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도서관에 와 앉아 있다.
도서관 열람실의 커다란 책상 한쪽에 앉아 있으면
나는 언제나 행복감을 느낀다.
창에 드리운 커튼 사이로 햇살이 들어오고
다른 사람들 들릴까봐 조용히 속살거리는 소리,
책장 넘기는 소리도 늘 마음을 푸근하게 해주는 것들이다.
어릴 때 내 꿈은 서재가 있는 집에서 사는 것이었다.
'집에 서재를 크게 만들어놓고 거기서 책을 읽고
밤에는 잠도 자야지... 부인은 화를 낼지도 모르겠지만...'
이런 생각을 했던 것이다.
그런 생각은 그 뒤에도 계속 남아 있어서 좋은 책과
좋은 음악과 좋은 사람만 있으면 생은 행복할 거라고
얘기하다가 타박도 여러 번 들었었다.
친구들 얘기로는 "그건 너무 과한 욕심이야"라는 것이었다.
2.
어느 곳이나 도서관은 비슷한 것 같다.
책이름과 지은이들 이름을 알려주는 카드들이 마치 아파트
같은 작은 서랍 속에 가득 들어있고 참고 열람실의 커다란
서가 구석 창 밑에는 으레 푹신한 소파가 있어서
오래된 문학잡지를 읽다가 스르르 잠들기에 좋다.
참고 열람실 이야기가 나왔으니 말이지만 가지가지 책들이 다 있는
거기에서는 가령 두꺼운 지도책을 가져다가 베링해나
지브로올터 해협 어귀를 들여다본다든지
글씨첩에 있는 전서체들을 구경하는 것도 재미있다.
3.
이 도서관에서는 개가제를 채택하고 있는데 윤기나는 나무색
서가들이 길게 늘어서 있는 방에 들어서면 참 세상에는 책도 많고
사람들은 궁금한 것도 많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내가 알지 못하는 것도 참 너무 많다.
그러나 내가 모른다고 해서 그것들이 의미 없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이를테면 세상에 사는 육십억명의 사람들 가운데 극히
일부만 내가 아는 것과 같다. 죽을 때까지도 그럴 것이지만
그러나 그 육십억명의 사람들에겐 모두 아버지 어머니가 있을 것이고
사랑하는 친구가 있을 것이고 나름의 꿈이 있을 것이다.
그것은 모두 내게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이지만
어쨌건 나는 서가의 수많은 책들을 바라보듯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을
존경하는 마음으로 바라보고 싶다.
서가가 늘어선 방의 저쪽에서도 누군가가 나와 같은 생각으로 이쪽을
응시하고 있으리라 믿으면서....
<2000. 10. 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