 엄지발가락하고 이야기한 사람은 아마 없을거다.^^
얼마 전에는 개량한복 바지를 입고 돌아다니다가 허리끈을
맸는데도 허리끈의 남은 부분이 무릎까지 내려와서
'거 참 이상하다. 전에는 안 이랬는데....'하고 갸웃갸웃했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바지를 거꾸로 입어서 그랬던 것이었다.
그 바지는 뒤쪽에 허리끈이 박음질 되어있는 바지였다.
이야기해놓고 보니 이건 단순한 게 아니라 바보스러운 것 같다.
사실 내가 바보스러운 것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전에 누가 아주 좋은 가죽 허리띠를 선물해주었는데 이게
너무 커서 쓸 수가 없었다. 그래서 허리띠 끝부분을 자르고
새로 구멍을 뚫었다가 동생한테 혼이 났다. 그럴 때는
버클 쪽을 자른다는 것이었다(그런 방법이 있는 것을 모르고...쯧).
단순함이란 현상 너머의 원리를 이해함으로써 생긴다.
그러므로 그냥 바보스러움과는 다른 것이다. 그것은 이름난 화가가
아주 사실적인 그림을 그리다가 나중에는 몇 개의 선과 색깔만으로
그림을 그리는 것과도 같다.
우리는 '나도 그런 그림은 그리겠다' 그러지만 나의 그림과
그의 그림은 다른 것이다.
미국의 철학자 에머슨의 모토는 '단순한 삶, 고결한 정신(Simple
life high thinking)'이었다한다.
그런 단순한 삶까지는 못 되더라도 언제나
이 바보스러움을 벗어나볼까 하고 혼자 생각해본다.
<2001. 2.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