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5주일 복음(루가 5,1-11)
되는 일이라곤 하나도 없는 머피의 법칙!
그 날 시몬도 마침 그런 날이었다.
밤새도록 고기를 잡으려 애썼지만 <단 한 마리>도 못잡았다는 것 아닌가.
어릴 적부터 이 일에 종사해온 베테랑에게 이보다 치욕적인 사건이 있을 수
있을까..... '단 한마리도 라니....'
(그의 배가 따로 있었다는 것은 웬만한 어부가 아니라는 말이지...)
배에서 나와 그물을 씻고 있는 그의 심정은 허망하기 이를데 없었을 것이다.
얼른 집으로 돌아가 밤 사이의 피로를 풀지 못했던 것도 이런 황당한 심정을
풀기 어려웠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 때, 예수께서는 그의 배를 빌리셨고 그 배를 강단으로 삼아 군중을 가르치
셨다.
배를 빌려준 데 대한 보답이었는지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쳐 고기를 잡으
라"는 말씀을 해 주신다.
뱃일에 대해서는 생 초짜다운 말씀.
어이없는 훈수가 아닐 수 없다.....'그걸 모르는 사람 어디 있냐고라~'.....
"그러나 <선생님>께서 말씀하시니 그물을 치겠습니다."
언젠가 자신의 장모를 일으켜주셨던 분이 아닌가.
그때도 자신의 집을 빌려 드렸는데....수많은 병자들이 완쾌되는 현장을 목격
한 바 있었다.
혹시나 하는 기대였을지도 모른다.
하는 일마다 깨지고 되는 일이 한 개도 없을 때.
그것도 역시 <기적이다>.
이제 곧 주님이 개입하시려는 순간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런 중요한 순간에....... 자살 사이트로 갈 것인지....혹시나 하는
마음에서라도 그분의 말에 순종해 볼 것인지는 전적으로 나에게 달려있다.
과연 엄청나게 많은 고기가 걸려들어 그물이 찢어질 지경이 되어버린 현실에
시몬은 그만 겁에 질려 버렸다.
"<주님>, 저는 죄인입니다. 저에게서 떠나 주십시오."
이제는 <선생님>이 아니다.
그분은 <주님>이셨던 것이다.
인간이 하느님 앞에서 취하는 자연스러운 행동을 시몬도 취하고 있다.
독서의 <이사야> 역시 거룩한 하느님을 뵙고 자신의 더러운 죄상(罪狀)에 직
면하고 있다.
<주님>을 알아보고 있는 시몬의 이름도 이제서부터 <시몬 베드로>로 표기되
고 있음도 놓치지말자.
베드로는 신앙과 연계된 이름이다.
그러나 아직은 베드로(반석)로서의 역할이 완전하지는 않다.
"두려워 하지마라. 너는 이제부터 사람들을 낚을 것이다."
물고기를 낚는 어부가 아닌 사람을 낚는 어부!
그가 처한 상황에 맞춰, 그를 한 차원 높은 삶으로 끌어 높여 주시는 기막힌
해학!
그렇다면 가정 살림을 도맡은 전업 주부로서의 삶을 사는 나에게는 어떤 차
원 높은 삶을 제시해주시겠다는 말씀인가?
사람을 살리는 그 말 그대로의 <살림>의 의미를 제대로 가르쳐 주시겠다는 부
르심이 아닐까?
나를 살리고 식구들을 살리고 관계된 다른 이웃까지를 살리는 묘안을 가르쳐
주시겠다는 부르심이 아닐까?
(이 글을 읽고 있는 각자의 삶의 현장에서는 어떤 삶을 살도록 부르시는 것인
지 주님의 목소리를 잘 들어보아야 한다는 것이지요.)
"그들은 이제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를 따라갔다."
그들의 용기있는 결단으로, 엄청난 수확을 예고하는 교회의 성장이 그들의 새
로운 그물에서 확인되는 일만 남아있는 것이다.
이사야의 소명, 베드로를 비롯한 동료들의 소명은 자신들의 삶의 혁신적인 변
화 뿐만이 아니라, 세상 모든 사람들을 고통의 바다에서 건져 올려 새 생명
을 주라는 차원 높은 어부로서의 삶의 초대였다.
저녁 7시만 되면 동수원 번화가에서는 때아닌 뻐꾸기가 운다.
00나이트 클럽의 웨이터 '뻐꾸기'의 트럭 스피커에서 항상 그 시간에 울려 퍼
지는 소리이다.
오 갈데 없이 방황하는 사람들은 '뻐꾸기'의 <부르심>을 듣고 오늘도 그곳으
로 몰려갈 것이다.
절망의 바다에서 표류하는 사람들에게 구명대를 던져주라는,
고통의 바다에서 신음하는 사람들을 주님의 배로 건져 올리라는 주님의 부르
심에 나는 어떻게 응답하고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