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비가 온다.
방에 앉아 빗방울 떨어지는 소리를 듣는다.
방은 따뜻하고 밝은 전등 불빛에 젖어 있고
창밖은 땅거미가 내리는 저녁.
어두워지는 하늘을 배경으로 밤나무가 비에 젖고 있다.
낙엽들도 비에 젖고 수도원 정원의 벚나무, 후박나무, 은행나무
모두 다 후줄근해졌겠다.
시골에 내리는 비는 도시의 가로에 내리는 비와는 사뭇 다른
풍경이어서 모든 것이 제자리에서 고즈넉하게 차거운 비를
받아들이고 있다.
살갗에 닿으면 어, 차거, 흠칫 움츠려들게 하는 비를.
도시에서라면 우산을 들고 사람들 종종거리며 뛰어가고
빵빵 자동차 경적 소리 울리고
정류장에서 사람들은 차가 튀기는 물보라를 피해
한 발자국 뒤로 물러나고 있겠지.
전엔 비를 아주 좋아해서 비 노래만 따로 테잎에
녹음해 듣기도 했었다. 그 중에 윤정하라는 가수가
부르는 노래가 있다. 제목은 '찬 비'.
거리에 찬 바람 불어오더니
한 잎 두 잎 낙엽은 지고
내 사랑 먼 길을 떠난다기에
가라 가라 아주 가라 했네.
찬 비야 내려라.
밤을 새워 내려라.
그래도 너만은 잊을 수 없다.
정말 정말 사랑했었다.
어울리지 않게 충분히 센치해졌다.
비도 눈도 바람도, 모든 것이 다 그렇다.
비어있는 마음 속에 내가 몰랐던 것들을 끄집어 내어 놓는다.
그러므로 일 년 중 한 날은 이렇게 유치할 정도로 센치해져서
혼자 중얼거려 보기도 하는 것이다.
"나는 아무 책임 없다 뭐."
<2000. 10. 24.>